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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31. 2020

우리가 구할 수 있다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체념 증후군의 기록>


아이들이 잠에 빠졌다. 한 명도 두 명도 아니고 수백 명이. 10시간도 14시간도 아니고 몇 달에서 몇 년이나 이어지는 깊은 잠에.

보건교사 안은영이 튀어나와 구해줘야만 할 것 같은 이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살아남았지만 트라우마에 할퀸, 난민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들에게.

코마에 가까운 상태로 세상을 등진 채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이 아이들을 "체념 증후군" 상태라 명명하고, 몇 달째 눈을 뜨지 않은 아이 3명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짧은 다큐멘터리로 담았다.


보면서 처음 느낀 감정은 절망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에 담긴 아이들은 일단 각자를 몰아세운 사지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검열과 폭력으로 아이들의 가족이 죽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든 정부에게서, 전통과 문화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짓밟던 인습에서, 겨우 놓여난 참이었다.

이전에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안심하곤 했다. 아이들이 무사히 사지를 벗어났다는 것. 불안하지만 그래도 희망적이었다. 적어도 폭격 때문에 죽고, 죽은 동생을 껴안고 울면서 병원을 찾고, 먼지와 피가 범벅이 되어 허공을 바라보는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영화 <가버나움>의 자인, 영화 <노래로 쏘아 올린 기적>에서 노우르 역할을 맡은 배우 모두 안전한 나라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엄청난 주목과 박수갈채를 받는 자인의 얼굴을 볼 때 조금씩 걱정되기는 했다. 저 아이를 둘러싼 세상이 그토록 불친절했는데 갑작스럽게 박수를 보내고 있으니, 지금 어떨지. 잘 적응하고 건강하게 자라려면 더 세심한 돌봄을 받아야 할 텐데, 정도의 가벼운 걱정이었다.


이제 다 괜찮을 줄 알았다. 트라우마는 어디든 사람을 쫓아와 금세 꿰뚫고 만다는 걸 그토록 간단하게 잊었다.

내 일이 아니라서. 너무 딴 세상 이야기라서.

음식물을 먹지 않게 되고, 가만히 앉아있게 되고, 서서히 어둠 속으로 침잠하다가 기어코 눈을 감아버린 아이들의 모습. 가짜 뉴스를 퍼뜨린 극우 정치인들 말마따나 거짓말처럼 보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너무 아프고 불안하고 두려워 눈을 감아버렸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운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고통받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 아이들을 돌보는 법을 우리는 다시 배워야만 한다.


새삼스럽게 다시 배운다는 것. 그건 아이들의 부모에게도 마찬가지다. 몸을 놓아버린 아이들을 돌보는 법을 다시 배우고 있었다. 호스로 연결해 유동식을 넣어주고, 입에 아이스크림을 넣어주고, 음식이 잘 넘어가는지 지켜본다. 근육이 굳지 않도록 팔다리를 움직여 주고, 물과 비누로 씻긴다. 눈꺼풀을 살포시 들어 올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다.


그래도  손을 함께 잡는 이들이 있다.  다큐멘터리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의료인들과 기자들. 때로는 이를 돌보는 손길로, 때로는 목소리로만 등장해서 아이들이 별로 겪어보지 못한 지원을 잠잠하게 건넨다. 아이들은 눈을 감고도 상황을 보고 듣는다.


난민 문제는 코로나 못지않게 어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팬데믹으로 우리가 겪은 혼란, 다시는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을 그들은 이미 겪고 있었다. 아이들은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위험과 불안에 가장 먼저 반응하고 쓰러져 간다. 슬프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그랬듯, 위기는 가장 약한 이들을 먼저 무너뜨린다.

다방면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난민에 대한 인식개선도 필요하지만, 시스템에 대한 고민도 된다. 아이들이 난민 신청 결과를 직접 듣고 까무러친 것이다. 스웨덴에 사는 동안 이미 스웨덴어를 습득하고 학교에서 친구를 사귄 아이들은, 정치와 국적보다 눈앞의 세계를 오롯이 받아들일 줄 아는 아이들은, 판결문이 던진 충격을 온몸으로 받고 말았다. 난민의 절반 가량이 아동이라는데, 난민 신청과 결과 전달 과정에서도 보다 아동을 배려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최소한의 배려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코로나로 경제적인 타격이 컸던 올해에도 기부금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고 한다. 거시적인 통계 뒤에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버티는 누군가의 따뜻한 마음이 있는 것이다. 선한 마음은 실은 투쟁하는 마음, 버티는 마음이다. 그렇게 우리는 무지개 칼을 휘두르지 않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꿀 수 있다. 식물은 아니지만 우리도 일종의 광합성을 하는 존재이니까.

들숨이 나를 이루고, 나를 이룬 것들은 다시 날숨이 된다. 들숨과 날숨을 유심히 살피고, 조금 더 따뜻하게 바꾸어갈 수 있다. 따뜻한 글을 읽고, 소외된 곳을 주목하고, 때로 이해할 수 없어 복잡한 마음과 나의 이기를 챙기는 합리적인 마음이 뒤엉킬 때는 혐오의 말을 뱉는 대신 잠시 고요하게 숨을 쉬자.

40분의 짧은 러닝타임 동안 피어나는 이 숨은 이 세계의 어딘가에, 어떤 의미로 가 닿을까. 숨결이 모여 누군가의 잠을 깨우고, 잘 잤는지 다정하게 묻는 인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커다란 변화는 거대한 개혁보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의 연결에서 온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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