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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24. 2021

결혼 뒤에 숨은 것들

넷플릭스 오리지널 <수터블 보이> (2020, 미라 나이르 감독)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수터블 보이>, 2020


넷플릭스 <수터블 보이>는 1951년을 배경으로 한다. <브리저튼>에서 수위 낮추고 알록달록한 문화색을 더 집어넣은 느낌의, 그냥 봐도 재미있는 드라마지만 당시 인도 상황을 간단히 훑고 시작하면 더 좋다.


독립국 인도는 1947년 그 첫 발을 떼었고, 1951년은 이제 막 나라 기틀을 잡아가던 시절이었다. 신생 독립국가가 으레 그렇듯, 다양한 목소리가 날카롭게 섞이는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1947년. 그 혼란은 종교에서 먼저 터졌다. 어제까지 이웃이었던 힌두와 무슬림이 곳곳에서 서로를 죽였고, 찔렀고, 불태웠고, 유린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범죄가 가장 끔찍한 형태로 일어났다. 영국은 조용히 발을 뺐다. 남은 건 혼란뿐이었다.


몇 년이 흐른다. 간디가 암살당하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선이 그어지고, 헌법과 의회를 세운다. 그리고 마침내 1951년. 첫 총선을 하게 될 해. 첫 아시안게임이 델리에서 개최되는 해. 혼란을 뒤로하고 나아가기 시작하는 시기. 알고 있던 세계와 모르는 세계가 급격하게 섞여들던 때.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공존하던 때.


<수터블 보이>는 바로 그때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라타(Lata)를 주인공으로 세운다. 라타는 브람푸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다. 1951년의 인도에서는 '결혼 적령기' 여성이었다.



라타의 어머니는 "너는 내가 골라주는 사람과 결혼해야지."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며, 딸을 위해 딱 좋은 남편감A suitable boy을 찾아주고자 한다. 라타는 영문학 공부에 흥미도 있고 성적도 좋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자신이 꼭 결혼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6화가 진행되는 동안 라타는 3명의 남성을 만난다. 어머니의 마음, 오빠 부부의 마음, 친구의 마음이 제각기 다른 곳을 가리키는 안에서 라타의 마음도 서서히 자기 방향을 찾아간다.


카비르 두라니, 아밋 차터지, 하레쉬 칸나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상대, 카비르 두라니. 크리켓 선수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아, 라타와 낭독회에서 만나기도 한다. 라타도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성씨를 듣게 된 순간 표정이 굳어진다. 인도에서는 이름이 곧 명함 역할을 하는 경우가 있다. '두라니'는 이슬람계 이름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유혈 사태를 벌이던 집단의 결합이라면, 당대의 상상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벗어난다. 라타는 차라리 같이 도망치자 하고, 카비르는 현실에서 방법을 찾아보자 말하면서 두 연인의 관계는 휘청거린다.


그때 새언니 메나크시가 나선다. 그가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인물은 본인의 오빠, 아밋 차터지. 차터지는 벵갈 지역의 명망 있고 카스트 높은 가문이다. 극 중에서도 고위급 법조인의 집으로 나온다. 아밋은 법 공부를 그만두고, 최근 각광받는 시인이 되었다. 문학이라는 공통분모로 라타와 금방 친해지지만, 며느리 메나크시를 못마땅해하는 라타의 어머니는 이 관계를 어떻게든 막고 싶다.


그래서 라타의 어머니가 인맥을 동원하여 찾아낸 사람이 바로 하레쉬 칸나. 영국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제화 산업에 뛰어든, 열심히 일하는 삶을 중시하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의 방에도 우연히 토마스 하디의 책이 놓여있다. 라타와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으며 라타 마음에 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카비르와의 관계에 힌두-무슬림 종교 분쟁의 일면을 담았다면, 아밋에게는 과거-현재의 연결고리가 들어있다. 이들은 식민지 시절에도 삶에 큰 타격이 없을 만큼 상류층이었다. 메나크시와 결혼해서 이 대열에 속한 라타의 오빠 아룬은 더 노골적이다. 식민지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거나, 영국에 가본 적도 없으면서 영국의 골목과 가게들까지 아는 척한다거나. 반면 실용성을 중시하는 하레쉬는 현재-미래의 연결고리를 품은 인물이다. 하레쉬에게 영국 유학 시절은 필요한 공부 과정이었을 뿐, 자부심의 근원이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앞으로 자신이 일구어갈 미래를 믿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라타의 선택은 상징적이다. 당시 인도를 직관적으로 반영한다. 하지만 현대사는 늘 오늘과 떨어질 수 없나 보다. 이 상징은 현 인도 여당이자 극우 힌두주의 색깔을 띤 BJP당에 이용당했다. 이들은 심지어 넷플릭스 불매를 외쳤는데, 이유가 대단하다. 힌두 여성과 무슬림 남성이 힌두 사원에서 키스하는 장면이 있어서였다. 러브 지하드(love jihad, 무슬림이 교세 확장을 위해 힌두 여성을 대상으로 사랑을 가장해서 결혼한다는, 일부 힌두교인의 주장)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다 못해, 아예 인도 넷플릭스 임원 둘을 상대로 고소장을 접수해버렸다.


인도 문화에서 키스는 아주 내밀한 스킨십으로 간주되어, 영화에서도 터부시되어 오긴 했다. 예비 며느리가 찍은 키스 신이 불편하다며 수정을 요청한 시아버지가 있었다니 말 다 했다. (보수적인 시골 노인을 상상했다면 틀렸다. 발리우드의 기라성 같은 배우·제작자 아미타브 밧찬이다.) 공공장소에서의 애정 행각도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상상 못 할 일이다. 그러나 이를 종교 간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은 결이 좀 다른 이야기다.


실제로 일부 지역에서는 BJP당이 '결혼을 통한 불법 개종'처벌 법령을 만들고 있다. <수터블 보이>는 이슈 몰이를 위해 이용당했을 뿐이다. 밸런타인데이가 성범죄를 일으키는 서구 문화니까 없애자는 이들에게 뭘 바라겠냐만은... 현실 속 수많은 라타와 카비르가 위협받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심각한 문제다.


마헤쉬 카푸르 내무부장관과 지주 나와브 사힙

정작 <수터블 보이>에는 종교를 넘어 단단하게 쌓은 우정이 나온다. 라타의 선택이 주축이지만, 라타의 언니가 시집간 카푸르 가문 이야기도 한 축을 이룬다. 마헤쉬 카푸르 내무부장관은 토지 개혁안을 내세우고 민생에 신경 쓰는 정치인이라, 지주들과 대립의 각을 세울 수밖에 없다. 유일하게 카푸르 장관의 선의를 알아주는 인물이 무슬림 대지주 나와브 사힙이다. 카푸르 장관의 천덕꾸러기 둘째 만과 나와브 사힙의 아들 피로즈도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 배경지식 없이 1화 켰다가 피로즈 눈빛 보고 이 둘이 사랑하는 얘기인가 싶었을 정도. (아니었다.)



만의 마음이 향한 상대는, 집안 행사에 노래하러 왔던 기생 사이다 바이. 사이다는 우르두어(말은 힌디어와 비슷하나 문자를 아랍어로 쓰는, 인도 내 무슬림들이 많이 사용하는 언어)로 아름다운 시를 노래하고, 만은 거기 푹 빠진다. 둘은 그렇게 주변 모두가 만류하는 사랑의 길을 걷는다. 물론 우르두어 쓰는 무슬림 여성과 힌두교 남성이 사랑할 때에는 힌두주의자들도 '러브 지하드' 소리를 하지 않았다. 라타와 카비르보다 사이다와 만 쪽이 훨씬 파괴적인 사랑에 빠진 것 같은데도.


이들의 사랑은 끝이 시간문제이기에 더 달콤하다. 종교, 신분, 나이 무엇 하나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 시와 노래로 시작해 눈빛으로 남은 사랑. 라타의 이야기가 당대 가장 신여성의 이야기라면, 이들의 이야기에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수터블 보이>는 그렇게 시대 이야기인 동시에 가족 이야기, 연인들의 이야기다. 6화밖에 되지 않지만 일일드라마를 하나 다 본 기분이 든다. 전혀 다른 시공간의 일일드라마는 이런 식으로 펼쳐진다.




이 시리즈를 맡은 미라 나이르 감독은 이전에 해리포터 영화의 감독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다. 줌파 라히리 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영화화를 앞두고 있어, 집중을 위해 거절했다고 한다. 그래도 해리포터 시리즈는 이미 영화화가 진행 중이었고 세계적인 성공도 보장된 자리였으니 고민은 되었을 것이다.


그는 당시 14살이었던 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엄마, 해리포터 시리즈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많아요.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을 찍을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라는 대답을 듣고, 그래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생각하며 거절했다고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혔다.


여성영화라는 단어가 더 이상 변방의 언어가 아닌 지금, <브리저튼>도 그렇고 <수터블 보이> 또한 시대의 한계 속에서 그간 부정되었던 여성의 선택권을 조망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본 후에야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미라 나이르 감독 본인이 했던 선택처럼, 극 중 라타나 사이다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처럼.


결혼이라는 두 글자를 둘러싼 수많은 담론들. 당사자 둘 이외에도 수많은 당사자들과, 웨딩드레스처럼 겹겹이 싸인 본질 바깥의 것들. 모두 중요하지만 본질은 결국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어쩌면 결혼 뒤에 숨은 것들이다. 비단 결혼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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