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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14. 2021

우주에 흐르는 언어

넷플릭스: 승리호 (2021, 조승희 감독)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천문학에 관한 책을 좋아한다. 천문학은 정확한 수학 계산의 세계라지만, 나야 뭐 신비롭고 영롱한 우주를 탐험하는 기분만 낸다. 대중서를 읽으면서도 반쯤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감각조차 즐겁다.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우주에서 자꾸 시를 발견하게 된다. 우주에는 언어가 부유하고 있다.


  언어의 제1 기능은 누가 뭐래도 소통일 텐데, 소통에도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 작동하는 걸까. 깊이 소통하려 할수록 역설적으로 밀려난다. 서로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동시에,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불완전한 도전. 우주는 그 마음을 반추하게 만든다. 그 마음을 가장 유려하게 표현한 문장이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좋아한다.


 우주라는 광대한 스타디움에서 지구는 아주 작은 무대에 불과합니다. 인류 역사 속의 무수한 장군과 황제들이  작은 점의 극히 일부를, 그것도 아주 잠깐 동안 차지하는 영광과 승리를 누리기 위해 죽였던 사람들이 흘린 피의 강물을   생각해보십시오.  작은 픽셀의 한쪽 구석에서  사람들이 같은 픽셀의 다른 쪽에 있는, 겉모습이 거의 분간도  되는 사람들에게 저지른   없는 만행을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잦은 오해가 있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죽이려고 했는지, 그리고 그런 그들의 증오가 얼마나 강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위대한 척하는 우리의 몸짓, 스스로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믿음, 우리가 우주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망상은  창백한 파란 불빛 하나만 봐도  근거를 잃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우주의 암흑 속에 있는 외로운 하나의 점입니다.  광대한 우주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안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파멸시킨다 해도 우리를 구원해줄 도움이 외부에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 칼 세이건, <창백한 푸른 점> 중에서


  영화 <승리호>를 보다 같은 이유로 조금 감격하고 말았다. 정말이지 뜻밖이었다.



  <승리호>는 '한국 최초 우주 SF'라는 데서 이미 많은 기대와 우려를 한 몸에 받으며 발맘발맘 다가온 영화다. <씨네 21> 지를 꼬박꼬박 읽는 내게도, 주식에 관심 있는 지인에게도, 배우 김태리를 응원하는 친구에게도 <승리호>는 이미 익숙한 이름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듣도보도 못한 놈들의 우주 청소가 시작된다!"는 포스터 문구에서도 예고편 영상에서도 '한 탕을 꿈꾸는' 캐릭터 냄새를 맡았다. 배경이 우주냐 도박 판이냐 밀거래 현장이냐 정도의 차이만 있는, 비슷한 영화를 보게 될까 싶어 그다지 당기지 않았다. "가자"라든가 "실력 좀 볼까?" 같은 대사도 사양하고 싶었다.


  우주 SF를 좋아하는 사람도 아닌데, 장르 내 기존 작품(예를 들면 마블이라든지 마블이라든지 마블)과 많이 다를 것 같지도 않은데... 나까지 봐야 할까? 그래도 남들 다 보니까 나도 보게 되겠지, 모두가 찾는 관광지에서 브이하고 사진을 찍는 마음으로 아이맥스 예매를 하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넷플릭스로 만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화려한 CG를 극장에서 보지 못한 것은 아깝기 그지없지만, 개인적으로 넷플릭스의 최대 장점이라 생각하는 자유자재 자막으로 만난 건 <승리호>에 더없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뚜껑 열어보니 장르적 특성을 즐길 수 있음은 물론, 거기서 아주 조금 비틀어 외려 신선한 면도 있었다. <승리호>가 '한국 최초 우주 SF'라는 말에는, 대충 상상했던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2092년, 지구는 병들고 우주 위성궤도에 인류의 새로운 보금자리인 UTS가 만들어졌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 조종사 ‘태호’(송중기) 과거, 우주 해적단을 이끌었던 ‘장 선장’(김태리) 갱단 두목이었지만 이제는 기관사가 된 ‘타이거 박’(진선규) 평생 이루고 싶은 꿈을 가진 작살잡이 로봇 ‘업동이’(유해진). 이들은 우주 쓰레기를 주워 돈을 버는 청소선 ‘승리호’의 선원들이다. “오지 마! 쳐다보지도 말고, 숨도 조심해서 쉬어. 엉겨 붙을 생각하지 마!” 어느 날, 사고 우주정을 수거한 ‘승리호’는 그 안에 숨어있던 대량살상 무기로 알려진 인간형 로봇 ‘도로시’를 발견한다. 돈이 절실한 선원들은 ‘도로시’를 거액의 돈과 맞바꾸기 위한 위험한 거래를 계획하는데… “비켜라, 이 무능한 것들아. 저건 내 거다!”


  시놉시스를 읽으면 영화가 어떻게 전개될지, 배우들이 어떤 연기를 할지 대충 느껴진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대강 모두가 예상한 느낌대로 흘러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의문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우주 공간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한국어가, 우주선에서 화투장 섞는 모양새가, '업동이'라는 이름만으로 로봇의 과거를 얼추 짐작하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심지어 더 큰 카타르시스는 한국어 바깥에서 온다. 나이지리아식 피진어를 쓰는 인물이 있고, 흑인인 그가 비굴하거나 비열한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설리반의 비서는 인도 억양 영어를 쓰는 남성이라는 것. 다양한 인종의 우주 청소부들이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것.


  <승리호> 제작비는 약 240억 원이라는데, 비슷한 장르에서 천억 대 예산을 쓰는 할리우드 영화가 천편일률 미국 중심적이던 걸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물론 같은 문장에서 훨씬 적은 예산으로 놀라운 CG를 구현해낸 제작진의 노고와 열정에도 생각이 미치고, 이 점은 <승리호>에서 꼭 특기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그것보다 주류 바깥에서만 가질 수 있는 감수성을 클리셰 사이사이에 잘 넣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클리셰라서 싫을 수 있지만, 클리셰에는 클리셰의 힘이 있다. 마블 영화를 새로워서 좋아하는 건 아니듯이. 그런데 <승리호>는 클리셰를 적극 이용하는 장르임에도,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신선한 변용을 보여준다. 혈연 기반의 모성애 대신 혈연에 매이지 않은 부성애, 화이트 워싱이 아닌 다양한 인종과 언어, 라이너 마리아 릴케를 읽는 젠더 프리 인물의 존재, "저건 내 거다!" 하는 대사도 있지만 "안돼. 정의롭지가 못해."라는 대사도 있다는 것.


  생각해보면 조성희 감독은 전작 <늑대소년>이나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서도 묘한 변용을, 아주 말갛고 귀여운 인물로 담아내곤 했다. <승리호>에서도 여지없이 귀엽고 무해한 힘이 등장한다. 거대한 악과 싸워 지구를 구한답시고 자기 과시적이 되거나, 장르의 장점을 살린답시고 파괴를 위한 파괴를 하지 않는다.



  아쉬움은 분명 있다. 그러나 변방에서 길러지는 이런 감수성을 한국형 SF의 'K-감성'으로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주로 어선에 쓰는 흰색 페인트 글씨로 '승리'라고 쓰여있고 태극기까지 그려진 낡은 함체라든지, '타이거 박'을 꼬박꼬박 '박 씨'라고만 부르는 점이라든지, (우리는 '타이거!' 이렇게는 못 불러요. 벡터맨이 아니고서야.) 인물의 과거지사를 이야기하다 보면 으레 신파적인 코드가 들어간다든지, 이런 것도 'K-감성'이라 할 수 있지만. 기존에 우리가 자조적으로 말하던 'K-감성'보다는 훨씬 덜 질척인다는 점과 함께, <승리호>의 우주 곳곳에 다채롭게 흐르던 언어는 새로운 기대감을 준다.



  물론 그 언어의 신비도 시작점은 단조롭기 짝이 없다. 영화에도 나오듯 종이에 글씨를 써 보는 것, 반복해서 써내려가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신비롭게 연결한다. 우주에서 우주로, 그 다음 신비로. 그렇게 다양한 언어로 번져가는 것이다. 중심이라고 부르지 못할 곳에서 말을 배우고 글을 익힌 우리는 이제 다음 신비로 향한다. <승리호>는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좋은 시작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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