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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15. 2021

바다에 흐르는 침묵

넷플릭스: 애틀랜틱스 (2019, 마티 디옵 감독)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승리호> 우리를 가본  없는 우주로, 그곳에 언어로 흐르는 변방의 감수성으로 우리를 이끌었다면- 우리를 가본  없는 바다로,  위를 가득 메운 침묵으로 이끄는 영화도 있다. 햇볕 아래에선 은회색으로, 밤을 따라서는 짙푸르게 빛나는 세네갈의 바다로. 바다와 달빛과 조명 아래 함께 푸르러지는 얼굴들의 세계를 담은 영화, <애틀랜틱스>.


  세네갈이 너무 낯설다면 다시 소개해보자. 이 영화는 2019년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과 나란히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다. 게다가 이 영화의 촬영감독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촬영감독이었던 클레르 마통. 이쯤 되면 이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고도 넘친다. 개봉하면 꼭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넷플릭스 직행열차를 탔다. 극장에서 보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극악의 상영 스케줄을 찾아헤매지 않고 안방 1열에서 언제든 볼 수 있다.



  촘촘한 대사에 의지하는 영화라기보다, 무언의 이미지에 더 많이 기대고 있는 영화다. 건조한 공기가 여기까지 훅 끼쳐올 것만 같은, 황색 흙먼지로 덮인 도심에서 체불 임금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담으며 시작한다. 대서양을 끼고 은빛으로 빛나는 건물과 이들의 세상은 대조적이다. 사측에서 아무 응답도 받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 동료들처럼 힘찬 노래조차 부르지 못하고 고개를 내젓는 술레이만.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듯한 거리에서 기차가 지나가고 나면, 반대편에 다정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연인 아다가 있다.


  쉴 새 없이 반짝이는 바다 앞에서 입을 맞추며, 바로 옆에서도 서로를 그리워하고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연인. 애석하지만 이들은 축복받지 못한 사이다. 아다는 얼마 후 다른 남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밤에 다시 만나자는 연인의 인사는 이루어지지 못한다. 친구들이 만나는 해변의 클럽에 아다가 도착했을 때, 술레이만은 없다. 그가 이미 다른 남자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는 말을, 클럽 주인이자 친구인 디오르가 전해줄 뿐이다. 아다가 눈물을 흘리며 주어진 결혼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들이 만나는 해변의 클럽에는 간이 의자가 놓여있고, 조명이 반딧불처럼 해파리처럼 흐른다. 영화 속 세네갈 젊은이들의 모습 그대로다. 든든한 뼈도 없이, 수많은 '임시'와 '간이'로 유예된 시간을 유영하는. 여성들에게는 괴로움이 한 겹 더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 자리에 오르기 위해 아다가 감내해야 했던 것은 인형 옷 같은 드레스와 병원에서 보낸 수치스러운 시간이었다.


  이들과 함께 고민하는 어른은 없다. 유예하는 방식으로, 사탕발림으로, 종교로, 전통으로, 잘잘못보다 인간관계를 더 고려하는 관행들로, 통제로, 남 탓으로, 갖은 방법들로 문제를 어물쩡 넘어간다. 임금을 달라고 맞서는 데에 실패한 젊은이들은 스페인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고, 직면에 이어 도피조차 실패한다. 이들은 자신의 괴로움을 대언할 이들을 세운다. 그 모습은 웅장하지도 무섭지도 않다. 이토록 당연한 기본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 정도의 초자연적 현상까지 동원해야 하는 것이. 그럴 때조차 자기 편에 선, 입장이 다르지 않은 이들밖에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기까지 하다.


  흙먼지 이는 세상에서 술레이만을 따라 아다에게 닿은 이야기는 두 사람의 로맨스인 듯싶다가 곧 그렇게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이어지며, 확장되고 다시 모이기를 반복한다. 얼핏 아다를 소실점으로 잡은 그림 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볼수록 스푸마토 기법으로 번지듯 그린 그림 같다는 생각으로 바뀐다. 그림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한 선과 기하학적 구조보다는 색채와 공기의 세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 중심에는 클레르 마통이 담은 바다가 있다.



  바다는 온전히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채로 늘 거기 있다. 도피로였던 동시에 그 기회마저 삼켜버린 곳.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침묵하는 곳. 빛과 색을 달리하며, 때로는 맹렬하게 때로는 잔잔하게 일렁이면서. 영화 내내 바다는 희뿌옇고 신비로운 존재감을 과시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이 등장하며 영화가 결을 바꿀 때, 그 전환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나 바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변화를 암시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그 자체로 하나의 등장인물 같았다.


  제목도 애틀랜틱스, 대서양이지만 바다를 또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쓸 만큼 가까이 둔 데서는 마티 디옵 감독이 세네갈계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프리카 최초로 장편 영화를 연출한 우스만 셈벤 감독도 세네갈 출신이고, 마티 디옵 감독 본인도 숙부(지브릴 디옵 맘베티)가 유명 감독이다. 세네갈의 줄기 같은 것이 흐르는 셈이다. 게다가 감독의 세계관이 지문처럼 찍힐 수밖에 없는, 첫 장편 연출작이다. 우리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사실상의 섬에 살지만 느껴보지 못한, 낯선 바다의 감각을 건네준다.



  영화에서 아다가 말했듯 어떤 기억은 징조가 된다. 하루의 기억이 사람을 새로이 살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아다의 세상일어났던 이상한 일들은 아다와 친구들의 세상에 어떤 변화를 주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다는 바다처럼 끊임없이 철썩이며 살아갈 것이다. 첩첩이 쌓인 문제들, 놓치고 잃어버린 것들, 그 모든 것들을 넘어서. 어른들이 기댔던 모든 우상이 다 죽고 썩어 문드러진 후에도 여전히 철썩거리고 있을 대서양처럼. 멈추지 않고 썩지도 않고 말도 없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도 비척비척 걸어가는 작은 인간. 그 뒤로 펼쳐진 바다에는 침묵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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