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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12. 2021

아무 날도 아닌 날

영화: 팜 스프링스 (2020, 맥스 바바코우 감독)


요즘 혼자만의 챌린지를 가끔 한다. 정말 소박해서 챌린지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인데, 백발백중 실패했다. 그건 바로... "집에 가고 싶어요"라는 말 하지 않기. 그게 뭐라고 그렇게 어렵다. 의식하지 않아도 숨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보다도 더 가끔 다짐한다. 그날이 그날 같아도 오늘은 오늘 하루뿐이지. 그러니 기분 좋게 재미있게,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보내야지. 나는 내 일을 사랑하는 어른이니까! 그리고 어른의 다짐은 깃털보다 가볍게 후 흩날리고 만다. 작심삼일은 고사하고 몇 시간, 아니 불과 몇 분 사이 사라지는 다짐이다.


이 지극한 현실이 당신의 삶과도 맞닿아 있다면, 올여름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한 편을 권하고 싶다. 영화 <팜 스프링스>는 포스터에서부터 여름이 줄줄 흘러내려, 현실에서 백만 광년쯤 떨어진 어딘가에서 유쾌한 사랑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이야기겠거니 싶다. 심지어 타임 루프라는 판타지 요소까지 들어갔다니 더더욱. 그러나 정작 영화를 보는 동안 떠오른 것은, 매일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내뱉는 내 모습이었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공식을 따른다. 어떤 사건에 말려들어 서로를 싫어하던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속사포 같은 대사로 이어가는 재미. 이 영화의 두 사람은 세라와 나일스다. 동생의 결혼식장에서 누구보다 뚱한 표정으로 술만 들이켜고 있는 세라, 그리고 결혼식장에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난입한 나일스. 모두가 격식을 갖추고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두 사람.



알고 보니 나일스는 타임루프, 즉 무한 반복되는 하루에 갇혀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같은 날이 반복된다. 어제가 오늘, 내일이 오늘, 매일 같은 매일. 그런데 세라도 그 하루에 같이 휘말리면서 두 사람은 매일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나일스에게 화도 내고, 벗어날 방법도 열심히 찾아보지만 세라 또한 나일스가 이미 겪었던 절망을 고스란히 겪으며 그 하루에 갇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침이 오면 다시 사람들은 결혼식 준비로 분주하고, 두 사람만이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사실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시간이 사랑의 시간과 매우 닮아 있다. 모두 쳇바퀴 같은 하루를 살 때 두 사람만이 하루하루를 함께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 그게 연애 아닌가?



두 사람이 사랑의 시간과 닮은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모습은 사랑스럽다. 아무 날도 아닌 날 반짝이 옷을 입고 즐기는 모습을 보면 "Happy unbirthday!"를 축하하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생각도 난다. 조금씩 연습해 완벽하게 합을 맞춘 안무를 펼치는 모습, 꿈같은 현실에서 함께 본 비현실적인 풍경까지.


두 사람은 그렇게 같은 날들을 조금씩 바꾸어간다.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하루의 굴레를 마주 대한다. 똑같은 날들을 조금씩 바꾸어가는 힘. 함께 있는 데서 오는 힘. 마침내 옮기는 씩씩한 발걸음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모두가 쳇바퀴 같이 하루를 사는 것. 그건 타임 루프라는 설정이 없는 내 삶에도 낯설지 않았다. 매일 같은 시간에 출근길에 오르고, 같은 시간에 같은 커피를 마시고, 다짐을 깨뜨리며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은 흘러나오고, 그날이 그날 같이 고만고만한 것. 일상을 마주하는 내 마음이 그랬다.


여행 가는 날만 내 삶이 아닌데 꼭 일상을 벗어나야만 호젓하게 생의 감각을 누리곤 한다. 여행도 갈 수 없는 지금, 극장에 앉아 있는 한 시간 반 만에 긴 여행의 귀가 길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여기가 내 삶이니까. 컨베이어 벨트처럼 착착 굴러가기만 하는 삶에서 나는 피자 튜브 위에 동실동실 떠있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아무 날도 아닌 날을 기꺼이 맞아들이며 누군가와 눈 맞추고 웃어 보일 것인지.



두 주인공이 맥주를 얼마나 마셔대는지 보고 나면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진다. 타임루프보다 누군가와 함께 여름밤을 즐기는 것이 더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아무 날도 아닌 날을 특별하게 만드는 걸 결국 함께 걷는 누군가의 씩씩한 발걸음이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에서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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