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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Aug 23. 2021

멀리서 보면 희극

영화: 박강아름 결혼하다 (2019, 박강아름 감독)

소위 '사적 다큐' 작품들을 좋아한다. 나와 공통점도 별로 없는 개인의 삶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는데, 들여다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나 보편적인 마음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지점에서. 게임을 즐기지 않았어도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며 동년배의 마음을 뭉클 느꼈고, 영재교육이나 부동산 투자와 먼 삶을 살았지만 <디어 마이 지니어스>나 <버블 패밀리>를 보며 동시대 사람들의 사랑과 노력, 착잡함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박강아름 감독의 전작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도 재미있게 보았다. 오랜 세월의 영상을 잘라 모아, 박강아름 감독 자신을 둘러싼 외모 품평부터 소개팅 후기, 복잡한 시선을 담았다. 애정 어린 친구의 조언일 때도 있고, 학생들이 툭툭 뱉는 말일 때도 있지만, 이들 누구의 말도 낯설지 않다. 내게도 익숙한 지식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에는 다양한 방향이 있다고 믿고 싶어 하지만, 사실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받는 때가 훨씬 많으니까. 그나마 협소한 변주라도 이루어지며 조금씩 미의 기준이 확장되어 온 지금에 비해, 이전은 더했다. 우리는 참 야만적인 사회에 살아왔고, 살고 있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는 한결 편안해진 얼굴의 박강아름 감독을 담으며 마친다. 상대의 무례함을 갈라내어, 그들의 문제지 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 몸무게를 재며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슬퍼했지만 거기에 카메라 무게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마지막에야 깨닫는다. 우리가 보는 우리에게도 그런 시선의 무게가 항상 달려 있겠지. 그리고 분명 카메라보다 무거울 것이다.



그리고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 끝에 함께 있던 두 사람은 강아지 슈슈와 함께 프랑스로 향한다. 프랑스어를 아는 아름이 행정과 경제를 맡고, 프랑스에 큰 뜻이 없었던 남편 성만이 가사와 이후 육아까지 주로 맡게 된다.



한국에서 한 사람의 여성과 남성이 만나 결혼하는 풍경을 하나의 그림으로만 담아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떤 보편적인 스토리라인이 존재한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고 흔히 말하는 보편적 삶의 모양새란 게 있기도 하고, 어쩐지 결혼이 가까워 오면 제각각의 연애담들이 소실점 따라가듯 비슷한 길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박강아름 감독과 성만 씨의 결혼은 그 보편적 모양새와 조금 다르다. 프랑스로 떠난 영화감독과 그 배우자라는 점도 그렇지만, 맞벌이를 하면 했지 남편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경우는 확실히 드무니까. 그럼에도 이 영화에 그려진 정서는 보편적이다. 끝없는 가사는 전쟁 같고, 육아는 눈 뗄 틈조차 허락하지 않고, 생활비는 늘 빠듯하고, 일상은 숨 가쁘게 바쁘다.


<박강아름의 가장무도회>에서 인물들의 말을 평가하고 또 스스로를 돌아보며, 박강아름 감독의 몸으로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를 깊이 비춰냈다면, <박강아름 결혼하다>에서는 결혼과 결혼에서 파생되는 노동과 두 사람의 관계를 삼각점으로 촘촘하게 이어, 질문을 던진다.



두 사람의 일상에도 먹구름이 낀다. 독박 육아와 끝없는 가사에 지친 성만은 주부 우울증을 앓고, 출산 이후 이전과 달라진 몸으로 (그리고 임신과 출산이 몸에 이런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걸 전혀 몰랐던 마음으로) 학교 생활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는 아름은 너무 바쁘다.


결혼은 원래 이런 걸까? 왜 결혼을 한 걸까? 결혼이란 무엇인가? 박강아름 감독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그 질문을 해소하고자 자신의 기억도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질문도 던져 본다. 그 수단은 집에 차리는 한 테이블 식당, 외길식당이다. 성만의 주부 우울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생활로 시작했다가 멈춘 프로젝트를 다시 굴려본 것이다.



수없는 질문과 대화가 해답을 찾아줄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다양한 부부 혹은 연인에게 그들만의 서사가 있고, 상황이 있고, 입장이 있으니까. 부분적으로 공명할 수는 있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프랑스에 거주한 한국인 여성이 성만의 깊은 외로움을 안쓰러워하는 장면에서처럼. 박강아름 감독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공명하며 질문을 던지듯이.




 글을 쓰기 직전, 설문 요청을 하나 받았다.  문항은 현재 나의 상태와 가장 가까운 것을 고르라고 했고, 보기에는 결혼과 자녀 유무에 대한 다양한 선택지가 들어 있었다. 500자로 서술하라고 해도 답하기 렵지만, 아무튼 질문은 '현재 나의 상태' '가장 가까운' 것을 물었으므로 나는 답했다. 결혼과 자녀   원치 않는다,라고. 인생은 시시로 몸피를 뒤트니 앞으로 언제  생각이 바뀔지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중 제일 가까운 선택지였다.


얼핏 단순한 객관식 선택지 아도  뒤에는 언제나 질문과 고민이 깊다. 결혼이  이상 의무가 아닌 지금 결혼 적령기로 분류되는 나이를 살면서 더욱 그렇다. 이십대 내내 생각했다. 결혼이라는 관계는 희망적으로 바라보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하기 위한 목적의 결혼은  마음이 없다고. 지금 품고 있는, 아직은 잗다랗게 반짝거리는 꿈의 궤도를 모두 수정해야 하는 결정이니만큼, 잘할  없을 바엔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 나의 인력으로 되지 않으니, 현재 나의 상태에 가장 가까운 대답은 '원치 않는다'였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를 보면서는 저런 결혼이라면  좋다,  생각이 들었다.



아름이 덩케르크의 바다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람은 흐린  바다를 찾는다. 성만은 몸이 좋지 않아 불편하고, 아름은 성만이 투덜댄다는 느낌으로 불편하다. 가볍게 던지는 타박과 잠깐의 침묵. 익숙한 갈등의 언어들. 그러나  갈등   사람이 하는 것은, 바퀴가 슥슥 나가지 않는 모래사장에서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며 바다를 보는 것이었다.


손발을 맞추고 수평을 맞춰 원활하게 척척 들고 가는 것도 아니고, 그나마 비바람이 맹렬히 몰아쳐대 바다는 오래 보지도 못했다. 우산도 들어야 하고 사진도 찍고  사람은  생각이 일치하지 않고, 소리 없이 멀리 보이는 조그만 모습으로도  사람이 티격태격한다는  느낄  있다.  끝에 굳은 얼굴로 나란히 기차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아기 보리는 스노볼을 바라본다. 엄마가 흔들어준 스노볼을 보며 생긋 웃다가 아빠에게 그것을 내민다.



언젠가 스리랑카 바다에서, 나중에 누구 보여줘야겠다 생각하며 사부작사부작 사진과 영상을 몇 개 찍고 돌아섰던 적이 있다. 흐린 날 바다 아니라 맑은 날 청록빛 바다라도 혼자 보고 돌아서는 길은 조금 쓸쓸했다.


비록 당일에는 굳어진 입매와 편치 않은 침묵으로 기억되더라도, 언젠가 훗날 돌아보면 유모차를 들고 낑낑거리다 비바람에 휩쓸린 기억에 웃음 짓게 된다면. 참 좋다. 결국 함께 있다는 , 함께 산다는 것이 결혼 아닐까. 어쩌면 순적하고 매끄러운 삶은 유니콘처럼 환상에만 존재하는  같다.  우당탕쿵탕 굴러가는  삶이려니 받아들인다면, 초연하고 호젓하지는 못해도 스노볼처럼 작게 반짝이는 일상을 즐길 수는 있을 것이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 꼭 비극과 대치하지 않더라도 맞는 말 같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을 통해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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