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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Feb 03. 2022

기울어진 선을 찾아서

영화: 굿 보스 (2021,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


책에도 유행이 있다. 특히 신간 하나가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릴 때, 사방에서 "그 책 읽었어? 그거 재미있더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여기서 더하면 그 책 제목은 하나의 밈처럼 소비된다. <82년생 김지영>을 변용한 온갖 'OO년생 OOO'처럼.


언제부턴가 'OO의 기쁨과 슬픔'이란 말이 무진장 눈에 띄었다. 주변 회사원들의 추천을 많이 받아, 너무 궁금해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왔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차용한 제목이라지만, 소설 자체가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그 애매한 일의 현장을 생생하게 포착했디에 그 제목은 K-직장인들에게 찰떡 같이 달라붙었다.


영화 <굿 보스>를 보면 <일의 기쁨과 슬픔> 대신 '관리자의 기쁨과 슬픔'이란 말이 떠오른다. 영화의 중심에 놓인 인물은 저울 회사 사장인 블랑코인데, 우수 기업상 최종 심사를 기다리느라 한껏 예민해져 있다. 회사의 모든 요소가 심사위원들 눈에 딱 들도록 유지하기 위해 고심하며 판을 짜고, 설계하고, 공사를 뒤섞어 가며 직원들을 쥐락펴락하려 한다. 이건 그야말로 그 관리직의 기쁨과 슬픔에 관한 이야기다.



어떤 연기를 해도 그 자리에 30년쯤 존재해온 사람처럼 연기하는 하비에르 바르뎀은 여기서도 빤들빤들해진 중산층 사장의 얼굴을 소화해 낸다. (사장이 다 빤들빤들하다는 게 아니라,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그런 사장이라는 소리다.) 아버지가 창업한 공장을 물려받아 여태까지 운영해 왔으니 일에는 적당히 타성이 붙었고, 연설에 가까운 말 레퍼토리도 생겼다. 그는 "우리는 가족"이라는 반지르르한 말로 공과 사를 적당히 뒤섞는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이 영화는 마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느낌이다. 블랑코가 어떤 업주인지 때로는 직접 언급되고 때로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들을 보며, 노동법부터 관습법까지 각종 법과 윤리의 위반 여부를 짚어보게 된다. 왜 회사 직원이 휴일에 블랑코의 집에서 뭔가 수리하고 있는 것인지. 왜 퇴직하는 여성 직원이 울먹거리며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블랑코는 그에게 진정이라는 이름의 침묵을 종용하는지.




불안한 예감은 영화 속에 하나씩, 그러나 얼굴을 찌푸리기엔 너무 코웃음 칠 수밖에 없는 모양새로 펼쳐진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니까. 그렇게 심사위원이 방문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회사를 최적의 상태로 보이게끔 하고 싶어 하는 블랑코 앞에, '감점 요소'들이 나타난다.


부당 해고를 주장하며 회사로 찾아오다가 아예 회사 앞에 진을 치고 앉아버린 (그리고 어쩐지 점점 차림새나 마인드가 힙합에 가까워 가는...) 직원 호세, 아버지 대부터 공장과 연을 맺었고 어린 시절도 함께 보낸 사이지만 일 솜씨가 심각한 직원 미랄레스, 그리고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턴 릴리아나...


블랑코는 얽히고설킨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애쓴다. 호세를 회유하려고도 협박하려고도 해보고, 미랄레스를 따로 만나 식사하며 그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을 파악해 본다. 그러나 겉핥기 식 회유와 은근한 협박으로만 일 처리를 해온 그는, 여전히 미랄레스의 상황을 두루 살피거나 그의 진심을 알아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단편적으로 듣고, 아내에게 단편적으로 전하며, 단편적인 정보에서 아내가 끄집어낸 한마디 말을 낼름 받아들여 미랄레스의 사생활에 불쑥 뛰어든다.



블랑코는 직원들의 크고 작은 일에 개입한다. 그 과정에서 미랄레스와 호세, 릴리아나 외에도 다양한 직원들과 마주치고 엮인다. 사생활에 간섭하여 이용하는 모습이 가히 파렴치하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대우만 내놓는 사람은 아니다. 인간은 다면적이니까. 때로는 "우리는 가족"이라던 블랑코의 말을 상기시키며 도움을 요청하는 직원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굿 보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애매하게 좋은 사람이 더 나쁜 사람이다. 스스로가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상사라고 믿고 있겠지만, 블랑코는 사실 직원들을 저울 위의 물체처럼 취급하고 있다. 가족 같은 존재의 관심이라는 미명 하에 직원들의 삶을 이루는 요소를 공사 할 것 없이 적절히 파악하고, 그 조건들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판을 만들어 간다. 직원을 소중히 여긴다고 믿고 싶겠지만 그가 소중히 여긴 건 물체와 재산이지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설계는 본인만 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도 자기 의지를 갖고 움직이는 존재들이라는 것. 저울 위의 물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평형을 맞추는 일은 더욱 미묘하게 어려워져 간다는 것. 그 씨름 속에서 한 명의 건실했을 인간은 단지 말만 남은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


출근할 때마다 정문에 놓인 저울 조형물의 평형이 잘 맞는지 확인할 만큼, 블랑코는 공정과 노력처럼 보이는 것들을 입으로 강조한다. 기실 그가 집착하는 것은 평형이 아니라 평형처럼 보이는 상태다. 그게 진짜 평형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울어진 선이어도 직선처럼 보이면 그만이다.



<굿 보스>는 이따금씩 코웃음을 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블랙코미디 영화지만, 엔딩이 가까워 오면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영화에 켜켜이 쌓인 정서들이 너무 익숙해서다. 블랑코를 악덕 사장이라고 욕하고 돌아서기는 쉬워도, 그의 수완까지 부정하기는 어렵다. 블랑코를 제외한 다른 직원들 또한 순진무구하게 당하기만 하거나, 의연하게 노동 운동을 벌이는 인물들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일 해가며, 자기 욕망을 향해 움직이는 보통의 인간들이다.


그리고 직원들의 업무 공간보다 한 계단참 오른 곳에 붕 떠 있는 사무실에서 유리벽으로 그들을 내려다 보며, 블랑코는 자기가 설계한 판을 '그럴듯한' 명목으로 포장해 내놓는다. 삐뚤빼뚤한 선보다 기울어진 수직선이 더 교묘하게 평형인 척할 수 있다. 바른말 고운 말의 외피를 뒤집어쓸 때, 진심처럼 보이는 노력들이 섞일 때, 악은 최악이 된다.




저울 회사의 정문이 어쩐지 아우슈비츠 정문을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면... 너무 과도한 걸까? 그러나 "노동이 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 문장 또한 아름다운 단어의 외피를 뒤집어썼기에 더 최악이었던 문장이었으니 아주 다른 얘기만도 아니긴 하다. 더불어 이 영화가 스페인이 아닌 한국에서 제작됐다면 한층 더 매운맛이었으리라는 상상은 또 다른 씁쓸함으로 이어진다. 여러 모로 블랙코미디였다.



*시사회에 초대받아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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