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낸 골딘, 모든 아름다움과 유혈사태> 리뷰
PROGRAM NOTE.
<시티즌포>(2014)의 로라 포이트러스 감독의 최신작이자 2022년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인 이 다큐멘터리는 두 줄기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나는 세계적인 사진작가 낸 골딘의 지난 삶과 예술 작업에 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골딘이 오피오이드 진통제 옥시콘틴 중독에서 벗어난 뒤 이 약의 제약사 퍼듀와 그 배후에 있는 새클러 가문을 상대로 벌인 투쟁 과정이다. 영화는 골딘이 비극적인 가정사를 넘어 1960년대와 70년대 혁명적 시대와 결합하면서 예술가로 성공하는 과정을 그의 대표적인 슬라이드 쇼들을 덧붙여 보여준다. 또한 그가 ‘에이즈 시대’에 벌였던 격렬한 투쟁이 골딘 예술의 본질 중 하나임을 드러낸다. 결국 포이트러스 감독은 골딘이 옥시콘틴 피해자 단체인 P.A.I.N과 함께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대학을 돌면서 벌였던 시위 투쟁도 그의 또 다른 예술 작업이라는 사실을 알게 한다. (문석, 제24회 전주국제영화제)
POINT.
✔️ 예술가들의 예술가 낸 골딘. 사진작가 낸 골딘을 잘 몰라도, 자비에 돌란이나 왕가위가 언급했음을 들으면 궁금해지실 거예요
✔️ 내부자이자 당사자로서 기록한 예술 세계의 아름다움. 사진과 음악이 동시에 펼쳐지면서 '아 이래서 영화가 종합 예술이지' 하고 만족스러워지는 영화입니다 (그러므로 꼭 영화관에서 보셔야 좋아요!)
✔️ 예술가인 동시에 투쟁하는 사람이라고? 예술가가 예술하는 이야기만은 아닌 영화랍니다. 보고 나면 우리 삶에 대해서도 생각거리들이 많아지는 영화
✔️ 근데 일단, 예술과 투쟁과... 이런 걸 다 떠나서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다큐멘터리
✔️ 전세계 영화제와 시상식에서 52번 노미네이트되고 35관왕이 되었다는데...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이라는데... 이유가 있다!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터져나가는
사진작가 낸 골딘은 1970년대 미국의 "하위 문화"를 사진으로 담아 슬라이드쇼 형태로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선보이며 등장했다. 자신과 친구들의 세계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담아낸 그 세계는 트랜스젠더와 동성애자, 예술가, 마약과 섹스가 혼재되어 있었고, 세상으로부터 배제되었던(marginalized) 동시에 세상을 배제하는 당대의 아웃사이더들의 세상이었다.
카메라를 여자가 들다니, 심지어 이런 "타락과 방종"을 담아내다니, 미술계에서는 낸 골딘을 거부하기도 했지만, 내부자이자 당사자의 시선은 강력하다. 낸 골딘의 예술세계는 깃발을 하나씩 꽂듯 '개저씨'들에 밀리지 않고 '맞다이' 뜨면서 자신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낸 골딘의 사진 속 친구들은, 70-80년대 사진에서 각자의 재능과 상처로 날카로운 조각별처럼 반짝반짝 터져 나가던 그 빛은, 이내 90년대에 전혀 다른 빛 안에 담기게 된다.
에이즈. 후천적면역결핍증후군. 항레트로바이러스제요법이 알려지고 널리 퍼질 때까지 마치 "신의 저주"처럼 여겨졌던 그 질병 앞에 친구들은 말라 가고 스러지고 죽어간다. 세상은 그들의 "타락과 방종"의 결과라고 손가락질하지만, 낸 골딘의 눈빛은 그 앞에서 더욱 단호해져 간다. 단호한 눈으로 친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친구들의 예술을 전시로 구성한다. 여기에 던져지는 눈총에는 "이것은 매카시즘이자 예술가들을 블랙리스트하는 것"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손목수술 후 처방 받은 약이 마약성이었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래도 중독에서 금방 벗어날 수 있어 "운이 좋았다"는 낸 골딘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같은 고통을 겪고 회복된 사람들 혹은 같은 고통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 고통과 상처를 아는 사람들은 모여서 투쟁한다. 마약성 진통제를 아무렇게나 처방하여 사람들을 중독되게 하고 막대한 부를 쌓은 제약 회사와 그 오너 일가를 규탄한다. 영화는 낸 골딘의 삶을 선형적으로 담지 않으면서, 다른 축에서 이 투쟁을 담는다. 영화는 그렇게 명확히 보여준다. 삶과 투쟁이, 예술과 정치가, 그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이 모든 것들은 한 줄기에서 태피스트리처럼 뒤얽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것임을.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매끄럽고 티 없는 느낌으로만 아름다운 그런 것은 아니다. 매끄럽게 어떤 '규칙'을 따라 밟은 창작물에서 우리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엔터테인먼트라 부를 수 있고, 그것도 우리에게 필요하고 정말 좋은 것이지만, 예술은 다르다. 예술은 작가의 속을 파먹고 태어난다. 어딘가 거칠고, 피인지 땀인지 눈물인지 그 모든 것인지 모를 무언가가 축축하게 얽혀 있고, 스크래치가 나 있고, 툭툭 걸거치는 무언가가 이따금 박혀 있고, 그래서 내가 그 결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불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예술은 결코 당의(糖衣, sugarcoat)를 입을 수 없다. 존경스럽고 그들의 존재에 감사하게 되면서도, 그의 운명을 내가 지고 살고 싶은가 묻는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되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김애란의 소설에 매번 감탄하지만 그가 눅눅하게 표현한 슬픔의 농도를 내 마음에 지고 살고 싶지는 않다. <토지>를 비롯한 박경리 소설을 읽을 때마다 대문호의 높이를 느끼지만, 이 대문호가 대작을 쓰면서 느꼈을 마음 속의 소용돌이를 내 것으로 지고 살 자신은 없다. 오래 소설가 황정은 인터뷰에서 "문학 작품 주인공이라니, 그런 것이 되고 싶을 리가 있냐"고 응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낸 골딘의 작품 또한 내게 그렇다. 슈가코트를 걸치고 매끄러워질 수 없는, 툭 불거지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 정치적인 것들은 필연적으로 투쟁하며, 그 투쟁에는 절대 피상적인 구호가 끼어들 수 없다. 영화 속 제약회사와 오너 일가는 "기업 홍보 리스크"로만 이들의 싸움에 접근하지만, 낸 골딘과 단체의 목적은 "피해를 줄이는 것"이다. 싸움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언제나 어떻게든 삶의 본질에 가 닿는다. 심지어 작가 스스로 알든 알지 못하든. 70년대 친구들을 담던 낸 골딘의 사진에 담긴 예술성도, 오너 일가에 맞서 투쟁하는 순간의 예술성도 결국 같은 본질에 맞닿아 있듯이.
오명과 낙인에 맞서는 아름다움
이 영화에는 스티그마(stigma)라는 말이 많이 등장한다. 때로는 '오명'으로도, 때로는 '낙인'으로도 번역되는 이 단어는 우리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용어가 아니지만 자주 보이는 현상이다. 에이즈 환자라서, 성소수자라서, 여자라서, 고양이를 예뻐해서, 머리가 짧아서,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이라서... 각양각색의 이유들로 우리는 손쉽게 '낙인'을 찍고 그것으로 상대에 대한 평가를 끝내 버린다.
70-80년대 미국 "하위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분명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고 있었다. 섬광처럼 터져 나가는 젊음을, 마약이든 섹스든 예술이든 어떤 형태로든. 그러나 이는 타인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과는 다르다. 낸 골딘이 성매매에 대해서 "ugly"한 시절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 같다. 스스로의 몸을 도구화하는 것에 나는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싶지 않지만, 자신의 주장을 위해 타인의 삶과 몸을 도구화하는 시각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타락과 방종"의 결과로 죽어가는 너희를 다 죽이면 이 병이 사라질 것이라고, 이 병은 신의 저주라고 말하는 마음. 그 마음에 깃든 생각들은 과연 "타락과 방종"이 아닌가? 그 심보를 그냥 두는 것이야말로 신의 저주가 아닌가?
그 모든 오명과 낙인에 맞서 깃발을 꽂은, 어떤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다. 그래서일까, 낸 골딘이 참여한 시위들이 담긴 이 영화 속 장면들은 무척 아름답다.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목 놓아 외치는데 내가 여기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앉아 있어도 되나, 싶으면서도... 전단이 나부끼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는 순간 아름다워서 울컥하게 되고, 라임이 잘 들어맞는 투쟁의 구호에 감탄하고 있고, 체포되는 순간까지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 아름다움을 느낀다.
나는 왜 그들의 투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그 느낌 자체에 착잡해졌는가. 고민하다 보니 결국 그건 시민사회의 아름다움에 닿는다. 돌고 돌아 나에게까지 이어질 공공선에 대한 투쟁이더라도 (예를 들어 장애인 이동권이 보다 보장되는 사회는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며, 참사에 맞서 사회적 안전을 말하는 투쟁은 결국 우리 모두를 보호한다), 차가운 시선을 보내며 "정치적"이라는 (부정적으로 쓰이는) 비난을 던지는 사람들, 그들로 인해 더욱 그악스러워져야만 가까스로 기능하게 되는 한국의 투쟁들을 생각할 때, 그 아름다움 앞에 착잡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기에, 정치적인 것들 안에서 우리는 예술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어쩐지 이 영화 끝에서 나는 <아무튼, 데모>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이 투쟁기로 인해 중간중간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는 이 영화 속 장면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대화거리와 고민을 안겨준다.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따금 탐사 보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낸 골딘이라는 인물의 개인사를 선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드러내는 인물 다큐멘터리이면서, 슬라이드쇼 형태로 많이 '공연'되었던 그의 작업물을 넉넉하게 보여주는 종합 예술이기도 한 이 영화는, 아주 재미있는 작품인 동시에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인상을 남긴다.
시작부터 천명하고 시작한다. 삶을 이야기로 만들기는 쉽지만 삶은 그렇지 않다고. 그 말은 낸 골딘이라는 인물에게서 사진작가, 예술가의 아우라를 일견 걷어낸다. 그의 예술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담길 “고고한” 인물의 일대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그냥 단순명쾌하지도 깔끔하지도 않은 현실을 사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구성된 이야기가 낸 골딘의 전부일 수도 없음을.
또한 아예 내레이션을 맡을 만큼 감독이 적극적으로 등장하지도 않으며, 아예 카메라 뒤에만 존재하며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중간중간 아주 작은 순간에만 등장함으로 그 장면들을 주목하게 한다. 낸 골딘의 목소리도, 감독의 목소리도, 우리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이야기로 정리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이야기 뒤에 펼쳐진 삶을, 현실을 놓치지 않게 한다.
이 영화를 보고 나와, 수많은 주제로 가닥가닥 이어지는 생각거리들을 자분자분 펼쳐 보면서 생각한다. 영화에서 보여준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고민하고 논의하는 데에서만 감상이 끝날 수 없다고. 이 감상은 결국 삶으로 이어질 것이다. 살아있는 영화들은 이렇게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살아가게 한다.
*온라인 무비 매거진 씨네랩의 초청으로 시사회에 참석하여 감상 후 작성하였습니다. 영화는 5월 15일에 개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