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이정 Feb 09. 2016

때론 비밀이 더 매력적이기에

여명의 눈동자, 마타 하리


  스파이,  팜므파탈, 이국적인 미녀. 신비롭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모든 단어를 인생의 수식어로 삼은 이가 있었다. 마타 하리, 말레이 인도네시아어로 “여명의 눈동자”, “새벽의 눈동자”라는 뜻이라는 이름은 그 삶과 마찬가지로 거짓이었다. 그 이름은 사실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후대의 입에 부지런히 유르내리는 그 이름도 한때는 갓 태어난 예쁜 아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1876년의 이야기지만.


마타 하리의 아버지, 아담 젤러

  아직 마타 하리가 아니었던 그 아기의 이름은 마가레타 젤러. 모자 사업을 하는 아담 젤러의 딸이었다. 모자 없이는 사람을 만나지 않던 시대였으니 사업은 꽤나 안정적이었다. 아담 젤러는 그 직업만큼이나 무난하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딸의 응석을 잘 받아주는 아버지였다고 한다. 마가레타는 여유 있는 가정에서 구김살 없이 자란 아이가 으레 그러하듯 쾌활하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화려한 옷을 입고 학교에 가는 걸 좋아하고, 친구들에게 자기가 상상한 이야기를 들려주길 좋아하던 그 밝은 시절에서 굳이 특이한 점을 찾자면 마가레타의 외모였다. 흰 피부와 금발, 벽안이 일반적인 네덜란드에서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올리브색 피부는 확연히 눈에 튀었다. 오죽하면 이웃들이 “유대인? 인도네시아 계통? 아무튼 외국인 피가 섞였을 거야” 하고 수군댔을까. 그때까지는 이웃들도 마가레타 본인도 몰랐겠지만, 나중에 결국 이 외모가 그 삶을 지탱하게 되었다.


  마가레타가 13살이었을 때 잘 나가던 모자 사업이 파산했다. 집도 가구도 모두 팔아치우고 작고 허름한 집에서 살게 된 마가레타의 가족은 여태까지 몰랐던 가난을 빠르게 배우고 적응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몰락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담 젤러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암스테르담에 가서 자기 운을 시험해 보겠다고.


  본인은 운을 시험한다지만 독박 육아의 현장에 덜렁 남겨진 아내는 무슨 죄인가. 한때는 여유 있는 가정의 사모님이었던 젤러의 아내 안체는 일순간에 어려운 가정을 꾸리면서 4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양육까지 혼자 도맡게 되었다. 과로와 충격 때문이었는지 안체는 곧 죽고 말았다. 장례식을 위해 집으로 돌아온 아담 젤러는 아이들을 친척 집에 각각 맡겼다. 아직 16살이었던 마가레타는 대부 집으로 가게 되었는데, 환경과 무관하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키가 크고 늘씬했다고 한다.



  이때 마가레타는 대부의 조언으로 유치원 선생님이 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교사 양성 학교를 다니던 중 학교 소유주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가벼운 불장난이었는지 진중한 연애였는지 당사자들의 입장은 모르겠으나, 어쨌든 주변에서 보기엔 스캔들이었고 그래서 마가레타는 유치원 선생님이 될 수 없었다. 만약 이때 마가레타가 평범한 유치원 선생님이 되었다면 마타 하리라는 이름도 없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때의 마가레타는 진로도 막혀 버려 도저히 가난으로부터 도망칠 길이 없게 된 상황이었다. 결국 마가레타는 친척 집을 전전하는 힘든 삶의 돌파구로 결혼을 선택한다.



  마가레타는 신부를 구한다는 광고를 통해 네덜란드 장교의 아내가 되었다. 신부를 구하는 광고라니 우습지만 당시는 식민지가 있던 시대였으므로, 본국을 떠나 있던 남성들이 본국 여성과 결혼하기 위해서 내는 광고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이는 남의 일만은 아니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하와이나 미주로 떠났던 남성들이 광고를 내는 경우가 있었는데, 지금처럼 사진이 흔하거나 우편이 빠르던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사진만 붙들고 먼 길 떠난 배우자들 눈 앞에 사진과 너무 다른 세월의 결과가 있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서로 뜨거운 연애 끝에 스스로 결정한 결혼이라도 쉽지 않은데, 광고만 보고 시작한 결혼이 쉬울 리가 없었다. 많은 조선 여인들은 현실에 순응하여 어려운 삶을 꾸려 나가곤 했다는데, 마가레타는 도저히 그렇게 있을 수가 없었다. 결혼 생활은 결국 7년 만에 끝났다.



  애초에 마가레타의 남편이 결혼 생활에 충실한 사람도 아니었다. 식민지에서 허세를 부리는 군인의 이미지를 복제라도 해온 것처럼 전형적이고 빤한 인물의 삶이었다.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수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돌아다녔으며, 이 버릇은 아이가 태어나도 변화가 없었다. 이들의 결혼 생활은 아들 하나에 의지해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져 가고 있었기에, 아들이 죽고 시간이 흘렀을 때 파국을 맞았다는 게 가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이 끝났고 아들도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마가레타가 결혼 생활에서 얻은 게 하나 있었다. 남편이 일하던 식민지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였다. 자연히 마가레타도 인도네시아에서 살았고, “마타 하리”하는 이름뿐 아니라 이후로 마가레타가 대중에게 보인 모든 이국적 이미지도 이 시절의 경험을 밑그림 삼아 그려낸 것이었다.


"내가 네덜란드 시골에서 태어난 평범한 집 딸이라는 게 알려지면 내 명성은 하루 아침에 시궁창 신세가 되겠지."

  마가레타는 1902년 파리로 떠났다. 운을 시험하러 암스테르담으로 떠났던 그 아버지처럼, 이번에는 그 딸이 운을 시험하러 떠나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성공적이어서 이때부터 마타 하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사진에서 보이듯이 이 시절의 마가레타에게서 유럽 느낌은 별로 나지 않는다. 이국적인 외모를 한껏 돋보이게 하는 화려한 장식과 벗다시피 한 옷차림, 자바 춤이라고 이름 붙여 퍼뜨린 벨리댄스는 당시 식민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유럽 사람들 눈에 들었다. 정식 댄서의 길을 걷게 되었지만 사실 마타 하리가 추던 춤은 정통 벨리댄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스트립쇼에 가까울 만큼 관능적이었고 사람들의 호기심을 솔깃하게 할 만큼 타국의 냄새를 물씬 풍겼을 뿐이다. 오리엔탈리즘의 핵심에 부합하는 이미지를 스스로에게 덧씌웠달까.


  어렸을 때는 그냥 이웃들 입방아에 오르내릴 정도였던 동양적인 외모에 힘입어 마타 하리는 결국 혈통을 속인다. 자바 섬의 공주 출신이라는 둥, 사제 출신이라는 둥, 아버지가 귀족 출신의 네덜란드 장교였다는 둥, 신비감을 더할 요소들을 총동원한 언론 플레이를 현란하게 펼쳤다. 이 정도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만은.



  매혹적인 “동양 여인”에게 매력을 느낀 프랑스 사교계 고위층 인사들 중에는 마타 하리를 더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타 하리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춤을 추고 웃음을 팔았다. 다시 말하자면 고위층 인사들의 처소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1차 세계 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유럽에서 이 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독일 정보부에서는 프랑스군 정보를 빼내는데 마타 하리를 이용하려고 접근했다.



  어지러운 정계 분위기를 읽어내면서 춤을 추고 비위를 맞추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한 은행가와 내연 관계를 맺으면서 그 곁에 정착하고자 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끝끝내 마타 하리는 누군가의 곁에 정착하는 삶은 살지 못했다. 때마침 그 은행이 파산했기 때문이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더니 이 즈음부터 마타 하리가 갖고 있던 명성도, 그 삶도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마타 하리는 베를린으로 떠났다. 이때 마타 하리가 사귄 사람은 경찰이었는데, 스파이에 민감했던 영국 정보부도 그런 마타 하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독일이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별 소득 없이 파리로 돌아가려던 마타 하리는 뜻밖에 영국 정보부의 제지를 받았다.


  선전 포고 당시 베를린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영국에는 입국할 수 없다는 조치였다. 마타 하리는 프랑스를 위해 독일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에 입국했다고 한다. 사실 마타 하리는 이미 고위층에서 누리던 인기를 많이 잃은 상태였고, 제공할 만한 굵직한 정보도 그다지 없었지만- 사실상 이중 스파이 신세가 된 것이었다.



  전쟁이 터지면서 마타 하리는 일자리를 잃었다. 결국 네덜란드로 돌아가지만 영국 정보부는 여전히 마타 하리를 보고 있었다. 1915년 폴크스톤 항에서 마타 하리를 체포해 심문했고, 헤이그로 간다는 사실 외에 밝혀진 게 없었지만 이후로도 마타 하리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영국 정보부는 마타 하리가 독일 대사관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입수하고, 독일에서 임무를 받아 프랑스에서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프랑스 당국이 마타 하리를 체포했다. 1917년이었다.


"마타 하리가 빼낸 군사 기밀은 연합군 5만 명을 죽일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그 말과 함께 마타 하리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1917년 10월 15일 아침 사형이 집행되었고, 총성과 함께 “여명의 눈동자”는 닫혔다. 41살의 아직 젊은 나이였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연희를 다시 만난 땅새는 연희가  이중간첩이라는 걸 알고 네가 왜 그 일을 하냐며 안타까워한다. 중간에 있는 존재기 때문에 여차하면 어느 쪽에서든 가장 먼저 죽이는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중간첩은 신뢰받기 가장 어렵고, 팽 당하기는 가장 쉬운 존재다. 그 사람이 온전히 아군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몰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기록에도 남기 어렵다.


  마타 하리에 대한 기록도 그렇다. 마타 하리가 정확히 어느 편에 선 스파이였는지, 아니 애초에 스파이이긴 했는지조차 불확실하다. 한편으로는 마타 하리가 스파이 교육을 받았다는 말도 있고, 마타 하리가 독일군에 주요 군사 정보를 빼돌렸다고 자백했다는 주장에 근거가 없다는 말도 있다. 마타 하리의 삶 자체가 거짓과 불확실로 점철된 삶이었으며, 스파이 심지어 이중 스파이라는 일은 원래가 살아서도 자취를 남기지 않아야 하는 일이다 보니, 상반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말이 군데군데 남아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전쟁을 틈타 프랑스와 독일을 연결하고 있던 세기의 이중 스파이, 혹은 전쟁의 희생양. 마타 하리의 실체는 그 사이 어디쯤에 있거나 아니면 둘 다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과거지사가 된 지금, 흘러간 옛 이야기를 나누는 관조적인 입장에서 보면 수수께끼 같은 베일에 싸인 삶이기에 마타 하리답다는 생각도 든다. 만약 모든 사실이 낱낱이 알려져 있다면 지금 마타 하리라는 이름에 덧붙은 이미지- 치명적이고 신비로운 팜므파탈의 이미지는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때로는 거짓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사실이 더 매혹적이다. 마타 하리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 걸 몰랐기에, 인도나 인도네시아 어딘가에서 온 신비로운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유럽 사교계 인사들이 마타 하리에 더 열광했던 것처럼. 진상을 규명해야 하는 역사는 반드시 낱낱이 밝혀져야 하지만 더 시급하게 밝혀야 할 역사도 많은 지금의 우리라면, 마타 하리에 대해서는 그냥 이렇게 미지의 베일을 반쯤 걸친 채로 놓아두어도 괜찮을 것 같다. 때로는 비밀이 더 매혹적이다. 몰라도 되는 안전한 비밀이라면 더더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