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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31. 2016

흰색과 붉은색 뒤의 이야기

다른 빛을 투영하던 색의 역사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붉은색은 공포에 가까웠다. '빨갱이'라는 말은 한때 낙인이었다. 세월이 흘러 북한에 대한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고, 남북 관계도 많이 달라졌지만 그 말과 그 쨍한 빛깔만은 여전히 비수로 쓰일 때가 있음을 본다. 여기서 말하는 '빨간' 색은, <레미제라블> 속 술집에서 청년들이 눈을 빛내며 부르던 'Red!'와는 분명 다르다. 2002년 광장을 메우고 대한민국을 외치던 '붉은' 악마들과도 분명 다르다.


색깔은 아주 선명한 제 목소리를 내는 것 같지만, 그 뒤에 누가 서느냐에 따라 다른 빛을 투영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건지도 모르겠다.  그중에서도 흰색과 붉은색만큼 극단적인 방향성을 가진 색이 또 있을까. 순결의 상징인 동시에 유령의 색이기도 한 흰색, 매혹적인 열정을 암시하는 동시에 피와 위험도 묻어나는 붉은색.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의도로 이 색을 손에 쥐었을까.


백장미단(Die Weiße Rose)

지금은 뮌헨 대학 한쪽에 기념 조각으로 남아 있는 이들의 전단이 캠퍼스 곳곳에 뿌려지던 때가 있었다. 함부로 입을 놀리다간 목숨이 날아갈 수 있는 때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치거나 숨기도 했던 때였다. 그래야만 했던 때였다. 공공연히 안락사 정책이 발표되는 때였고, 안락이라는 조용한 단어 뒤에 학살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음을 읽기는 어렵지 않은 때였다. 안락사 정책을 비판하는 주교의 설교를 들은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가 주교의 허락을 받고 설교문을 전단으로 뿌리면서 '백장미단'은 시작되었다. 뮌헨 대학교 후버 교수와 채 열 명도 되지 않는 학생들의 작은 모임이었지만 그 영향은 지금까지 어마어마하다.


한스 숄, 조피 숄.


1943년 2월, 숄 남매가 여섯 번째로 전단을 뿌리던 날 학교 경비에게 발각되었다. 경비는 나치 당원이었고, 백장미단의 활동은 그렇게 끝났다. 두 번의 공판이 있었으며, 숄 남매와 프롭스트 세 사람이 첫 공판 결과로 사형당했다. 나머지는 모두 두 번째 공판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시대에 지지 않는 양심을 보인, 푸르고 꼿꼿한 죽음이었다. 책 제목 그대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의 죽음이었다.


그들이 '백장미단'이었던 이유는, 전단 상단에 '백장미'라는 단어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스 숄이 읽고 있던 소설이었고, 나중에 게슈타포에게 심문을 받을 때 한스와 조피가 댄 가명도 이 소설 등장인물 이름이었다고 한다.




의병장 곽재우


임진왜란은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조정은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흉흉한 일들이 날로 일어났다. 시간이 먼지를 조금 쌓아준 덕에 우리에게 실감이 덜 나서 그렇지 사실 위기도 그런 위기가 없었다.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대표적인 세력은 수군과 의병이다. 그중에서도 3대 의병장으로 손꼽는 인물 중에 곽재우가 있었다.


의병이라 하면 정규 군대가 아니라 우리 땅 우리나라 지키자고 벌떼 같이 일어난 세력이었기 때문에, 곽재우가 의령 땅에서 일어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벼슬길을 가지 않았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곽재우는 과거 문과에 (그것도 2등으로) 급제는 하였으나, 써낸 글에 선조의 눈에 거슬리는 글귀가 있어 벼슬길은 가지 못하고 고향인 의령 땅에서 지내고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북인 계열에 속했기 때문에 선조 눈에 거슬렸을 수도 있겠지만, 임진왜란 후의 생애를 고루 짚어 보아도 당색이 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견 다툼을 피하고 관직을 사양하는 등 마이웨이 성향과 비주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그런 곽재우도 임진왜란에서는 비켜서지 않았다. '천강홍의장군' 즉 하늘에서 내려와 붉은 옷을 입은 장군이라는 별칭을 깃발에 매달고, 그 깃발에 걸맞게 붉은 옷을 입고 활약을 펼쳤다. 왜군들에게도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였으며, 다양한 전술로 혁혁한 공을 세운 의병장이었다.


이후로도 많은 벼슬을 받지만, 벼슬과 원수라도 진 사람처럼 피해 다니기 바빴다. 오죽하면 마음대로 사퇴하고 벼슬에 부임하지 않는다고 유배까지 갔을 정도였다. 왕권 국가에서 신하가 피하면 얼마나 피할 수 있을까. 몇 번 벼슬을 역임하긴 하지만 나중에는 정말 고개를 저으며 은둔해 버렸다. 당시 이순신이나 김덕령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십분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지저분한 이익에 마음 두지 않고 자질구레한 아귀다툼에 끼지 않았으나 진짜 전쟁 앞에서는 영웅이 따로 없던 곽재우의 호탕함은 붉은 옷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있다. (믿고 보는 무적핑크 님의 웹툰 '조선왕조실톡'에서는 조선판 토니 스타크로 묘사된다. 창의력 대장이세요.)



가리발디와 붉은 셔츠단


나폴레옹이라는 사람의 거대한 발자국이 유럽을 스친 후 유럽 각 국가들은 마치 패치워크라도 하듯 주섬주섬 모여 '빈 회의'를 개최했다. 나폴레옹 이후로 자유와 민족에 대한 열망이 들끓기 시작한 유럽을 나폴레옹 이전으로 되돌리자는 결론을 내리고, 이탈리아 국경선을 어떻게든 되돌려 보려는 강대국들의 간섭이 아직 이탈리아가 아니었던 이탈리아를 후려쳤다. 그러나 한 번 뜯어진 조각을 아무리 패치워크로 잇고 이어 봤자 이전의 천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법이다. 자유와 민족이라는 가치에 눈을 뜬 유럽도 그랬다. 원래 나폴리, 도스 시칠리아, 사르데냐 등 여러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던 이탈리아 곳곳에서 통일 운동이 일어났다. 세계사 교과서에 주로 카르보나리당이라는 당명과 함께 마치니, 카보우르, 가리발디  등,으로 기술되어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


이 중 가리발디는 수도 나폴리 입성을 비롯해 굵직한 공을 여럿 세웠다.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의 공세가 어찌나 유명했던지, 도스 시칠리아의 경우 무혈 점령까지 했다. 당연히 가리발디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가리발디는 원래 이탈리아 통일 운동 전부터 아메리카 대륙의  혁명전쟁에서 이름을 날리던 사람답게, 유명세가 무색하리만큼 그 모든 공을 사르데냐 왕국에게 주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세력 다툼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목적에 충실한 행동이었다.



미나모토 요리토모


연말이 되면 시상식과 가요대상, 레드카펫 드레스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연예 기사를 장식한다. 비슷하게 일본에서도 연말이 되면 빼먹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NHK의 홍백가합전이다. 가수들이 홍(紅) 팀과 백(白) 팀으로 나뉘어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홍백 양팀으로 나뉘는 문화는 홍백가합전뿐 아니라 초등학교 운동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문화가  우리나라에 넘어와 청팀 백팀으로 변형되었다.) 그럼 대체 왜 홍팀과 백팀일까?


그 이유는 110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미나모토 가문(겐지)과 다이라 가문(헤이케)이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 다이라 가문이 승리하는 1159년의 이 일을 '헤이지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때 미나모토 집안이 거의 몰살을 당한다. 요리토모는 고작 14살의 나이로 아버지도 잃고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패권이 한 손에만 들어 있으면 그 손에 고인 물이 썩어가는 동시에 나머지의 불만이 쌓이기 마련이었고, 결국 각지에서 서서히 거병이 시작되었다. 요리토모도 1180년 황족 모치히토 왕에게 영지를 사사받으면서 마침내 거병할 힘을 갖춰 일어났다. 초반에는 패전해서 달아나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이내 썩어가던 고인 물 다이라 가문을 쓰러뜨리고 새로이 패권의 중심이 된다. 미나모토의 거점이었던 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막부가 형성되는데, 이게 바로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이다.


이 과정에서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의 문장이 각각 색깔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 홍백이 유래되었고 초등학교 운동회도 홍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백으로 많이 바뀌었다.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가장 긴 글이 남아 있는데 장미 전쟁이다. 영어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기나긴 여러 번의 전투를 묶어 말한다.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권력 다툼 끝에 튜더 왕조가 개창한다는 게 한 줄 요약인데, 사실 따지고 보면 다 같은 왕가 사람들끼리의 권력 다툼이다.


에드워드 3세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그중에서도 뛰어났던, 흑태자(Black Prince)라 불리던 에드워드 왕세자가 곧장 왕위를 계승했다면 일은 복잡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 년 전쟁에서 큰 활약을 보이며 강인한 왕이 될 거라는 기대감을 준 에드워드 왕세자는 뜻밖에도 1376년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에드워드 3세가 1377년에 죽었으니 아버지보다도 1년이 이른 죽음이었다. 왕위는 흑태자의 아들 리처드에게 갔다. 아들은 고작 10살이었다.

너무 어린 아이가 왕위에 오르면 당연히 그 왕위는 흔들거린다. 세조와 단종처럼 아이를 집어삼키는 경우도 있고, 아이가 자라 역으로 집어삼키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는 셋째 삼촌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곤트의 존(John of Gaunt, Duke of Lancaster)이 지휘권을 갖고 있었다. 흑태자의 아들,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된 리처드 2세는 1399년 랭커스터 공작 사후 그 영지를 몰수해 버렸다. 랭커스터 공작의 아들인 헨리가 영지 상속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리처드 2세가 나라를 잠시 비운 사이 헨리는 리처드 2세와 사이가 나빴던 의회의 승인을 받아 왕위를 찬탈한다. 이후 유폐당한 리처드 2세는 암살로 세상에서 사라진다. 랭커스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이 헨리가 바로 헨리 4세다.

하지만 헨리 4세의 왕관은 당시 왕위 계승 서열 앞에 떳떳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 3세에게 있던 네 명의 아들 중 큰아들 에드워드 흑태자가 사망했으니 왕위 계승권은 둘째 아들의 후손에게 가야 했다. 랭커스터 공작은 셋째 아들이었으므로 헨리 4세가 아니라 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의 후손, 즉 에드문드 백작에게 가야 했던 것이다. 혈통으로 왕권을 물려받는 나라에서 정당성 부족은 치명적 결함이지만, 실권자가 그를 커버하고도 남을 강력한 왕권을 쥐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정당성 부족이네 어쩌네 해도 헨리 4세는 에드문드 백작 측에서 오는 공격을 어떻게든 방어해냈고 1413년 그의 사후 왕위는 헨리 5세에게로 이어진다. 랭커스터 가문이 입지를 다진 셈이다. 헨리 5세도 많은 전투에 승리하면서 입지를 더욱 굳혔는데,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프랑스와 영국의 상속권을 모두 가진 아이가 되었다. 이 아이가 훗날의 헨리 6세.


그러나 여기서부터 일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에드문드 백작 입장에서는 마땅히 받아야 할 왕위 계승권인데 받지 못한 셈이었으므로. 에드문드 백작에게는 앤 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앤이 결혼한 상대는 에드워드 3세의 넷째 아들의 아들이었다. 즉 에드워드 3세를 기준으로 둘째 아들의 후손과 넷째 아들의 후손이 결혼한 셈이다. 즉 두 사람 사이에서 나온 아이는 모계로 보나 부계로 보나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는 말이 된다. 이 아이가 요크 공작 리처드, 바로 요크 가문이다.


이 복잡한 와중에 왕위를 갖고 있던, 심지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까지 갖고 있어 더욱 복잡했던 헨리 6세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생후 9개월이었을 때 아버지를 잃고 8살의 어린 나이에 대관식을 치러야 했던 상황도 안타깝긴 하지만,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에서 자기를 지킬 감각을 갖지 못한다는 건 다른 말로 하면 위험한 위치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무능력하다는 평뿐 아니라 신경 쇠약이나 정신 착란증이 있었다는 말도 있으니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을 것이다. 랭커스터 가문에게 이미 왕권을  도둑맞듯 빼앗긴 일이 있는 요크 가문 입장에서는 가만 두고 볼 일이 아니었다. 승승장구하던 백 년 전쟁도 실패로 끝나고, 헨리 6세의 이름은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듯했다.


결국 요크 공작 리처드가 전쟁을 일으켰다. 요크 공작 리처드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있었으므로 여기서부터는 세력 싸움이었다. 헨리 6세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그러나 1460년 요크 공작 리처드가 전사하면서 요크 가문도 휘청했다. 리처드의 아들 에드워드가 급하게 위기를 수습하고 에드워드 4세로 즉위했고 헨리 6세를 잡아 놓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요크 가문에게 충실했던 워릭 백작의 도움을 받고 있었는데, 갑자기 에드워드 4세와 워릭 백작의 사이가 틀어지고 워릭 백작이 랭커스터 가문 사람이 되면서 에드워드 4세는 또 한번 휘청한다. 헨리 6세가 다시 왕위에 오르고 에드워드 4세는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의  위기관리 능력은 헨리 6세와 비할 바 되지 못했다. 다시 힘을 길러 돌아온 에드워드 4세가 헨리 6세를 붙잡아 죽이고 워릭 백작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하면서  또다시 잠정적인 평화가 찾아온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 사후 왕위에 오른 에드워드 5세는 곧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기는데, 이 사람이 또 리처드 3세. 삼촌이 조카를 잡아 가두고 왕위를 찬탈했으며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도는데, 사육신 생육신은 못 나올 망정 지지도가 높을 리 없었다. 이때쯤 랭커스터 가문의 마지막 호프 헨리 튜더가 등장한다. 리처드 3세와 헨리 튜더 사이의 전투에서 리처드 3세가 패하고, 헨리 튜더는 왕위에 오르고 요크 가문 출신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튜더 왕조를 새로이 열게 된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 이상의 전쟁을 막은 훌륭한 왕으로 기록될 수 있음은 물론, 왕위를 위협하는 세력 걱정을 덜어내고 한층 강한 왕권을 휘두를 수도 있게 되니까.


헨리 7세. 손에 들린 꽃은 붉은색과 흰색이 섞여 있다.


이쯤 되면 잊힌 색깔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랭커스터 가문이 붉은 장미, 요크 가문이 흰 장미 문양을 사용했기 때문에 두 색을 섞어 가문의 문장을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문장이 오늘날까지도 요크셔 주, 랭커셔 주의 문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그림처럼 장미가 그려진 깃발을 나부끼며 전투했을 가능성은 적은데, 사실 따지고 보면 랭커스터나 요크나 같은 가문으로, 에드워드 3세 아래 4명의 아들에서부터 갈라져 나온 이들의 왕위 다툼이었기 때문이다. 어떻든 색깔이 다른 두 계파의 사람들이 무지막지하게 싸워 댄 기록이  오늘날 꽃 한 송이 뒤에 숨겨져 있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동서고금까지 따져볼 것도 없이 당장 나와 내 옆 사람만 해도 다른 이미지를 갖는 게 색깔이다. 하물며 오래 기억되고 기록되어 구비구비 흘러 내려오는 이런 이야기들에 공통적으로 이름을 남긴 색깔이라면, 그 뒤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유화처럼 덧발라져 있을지. 시간은 흐르고, 그에 따라 오늘도 이야기는 어디선가 한 겹씩 덧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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