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의 노래에 쏟아져 있던 영혼
몇 년 전 인셉션이 개봉하고 나서 한동안 사람들은 둘로 나뉘었다. 인셉션을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놀란을 찬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는 '아직 못 본' 상태였던 (아직도 그 상태지만) 어느 날 편의점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은사님과 동창 한 명과 음료수 하나씩 앞에 두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였다. 생각지도 않게 Non, je ne regrette rien을 듣게 된 건.
아직 인셉션을 보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나는 그 노래가 영화에 나왔다는 걸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어 전공으로 입학을 하고, 새 옷을 처음 입어볼 때처럼 어색하고 서먹하게 프랑스어와 인사를 나누면서 제일 먼저 찾아본 사람이 에디트 피아프였다. 모름지기 처음 친해질 때는 말 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니까, 하다못해 마이쮸 하나라도 있어야 좀 더 편하니까.
보통 문학으로 물꼬를 트는 편이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프랑스 소설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찾아볼 수 있는 건 고작 울면서 읽었던 어린 왕자와 어디서 대충 들어본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라는 이름뿐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2010년대에, 그것도 편의점에서 갑자기 에디트 피아프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사실 에디트 피아프는 생각보다 우리와 가까이에 있다.
에디트 피아프의 본명은 에디트 조반나 가시옹, 예명으로 쓴 '피아프'는 참새라는 뜻이다. 그래서 참새처럼 높게 재잘대는 목소리를 막연히 상상했다가 처음 피아프의 노래를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뭘 이렇게 다 토해 내듯이 불러. 목소리는 내 취향과 거리가 멀었지만 '사연 있어 보이는' 느낌이라 쉬이 잊히지 않았고, 결국 에디트 피아프가 궁금해졌다. 역시나 사연 있고 굴곡 있는 삶이었다.
에디트 피아프는 출생 그 순간부터 부모님의 사랑이란 걸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다. 150도 되지 않는 작은 키의 서커스단 곡예사였던 아버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사탕을 팔던 어머니가 만나 서로의 반짝임을 알아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아버지는 술과 여자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고작 열여섯에 아버지를 만났을 뿐 전혀 결혼이나 육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1차 세계 대전 때 연합군 포로의 탈출을 돕고 독일군 손에 죽은 간호사의 이름을 따서 '에디트'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지만, 아버지가 준 건 그게 다였다. 생후 2개월짜리 에디트와 어린 아내를 두고 훌쩍 입대를 해버렸다. 나약했던 어머니는 마찬가지로 나약한 아기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고, 짧고 불행했던 결혼 생활의 절망이 무너지듯 덮쳐와 어머니를 잠식했다. 결국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사라졌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에디트 피아프의 유년기를 들여다보면 방향이 다른 이야기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에디트가 빈민촌 길바닥의 가로등 아래서 태어났다고도 하고, 어머니가 사라진 게 아니라 자살했다고도 한다. 인터넷 사이트나 다양한 책조차도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는 사실 에디트 본인의 영향도 큰 부분인데, 당시 언론들이 시대를 풍미한 이 여가수의 과거를 이 잡듯 뒤질 때 에디트 본인이 이리저리 뒤섞인 이야기를 많이 한 듯하다. 사랑받지 못한 어린 시절이 남들 손에 뒤엉켜 끄집어내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
아무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에디트가 아직 엄마라는 단어를 말하기도 전에 에디트의 삶에 엄마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있으되 없는 존재였다. 결국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사창가에서 부엌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에디트는 그곳에 있는 여자들의 애정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냉혹하게 내쳐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엄마와 아빠라는 보호자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엄마처럼 여기는 여자들이 손님으로 오는 남자들에게 굴종하는 모습만 보면서 자랐기 때문이다. 이는 에디트의 연애관으로 직결되었다.
그러나 그 생활도 오래가지 않았다. 곧 에디트는 아버지 손을 잡고 곳곳을 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아버지의 쇼를 도와야 했다. 아버지의 주폭과 여성 편력을 적나라하게 보아야 했던 그 시기가 에디트에게 행복했을 리 없다. 때마침 에디트의 노래를 눈여겨본 루이 르플레라는 사람이 자기 클럽에서 주급을 받으며 노래를 해 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에디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괴로웠던 어린 시절을 박차고 나온다. 키가 142cm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 착안, '자그만 참새 la Môme Piaf'라는 애칭도 이때 붙었다. 조금씩 샹송 가수로 이름을 날리며, '장밋빛 인생'으로 들어서려는 듯 보이지만 이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루이 르플레가 갑작스럽게 살해당하면서 모든 것이 송두리째 엎어졌다. 관계자였던 에디트 또한 용의 선상에 올라 한동안 경찰서에 묶여 지냈다. 진범이 잡히면서 곧 다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에디트를 처음 발탁해 세상에 내놓아 준 따뜻한 시선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래도 주변에서 에디트의 노래를 아끼던 사람들이 에디트를 토닥이며 일으킨 덕에 재기할 수 있었다. 그중에는 작곡가 레이몽 아소도 있었는데, 그가 쓴 노래 '나의 외인부대 병사'를 부르면서 에디트 피아프라는 이름은 단숨에 프랑스 국민 가수 반열에 오르게 되었고 그 이름은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빛나고 있다.
에디트의 인생에서 큰 축을 이루는 두 수레바퀴를 꼽자면 단연 노래, 그리고 연애다.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본 경험이 거의 없어서인지, 에디트는 연애를 굉장히 중요시했고 또 많이 했으며 자기를 휘두르는 남자들 손 아래 자신을 두었다. 같은 계통의 일을 하는 작곡가나 가수 지망생 등도 많이 만났고 그중에는 에디트에게 손찌검을 하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에디트는 오히려 그럴수록 더 그 연애에 목을 맸다.
이브 몽탕도 그중 하나였다. 아직 신인이었던 이브 몽탕을 사랑하면서 그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 준 건 국민 가수 에디트 피아프였다. 지금은 여러 번 리메이크되면서 에디트 피아프 본인보다 더 유명해진 '장밋빛 인생'도 이브 몽탕과 연애하면서 이브를 위해 쓴 가사였다. 물론 다른 애인들과의 관계가 그랬듯 두 사람의 사랑도 곧 파경을 맞았다. 오히려 이브가 뜨면서 에디트를 출세의 걸림돌처럼 여겼다고 한다.
물론 이브가 배은망덕 그 자체지만 이브만을 탓할 수는 없다. 안정적으로 애착을 형성하지 못한 에디트 안의 갓난아기가 울 때, 아버지의 강인하고 따스한 품만을 끝없이 요구할 때 상대로서도 쉽지는 않았을 테니까. 실제로 한때 에디트의 연인이었던 한 사이클 선수는 에디트와 며칠 함께 지내는 일이 투르 드 프랑스만큼이나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덧없이 흘러가는 수많은 관계의 조각 중 가장 빛나는 조각, 에디트 피아프의 모든 불안해 보이는 연애 중 가장 탄탄한 사람이 나타났다. 에디트가 '평생 만난 수많은 사람 중 진실하게 사랑한 건 오직 한 사람'이라고 말했던, 마르셀 세르당이었다. 당시 마르셀 세르당도 잘 생긴 권투 선수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1948년 챔피언까지 되면서 두 사람에겐 일도 연애도 승승장구하는 행복한 날들이 이어졌다.
모든 사랑이 다 그렇듯 연애의 절정은 누가 보아도 그저 곱다. 오랜 세월 함께 한 단단함이나 푸근한 편안함은 아니어도, 수많은 소네트를 낳을 만큼 들뜨고 설레는 시간이니까. 두 사람이 애틋하게 주고받은 편지들은 책으로 묶여 나왔고,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보다 더 많이 팔리는 책'이라는 (거짓말 같은) 책날개를 달고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었다. (그리고 절판되었다...)
두 사람의 이 시기가 유달리 곱다고 느껴지는 건, 그 많았던 연인 중 마르셀 세르당과의 편지만 책으로 묶어 낸 이유는, 두 사람이 끝을 맺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장 반짝이던 순간은 너무 갑작스럽게 추락해 버렸다.
1949년이었고 마르셀은 베르사유에, 에디트는 뉴욕에 있을 때였다. 편지에 사랑을 가득 담아 보내고 있었지만, 편지에는 보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말이 날로 늘어 갔다. 결국 자기를 얼른 보러 오라고 조르는 에디트의 말에 마르셀은 예정보다 일찍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도착은 하지 못했다.
비행기 사고로 마르셀은 세상을 떠났고, 에디트는 식음을 전폐한 채 방에 틀어박혔다. 그러나 견딜 수 없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에도 노래는 멈출 수 없었다. 마르셀을 잃고 쓴 가사가 그 유명한 '사랑의 찬가'이다. 원래 에디트의 목소리 자체가, 우리로 치면 한의 정서에 가까운 깊고 진득한 감정이 묻어나는 목소리긴 하지만 이 곡은 유난히 서글프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김우진과 몸을 던지기 전 마지막으로 녹음했던 '死의 찬미'를 들을 때 느껴지는 비장미가 이 곡에도 있다.
물론 마르셀이 죽었다고 해도 에디트는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고, 살아가야 했다. 술과 모르핀에 의지했지만 감정은 채워지지도 정돈되지도 않았다. 에디트는 샹송 가수였던 자크 필스와 결혼하기로 했다. 외로움과 상실감을 덮을 수 있는,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혹시 에디트가 그런 기대를 했다면 그 기대는 곧 부서졌을 것이다. 두 사람은 5년의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 뒤로 에디트 피아프의 불안불안했던 인생은 가속도가 붙은 채로 휙휙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약과 술, 그리고 인한 발작, 치료, 입원, 자살 미수, 교통사고... 불행 종합 세트가 아닐까 싶은 일들 속에서 에디트 피아프의 삶은 송두리째 휘청거렸다. 그 삶에서 흔들리지 않는 딱 하나는 노래였다. 노래할 때만 에디트는 에디트일 수 있었다.
노래는 생명이고 사랑, 본인이 그렇게 얘기했던 것처럼 계속해서 노래를 놓지 않았고 실제로 음반도 잘 팔렸다. 몸 상태 때문에 노래를 그만두라는 권고를 의사에게 받기도 했지만 에디트는 노래를 그만두지 않았다. 그만둘 수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불행에 깊이 박혀 있던 에디트의 삶에 그나마 햇살이 좀 든다. 햇살의 이름은 테오 사라포, 이제 고작 스물일곱 청년이었다. 40대 중후반, 그것도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해서인지 늘 과중한 짐 아래 있는 것처럼 보였던 에디트 피아프와 결혼하기에는 파격적으로 어린 나이긴 했다. 당연히 돈이나 명예 때문에 결혼한 거 아닌가 하는 의혹의 시선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두 사람은 물처럼 담담하고 조용한 관계를 이어 갔다.
에디트는 건강도 최악이었고 계속되는 마약과 술, 그 치료 때문에 빚도 있었지만 테오는 끝까지 에디트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 에디트라는 여자를 깊이 사랑했을지, 노래를 쏟아내던 에디트 피아프에 대한 동경이었을지 제삼자로서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멋진 사람이다. 에디트의 삶을 미온수처럼 감싼 테오가 있어 그나마 에디트 피아프의 말년이 평온했다.
엄청난 명성, 그럼에도 비극의 한 가운데를 살아냈던 삶. 당연히 재조명되지 않을 수 없었다. '믿고 보는' 배우 마리옹 꼬띠야르가 주연을 맡은 영화 '라 비앙 로즈'로 에디트 피아프의 삶은 우리 앞에 다시 한 번 펼쳐진다. 영화가 서사적으로 가지 않고 미래와 과거를 교차해 보여주는데, 조용하고 쓸쓸한 말년 흔들의자에 앉아있는 모습과 불우했던 어린 시절 국가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는 상기된 볼, 한창 잘 나갈 때 시끄러운 곳에서 키득거리는 눈웃음을 교차해서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해, 결코 한 방향으로만 흘러가지 않는 그 거세고 도도한 물결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마리옹 꼬띠야르는 원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에디트 피아프의 얼굴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배우 한 명만으로도 이미 볼 만한 영화 그 이상이다. 이 영화로 마리옹 꼬띠야르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는데, 정말이지 고개 끄덕이며 박수를 칠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진짜 에디트 피아프는 1963년 테오가 보는 앞에서 숨을 거뒀다. 최고의 샹송 가수라는 수식어를 단 채, 마르셀이 있는 하늘로. 테오는 나중에 죽고 나서 에디트 곁에 묻혔다고 하니 순애보도 이런 순애보가 없다. 인생의 첫 순간부터 사랑받지 못해 허덕이던 에디트였으니, 그런 에디트에게 마르셀처럼 진실되고 뜨거운 사랑도 테오처럼 깊고 단단한 사랑도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사랑 없는 노래도, 노래 없는 사랑도 없다는 에디트 말마따나 에디트 삶의 모든 사랑은 노래가 되었다. 사랑의 결핍조차도, 그 상처조차도 노래에 쏠려 나왔다. 어쩌면 에디트 피아프의 이름이 샹송에서 지워질 수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노래를 타고 한 아이의 눈물, 한 여자의 웃음, 한 노파의 한숨이 고스란히 담겨 흘러오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