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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18. 2016

'그 녀석', 저항의 얼굴이 되다

사실 그 녀석은 어디에나 있다

  영어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you guys'라는 표현을 처음 듣고 초등학생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나는 여잔데요? guy라는 말에 남녀 구분 없이 사용하는 뜻이 있다는 걸 안 건 그보다 좀 지나서였다. 그 후로 'you guys'가 익숙해질 때까지 그 말을 들을 때면 늘 애매한 기분이었다. 그럼 대체 왜, guy라는 말을 남자라는 뜻으로도 썼던 건데? 애먼 불만을 작게 구시렁거리긴 했지만, 자기네 말을 자기들이 그렇게 쓰겠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해서 별로 궁금해하진 않았다. 그러나 늘 그렇듯 궁금해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날이 온다. 가이 포크스를 알게 된 것도 그런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채 영화를 한 편 본, 어느 날이었다.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온 브이 가면. 영화는 나탈리 포트만의 목소리로 시 한 편을 읊어 주며 시작한다.


Remember, remember!        
The fifth of November,        
The Gunpowder treason and plot;     
I know of no reason        
Why the Gunpowder treason
Should ever be forgot!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 5일, 화약 음모 사건이 있던 그 날을! 그 날이 잊혀야 할 이유 따위는 없다!"


  영화는 파시즘에 권력을 장악당한 가상의 2030년 영국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히틀러를 모델로 했음이 빤히 보이는 '아담 서틀러'라는 인물을 필두로 한 파시스트 당이 집권하고, 시민들은 모두 그 억압적인 분위기 아래 끽 소리 못하고 불안한 눈빛만  주고받는다. 동성애자, 무슬림, 아나키스트 등 '정상'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잡혀가고 끌려갔으며, 곳곳에서 생체 실험이니 독극물 유출이니 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진다.


  괴담이었으면 했던 일이 현실이 될 때 사람은 어떤 반응을 하는가. 주인공 이비의 부모님은 저항하는 쪽이었다. 아들을 잃고 '정치적'이 되어 버린 이비의 부모님이 세상에서 삭제된 이후, 이비는 조용히 살고 있다. 그러다가 통금 시간을 어긴 어느 날- 브이를 만나게 된다.


  온통 V로 시작되는 현란한 어휘를 치렁치렁 연결해 자기를 소개한 브이는, 그 날 밤 이비에게 자기가 폭파한 현장을 예술적인 BGM까지 깔아 보여준다. 브이의 행적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으니, 방송국을 점거해 자신이 준비한 영상을 내보낸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된다"는 자막으로 인터넷에 자주 돌아다니는 캡쳐는 이 장면이다.)


  그리고 브이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동서고금의 다양한 실존 인물들을 연상케 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상대로 한, 브이 포 벤데타(피의 복수)가. 물론 그 '실존 인물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아담 서틀러'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연상하기 어렵지 않듯, 쉬이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딱 한 명만은 역사 인물이 곧이 곧대로 등장하니, 영화의 도입부를 장식하는 오늘의 '그 녀석' 가이 포크스(Guy Fawkes)다. 브이가 절대 벗지 않는 저 가면도 가이 포크스를 상징한다.


영화 초반 이비가 시를 읊을 때 보여주는 그 녀석, 'Guy'의 얼굴.

  역사 속의 인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기억 속에 어떤 이미지로 남는다. 가이 포크스는 흔히 다부지고 당당한 사내로 묘사된다. 그건 그가 계획한, 그리고 끝내 이루지 못한 일이 가히 혁명적이고 스케일이 컸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런 그도 한때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요크 지방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평탄하게 살았던 그지만, 8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재혼한 남자가 가톨릭이었던 것에서부터 조금씩, 아주아주 조금씩 평범과 멀어지기 시작한다.


  유럽에서 가톨릭을 믿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지만, 당시 영국에서 종교란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다. 이는 종교 자체보다 정치적 상황과 연관이 깊었다. 종교 문제는 정치 문제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마련이니까. 신교와 구교의 싸움뿐이 아니었다.


  당시 상황을 조금 짚어보자. 헨리 8세가 "국왕이 교회의 수장이다"라는 수장령을 선포하면서 성공회가 가톨릭에서 분리된다. 헨리 8세가 애첩 앤 불린과 결혼하려면 우선 이혼을 해야 했는데 로마 가톨릭이 이혼을 금했으므로 그 때문에 겸사겸사 성공회가 분리되었다는 게 흔히 알려진 이유다. 그러나 헨리 8세가 바보는 아니었으니 당연히 그 뒤에 정치적 이유도 있다. 애초에 유럽에서 교황과 왕 사이의 권력 다툼은 헨리 8세 만의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흘러 가이 포크스가 살던 당시에는 메리 스튜어트의 아들이 제임스 1세가 되어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 제임스 1세는 종교적으로 더 단호한 입장이었다. 헨리 8세 이후로 성공회가 영국 국교회가 되었지만 가톨릭은 여전히 꿋꿋하게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제임스 1세로서는 강력한 정책이 필요했던 것 같다. 탄압을 하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국교회를 개혁하고 가톨릭은 물론 청교도까지 견제하겠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다. 앞뒤 똑 떼고 제임스 1세만 보면 그의 종교 개혁은 무리하지 않는 선이었다고 보는 입장이 많으며, 오늘날까지 많이 쓰는 영어 성경 킹 제임스 버전(KJV)도 그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건 후대의 평가일 뿐, 당대를 살던 가톨릭들에게 제임스 1세의 방향성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방식이었다. 뚝심 있고 다부진 사내였던 가이 포크스가 침묵하고 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는 이미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 참여한 전적도 있었다. 유럽 국가들이 속속 얽혀 있는 복잡한 전쟁이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큼직하게 보면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을 지원하는 입장을 고수하는 편이었다. 그 백성인 가이 포크스는 반대로 스페인의 가톨릭들 편에 서서 네덜란드 신교도들과 싸웠다. 그러는 동안은 이름도 대륙 버전으로 바뀌어 '귀도 포크스'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졌다. 왕가의 체제에 순응하기보다는 종교적 열심이 앞선 사람이었고, 막연히 상상해 보기에는 여왕의 입장보다는 제 신념을 따르는 뜨거운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뜨거운 사람을 주변에서라고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가톨릭 지원을 위해 스페인 왕가 문까지 두드리고 있던 가이 포크스를 찾아온 사람은 토마스 윈투어였다. 가이 포크스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온 윈투어는 이내 로버트 케이츠비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 케이츠비는 제임스 1세를 암살하고 엘리자베스 공주를 왕위에 올려 가톨릭 중심의 왕가로 재편할 생각이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들이 비밀리에 이 모임을 시작한 건 1604년이었다.


해당 사건 관련자들. 맨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토마스 윈투어, 로버트 케이츠비, 귀도 포크스(가이 포크스)라는 이름이 보인다.


  1604년 그들 중 토마스 퍼시는 왕의 의상을 담당하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의심받을 일이 적은 안정적 위치에 있었던 그가 상원 의원 근처의 집을 빌리고, 가이 포크스는 그 집 관리인이자 퍼시의 하인으로 위장 취업을 해서 '존 존슨'이라는 튀지 않는 필명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후 토마스 윈투어의 자백을 빌자면, 그때 그들이 한 '활동'은 그 집 아래로 터널을 파서 상원 의원 지하로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윈투어의 자백이라는 부분이 날조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런 터널이 발견되었다는 증거도 없고 그런 시도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심문을 받은 가이 포크스는 터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터널을 팔 계획이었든 아니었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해 12월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터널을 파고 있었던가 할 때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자세히 알아보니 옆에서 지하실을 청소하는 소리였다. 상원 의원과 바로 붙어 있는 건물의 지하실을 세 놓을 생각으로,  집주인인 과부가 지하실을 청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부 소유의 건물, 지하실을 쓰면 얼마나 썼을까. 사람들이 신경도 쓰지 않는 그 건물은 몰래 음모를 꾸미기 안성맞춤이었다. 그들은 그 지하실을 세 내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가이 포크스가 이 일에 지원을 받기 위해 해외까지도 돌아다녔다고 하니, 이 일이 잊힐 이유는 없다고 말하는 시도 이해가 간다. 쉬이 잊힐 만큼 작은 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가이 포크스는 특유의 뜨거움과 오랜 전투 경력으로 실전에 능한 사람이었다. 일은 속속 진행되었고, 지하실에는 엄청난 약의 화약이 쌓이기 시작했다. 폭약고를 지키고 있다가 불을 붙이는 일이 가이 포크스의 몫이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사건의 전말을 소상하게 적은 익명의 투서가 날아든 것이다. 음모를 꾸민 사람 중에서는 가톨릭계 의원들까지 죽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10월 26일 상원 의원이었던 몬트이글(MontEagle) 경이 받은 편지에는 "상원 의원을 다 날려 버릴 동안 경께서는 안전을 위해 댁에 계십시오(retyre youre self into yowre contee whence yow maye expect the event in safti  for... they shall receyve a terrible blowe this parleament)"라는 경고가 적혀 있었다. 몬트이글 경의 하인을 통해 편지에 대해 알게 된 포크스 일행은 당황했지만, 그냥 장난 편지처럼 치부될 듯하니 그냥 일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10월 30일 포크스가 지하실 상황을 점검하고 일행에게 보고할 때도  문제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몬트이글 경은 편지를 잊어 넘긴 게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그는 제임스 1세에게 이 편지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임스 1세는 니벳(Knyvet) 경에게 이 일에 대해 조사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니벳 경이 지하실을 급습한 게 바로 그, 11월 5일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4일이 끝나고 5일이 시작되는,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이었다. 4일 밤에 와서 지하실을 둘러보고 지키고 있던 가이 포크스가 조심스레 빠져나가려다가 체포된 것도 그때였다. 화약이 발견되었고, 처음에는 자기 이름을 존 존슨이라 댔던 가이 포크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가이 포크스, 36세, 요크셔 출신의 가톨릭 신자, 아버지 이름은 토마스이고 어머니 이름은 에디트. 심문에서 차곡차곡 흘러나왔다. 저렇게 많은 화약을 가지고 뭘 하려고 했냐는 질문에 그는 "너희 스코틀랜드 거지들을 본향으로 돌려보내 주려고"라고 강단있게 답했지만, 이어지면서 강도를 더해가는 고문 끝에 결국 공모자들의 이름도 밝혀졌다.


  가이 포크스는 곧  런던탑에 수감되었고, 제임스 1세는 가이 포크스에게 질문해야 할 것들의 목록까지 직접 주었다. "언제 어디서 프랑스어를 배웠는가?", "그는 어떻게 가톨릭으로 성장했는가?" 같은 별거 아닌 질문들이었지만 그 질문을 받는 가이 포크스에게는 영겁 같은 시간, 지옥 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가이 포크스는 이미 고문으로 몸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형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숨을 거두었다. 스스로 교수대에서 뛰어 내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끝까지 극적이다.

  당시로서는 사건 자체가 큰 반향을 미치지 못했고, 사실은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가톨릭을 싹 다 잡아 죽인다든지 하는 탄압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정당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당시 분위기상 그랬다는 거다.) 제임스 1세의 종교 정책이 후대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사건을 그냥 이 사건으로만 종결했다. 오히려 청교도들이 이 일을 계기로 가톨릭과 더 척을 졌고, 그래서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떠나는 데 일조한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일의 방향이란 게 참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더 알 수 없는 건 그 이후로 11월 5일이 기록적인 날이 되었으며, 가이 포크스라는 이름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영어의 'guy'라는 단어도 그의 이름에서 왔으며, 처음 의미에서 점점 확장되어 이제는 남녀 불문 '너희들'이라고 쓸 수 있는 보편적 단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가이 포크스 자체는 그 이후 혁명이나 반항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 되었다. 11월 5일 밤은 '가이 포크스의 밤'이다. 가이 포크스를 상징하는 인형을 갖고 다니다가 밤에 모여 불에 태우고, <브이 포 벤데타>로 더욱 알려진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행진을 한다. 이 행사의 초반에는 동상이몽이란 말이 딱 제격이었는데, 가이 포크스를 조롱하는 의미로 가면을 쓰는 사람도 있고 같은 가면 뒤에서 가이 포크스를 애도하고  꿈꾸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주로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영화가  한몫하기도 했지만.


  그 후로 우리는 또 한번 이 가면을 곳곳에서 보게 된다. 이번에는 어나니머스(Anonymous)였다. 아나키스트 해커 집단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는 곳곳에서 다양한 사이버 공격을 하며 뜨거운 감자로 급부상하여 '얘들은 뭐지?' 하는 시선을 받게 되었다. 위키리크스를 지지하고 위키리크스 기부를 막은 사이트에 디도스 공격을 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는데, 중동의 시민운동을 지지한다든지 북한에게 경고를 날린다든지, 동성애 혐오나 소아성애를 반대한다든지, 사이언톨로지를 반대한다든지, 하여튼 딱 어느 한 분야라고 말할 수 없는 다양한 분야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에는 다에시(IS)와 사이버 대전을 선포하면서 또 얼굴을 알렸다. 그런데 이름처럼 익명성을 철저히 내세우는 이들이기에 동영상을 제작할 때는 가면 사용이 불가피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것도 가이 포크스 가면이다.


그렇게 가이 포크스는 또 다시 재조명을 받게 된다.
드라마 셜록에서도 가이 포크스의 화약 폭발이 재구성되어 사용되었다. 심지어 존이 납치되어 가이 포크스의 밤에 쓰는 모닥불 안에 놓이기까지 했다.


  가이 포크스, 호기롭고 당찬 모습이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가이 포크스의 암살 계획 자체가 이토록 오래 회자되는 이유는, 그 의도가 고상하다든지 모두에게 공감이 가는 대단한 운동이어서라고만 평가할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파격적인 암살 방법이나 실패로 끝난 점까지도 매우 극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인 듯하다. 눈에 잡힐 듯 생생하고 강렬한 색깔을 가졌기 때문에 여기저기 입맛에 맞게 소비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드라마 <셜록>에서도 재구성되었는데, 이 경우에는 <브이 포 벤데타>와는 달리 화약 폭발이라는 소재와 '가이 포크스 데이'라는 날만 도구로서 차용했을 뿐 그 이상의 메시지는 들어있지 않다.


  가이 포크스, 어느덧 저항과 아나키즘의 상징이 되어 버린-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게, 어떤 사람에게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그 가면은 세월을 덧입어 원래 인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뒤집어썼다. 가이는 어디에나 있다. 쉽게 사용하는 영어 문장 속에도, 재미있게 지켜보던 드라마 안에도, 숨 죽여 본 영화에도, 뉴스에도,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도. 가면이 어떤 의미로 와 닿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는 어디에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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