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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Jan 11. 2016

진실은 묻히지 않는다

시대의 등불로 파헤쳐낸 사실은 진실이 된다

  프랑스에 한 군인이 있었다. 알자스 지방의 한 방직 공장을 경영하는 집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애국심이 투철하긴 하지만 딱히 뛰어난 데도 모난 데도 없는 사람이었다. 31살 때 육군 대위가 되었고, 마찬가지로 착하고 평범한 여자와 결혼했다. 그는 아마 쭉 그렇게 성실한 군인으로, 평범하지만 훌륭한 우리 주변의 인간 군상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갑자기 그의 삶에 들이닥친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아내 루시에게 쓴 편지. 그의 삶을 뒤엎은 일은 필체에서 시작되었다.

  1894년 9월 어느 날, 프랑스 육군 참모 본부는 편지 한 장 때문에 발칵 뒤집어진다. 그 편지에 프랑스 육군 기밀이 담겨 있는, 누가 보아도 스파이가 쓴 편지였기 때문이다. 군 기관에 스파이란 치명적이다. 빨리 잡아야 하고, 정확하게 그 사람을 잡아야 한다. 참모 본부는 '기를 쓰고' 스파이를 찾아냈다. 그리고 조사 끝에 잡힌 사람은 성실하게 제 임무를 다하고 있던 청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였다.


  참모 본부는 드레퓌스의 필적이 문제의 편지에 적힌 필적과 일치한다고 했다. 그리고 편지 끝에  D.라는 이니셜 서명이 되어 있었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물론 심증으로는 일리가 있다. 필적은 고유한 개인을 알아볼 수 있는 주요한 특징이고, 서명은 그 심증에 확신을 더해 주었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스파이라면 내 이니셜을 편지에 쓰지는 않을 것 같다. 미리 암호명 정도는 만들어 뒀겠지. 그리고 필적은 비슷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므로, 드레퓌스를 용의 선상에 올릴 수는 있지만 아직 수사를 마무리하기는 일렀다. 그러나 놀랍게도 거기서 끝났다.


La trahison du juif Dreyfus, "유대인 드레퓌스의 내통". 의도가 한눈에 보이는 헤드라인이다.

  무어라 손을 써 볼 틈도 없이 드레퓌스는 체포되었고,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이를 대서특필했다. 1894년 11월 6일 자 <라 리브르 빠홀> 지 헤드라인은 "유대인 드레퓌스의 내통"이었다. '유대인'이라는 단어를 헤드라인에 굳이 끼워 넣었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느껴지는 그 의도를 우리는 '반유대주의'라고 부른다.


  당시 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이 유대인들에게 치를 떨고 있었다. <라 리브르 빠홀>을 비롯한 가톨릭계 보수 신문들이 반유대주의 정서를 하루가 멀다 하고 구토처럼 쏟아내고 있었고, 반유대주의는 날로 국수주의와 뒤섞이고 있었다. 드레퓌스 사건은 그 반유대주의의 결과임에도 원인의 탈을 뒤집어썼다.


신문에 실린 군적 박탈 장면. traître란 반역자란 뜻이다.

  드레퓌스는 종신형과 함께 군적을 박탈당했다. 1895년이 시작될 무렵, 그의 새해에는 기쁨과 설레는 계획 대신 군적 박탈의 불명예와 억울함만이 가득했다.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유대인을 증오하는 군중의 목소리에 묻혔고, 그는 '악마 섬'으로 알려진 프랑스령 기아나의 한 섬으로 유배당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가 선고받은 건 종신형이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아내, 루시 드레퓌스(Lucie Dreyfus)
알프레드 드레퓌스의 형, 마티유 드레퓌스 (Mathieu Dreyfus)

  이 청천벽력은 알프레드 드레퓌스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그 아내 루시와 형인 마티유 또한 갑작스러운 불행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은 드레퓌스 구명을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기 시작했다. 드레퓌스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를 위로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세상에 외쳤다. 그러나 드레퓌스라는 이름조차 갈수록 잊히는 세상에서, 이미 악마 섬에 갇힌 과거의 죄인이 결백하리라 믿고 힘을 보태줄 사람을 찾는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드레퓌스는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진실을 잊어도 그 진실을 끝내 밝히는 사람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꺼져 가는 드레퓌스 사건의 촛불에서 심지를 돋운 사람은 피카르(Picquart) 중령이었다. 참모본부 정보국에서 일하던 피카르 중령은 이 사건에 이상한 점이 있다고 느꼈다. 서둘러 마무리된 것도 이상했고, 드레퓌스와 동창이어서 그의 성격을 아는 사람으로 드레퓌스가 스파이라는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서류를 펼쳐 본 그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첫째,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물증은 하나도 없다. 둘째, 그 편지와 유사한 필체를 가진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그 필체의 주인공, 페르디낭 에스테라지(Ferdinand Esterhazy) 소령.

  피카르 중령은 참모 본부 상부에 이 사실을 알리며 재판을 건의했다. 때마침 마티유와 루시의 노력도 빛을 발했다. 마티유는 드레퓌스의 죄에 결정적 증거가 있다는 거짓 기사를 내서 드레퓌스를 다시 뜨거운 감자로 만들었다. 드레퓌스 사건 뒤에는 언론 싸움이 있다는 걸 깨달은 걸까. 그러는 동안 루시는 증거도 공개하지 않고 선고를 한 건 부당하다고 청원서를 냈다.


  그때 명세서 사본이 신문으로 공개된다. 스파이의 필체로 적힌 그 편지를 보고 뜨끔한 사람이 한둘은 아니었겠으나, 가장 곤란했던 건 에스테라지 즉 스파이 본인이었다. 그는 주변에 이런저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다니며 은근슬쩍 위기를 피해 보려 한다. 만일 이때 참모 본부가 그를 용의 선상에 올리고 수사했더라면 진범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모 본부에게 드레퓌스의 결백을 증명하는 일은 자기들의 과오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모르쇠로 일관해도 욕을 먹 판이었지만, 참모 본부는 에스테라지의 거짓말에 장단을 맞춰주기까지 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참모 본부는 드레퓌스라는 성실한 군인의 인생을 망쳤고, 그들이 에스테라지라는 스파이를 그냥 둔다는 건 국가 안보를 갉아먹는 짓이었다. 심지어 마티유가 에스테라지를 고발까지 했음에도 구속을 하지 않았다. 정식 절차조차 무시해 버린 것이다. 눈 가리고 아웅 수준이 아니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드는 일이었다.


  이를 날카롭게 꼬집으며 세상에 알려야 할 언론들은 박제한 앵무새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참모 본부의 행동 싸고돌고 있었다. 알프레드 드레퓌스라는 청년이 찜통 같은 무더위의 외딴섬에서 과거도 미래도 잃어버린 채 오늘 같은 매일을 살아야 했던 이유는 고작 그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부 지식인들과 <피가로> 지 등이 에스테라지 범인설을 주장했지만 이들의 목소리가 여론을 형성하기엔... 다른 너무 많은 언론들이, 너무 많은 거짓말을 뿌려대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참모 본부는 오히려 피카르 중령을 체포하는 등 망령 난 행동만 해댔다.


  프랑스가 어떤 나라인가. 혁명의 고유 명사 아니었던가. 당시 유럽에서 민주주의가 가장 잘 자리매김해 간다는 프랑스에서 이런 뻔한 사기극이 펼쳐진 것이다. 유럽 전체가 수군대도 이상하지 않을 가십거리였고, 사실 프랑스의 수치였다. 악마 섬의 드레퓌스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동안, 이 일은 훗날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으로 불릴 만큼 주목받는 사건이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한 방 훅을 날린다. 아주 강력한 훅을.


"나는 고발한다...!" 공화국 대통령께 보내는 편지, 에밀 졸라 씀.
에밀 졸라


  <로로르> 지의 1면을 빼곡하게 메운, 그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이다.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쓴 이 글은 드레퓌스가 범인일 수 없으며, 에스테라지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논리 정연하게 조목조목 서술했다. 한 순간에 판세를 뒤집어 버렸다. 펜의 힘이 얼마나 센지를 보여준 강력한 한 방이었다.


  이제 여론이 바뀌었으니, 엄청난 비난도 바뀐 방향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참모 본부를 비롯하여 드레퓌스가 재판을 다시 받는 걸 강하게 반대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간 감춰왔던 속내를 드러냈다. 반유대주의가 괴물처럼 터져 나와 파리 시내를 뛰어다녔다. 유대인들을 습격하고, 에밀 졸라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이 이어졌다.



  다시 말해 드레퓌스가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사람들과, 그렇게는 할 수 없다는 사람들로 나뉘어 온 프랑스가 들썩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잠잠히 가라앉게 된다.


  1898년 8월 참모 본부 일원이었던 앙리(Henry) 중령이 자살했다. 면도칼로 목을 찔러 자살한 그의 모습은 캐리커쳐로 여러 번 되새겨질 만큼 충격적이었다. 참모 본부에서 여태까지 드레퓌스를 죄인이라고 몰아세워 놓았는데 죄가 드러나기 직전이 되어 들썩거리는 모습을 보며 많이 불안했거나 양심의 가책이 심했던 모양이었다. 자살이라니 그 개인의 삶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해 상황은 일순 정리되었다. 드레퓌스에게 유죄 선고를 한 일에 아무 거리낄 게 없다면 자살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반유대주의의 선봉에 서서 유대인을 공격하는 등 난리를 피우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드레퓌스가 다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토양이 드디어 마련되었다.


  물론 그러는 동안 에스테라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자기는 독일 측을 위한 스파이인 척 하고 있었던 프랑스 측의 스파이, 즉 이중간첩이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그토록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사실을 감춰 왔는데 참모 본부가 재판을 다시 연다 한들 쉽게 인정할 리 없었다. 드레퓌스의 재판은 다사다난 그 자체였다. 변호사는 법원에 가던 길에 갑자기 총격을 받아 법원 대신 병원에 가게 되고, 법원에서도 참모 본부는 거짓으로 일관했다. 결국 드레퓌스는 '그들 덕분'에 종신형 대신 10년 형을 받게 되었다. 물론 애초에 무죄인 사람에게 10년 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과는 달리 이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에밀 졸라도 다시 펜을 들었다. 프랑스에는 또 비난이 쏟아졌다.


"드레퓌스는 무죄"라는 제목의 당시 신문 기사. 가운데 피카르 중령을 중심으로 관련자들 사진을 실었다. 윗줄 가운데 에밀 졸라도 보인다.

  결국 드레퓌스는 특별사면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를 위해 여태껏 싸워온 사람들은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드레퓌스는 이제 다 지긋지긋했던 듯 사면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지치기도 할 만한 일이었다. 1895년 초부터 시작해서 1899년 특별사면까지, 어느 때보다도 길었던 5년이었을 테니.


복직되는 드레퓌스

  1904년 재심이 청구되었고, 1906년 결국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참모 본부가 감춰왔던 모든 거짓은 이제 낱낱이 밝혀졌고 수치의 기록이 되었다. 드레퓌스는 박탈당했던 계급장을 돌려받고 훈장까지 받으면서 군대에 복직하게 된다.


  그 후로 드레퓌스는 '드레퓌스 사건'이 없었다면 계속 이어졌을 군인의 길을 계속 걸어간다. 제1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고, 진지하고 성실한 군인으로서 진급도 하고 은퇴도 했다. 악마 섬에서 보낸 5년의 기억을 책으로 엮어낸 것을 빼면 남다를 게 없는 날들이었다. 루시도, 마티유도 그제야 삶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손주들을 보고... 노년까지 맞을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내 삶의 5년'이라는 제목으로 악마섬에서의 기억을 책으로 낸다.
1935년 노년의 알프레드 드레퓌스
1934년 아내 루시와 함께.
형 마티유와 함께
손주들과 함께. 그의 표정이 밝다.


  유럽 여느 집 가족사진에나 있을 법한 사진 몇 장을 남기고 1935년 그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드레퓌스 사건은 정치계와 언론이 왜 깨어 있어야 하는지, 그들이 깨어있지 않으면 얼마나 끔찍한 범죄를 (남들 다 뻔히 보이게) 저지르는지 보여준 대표적 사건이었지만 정작 그 본인만큼은 태풍의 눈처럼 잠잠했다. 그래서 더 유감스럽다. 이런 일이 없었더라면 그의 삶이 얼마나 안정되고 평온했을지 느껴져서.



  아주 단순한 사실이 있다. 그 사람의 살 색이 어떻든지,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어떤 외모든지, 어떤 조상을 갖고 있든지 중요한 건 그 사람 됨됨이라는 사실이다. 이완용과 유관순이 같은 나라 사람이었지만 정반대의 삶을 살았듯, 슈바이처와 히틀러가 민족적 뿌리는 같지만 삶의 가치는 전혀 다른 곳이 두었듯...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열매로 남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사실을 잊기란 너무 쉬운 것 같다. 드레퓌스가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오늘 우리 사회 모습은 어떤지, 할 말이 많아서 할 말이 없다. 다만 역사는 진보한다는 보편적인 한 마디가 통용되고 있길 빌어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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