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 오란다자카
고등학교 때 종종 어른들이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고등학교 친구가 제일 특별하고 오래 가" 하고 말할 때마다 나는 뜻 모를 반감이 일곤 했다. 아직 살 날이 구만 리 같은데 지금 친구가 최상급이라고 벌써 말한다면, 앞으로 만날 사람들과의 인연이 다 폄하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달까.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스스로를 본다. 그 후로도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났고 앞으로도 많이 만나겠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연락을 않다가 대뜸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 같은 편안함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도에서 NGO 일을 하며 보낸 시간이 햇수로 3년이었다. 먼지 폴폴 날리는 더운 땅을 걷다가 돌아와 보니 한국은 하필 또 스산한 바람이 부는 11월. 나고 자란 나라에 적응이라니 우습지만 적응이 필요했다. 지금 여기가 내 현실이라는 실감이 도무지 나지 않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면 모든 게 다 그대로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막연히 친구들은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3년만에 만나는 사이는 그 전과 같을 수 없었다. 여전히 아끼고 좋아하는 친구들이지만, 그 친구들도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안다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시간도 시간이지만 그 시간 동안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기를 살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그런 거 상관 없는 친구들도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도 분명 거기 속했다.
내가 나온 학교는 교문 밖으로 일차선 도로만 건너면 논과 밭, 산이 펼쳐져 있는 시골 중고등학교였는데, 중학교는 각 4반 고등학교는 2반씩이었으므로 이 친구들과는 중학교 1학년 교복 처음 입던 날부터 원래도 잘 알고 지내긴 했다. 그러나 같이 다니는 무리가 달라 적당히 친한 정도였던 우리가 셋을 한 무리로 생각하게 된 건, 방송부 국장이었던 W가 학교 축제 때 쓸 영상을 찍는다고 우리를 불러냈던 어느 가을의 공휴일부터였다.
W가 연출과 감독을, 다른 친구 J가 주연을 맡았고 나는 W의 친구 자격으로 온갖 '시다'를 (그뿐 아니라 지금 생각하면 이불을 뻥뻥 차고 싶은 더빙까지) 한 날이었다. 나중에 강당 스크린 가득 메운 화면을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는데, W는 친절하게 그 영상을 CD로 구워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렇다. 스트리밍도 USB도 오기 전 우리에게는 CD를 굽던 시절이 있었다.) 그후로도 우리는 줄곧 친하게 지냈다. 교환 일기를 쓰기도 했고, 자율 학습 전후로 같이 밥을 먹기도 하고, 서로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W와 내가 재수를 하면서, 뒤이어 청일점이었던 J가 군대를 가면서, 또 뒤이어 내가 인도에 가면서... 그런 식으로 우리는 한 동안 서로 보지 못했다. 그래도 우리 모두 서울에 있었고, 뭐 마음 먹으면 언제든 볼 수 있겠지 싶었으므로 크게 서운하거나 아쉽지 않았다. 만나면 또 늘상 보던 사람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바톤 터치하듯 바쁘게 지내다가, 공교롭게도 지난 겨울에는 우리 모두 백수였다. 인도에서 돌아와 두 달의 파트 타임까지 마치고 정말 백수가 된 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길을 가기 직전이었던 W, 하던 일을 그만둔 참이었던 J. 우리는 그래도 한 번은 여행을 같이 가자면서 충동적으로 여행을 결정했다. 각자의 사유로 지쳐 있었던 우리의 계획은 한 마디로 '無'였다. 이렇게 아무 준비 없이 가도 되나 싶을 만큼 준비 없이, 숙소와 비행기 정도만 준비된 여행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여행지는 J가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또 갈 만큼 좋아하는 일본 후쿠오카였다.
그 즈음 나는 도무지 피로가 풀리지 않는 불면의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입고 있는 두꺼운 코트가 무겁게 느껴질 만큼 지쳐서, 어영부영 도착한 후쿠오카가 어땠는지도 잘 모르겠다. 외국 여행을 왔다는 느낌보다는 서울 한복판에서 피로에 절어 만난 것 같은 기분 같기도 하고. 시작됐는지 아닌지도 모르게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고, 준비도 계획도 없던 여행답게 시행착오와 실패의 연속이었다.
길을 못 찾는 건 기본이었다. 삼시세끼 맛있는 것만 실컷 먹고 오겠다고 굳게 다짐했으나 삼시두끼 우동을 먹거나 편의점 음식을 먹은 날도 있었다. (차라리 돈을 아끼려고 그런 거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마땅한 식당이 눈에 안 들어와서 그랬다.) 당일에 급하게 검색한 교자집에서 하루를 마무리하자며 열심히 걷다가 보니 하카타 역 주변만 맴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다들 자기가 남들을 따라간다고 생각하며 별 생각 없이 걷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하카타 역이 무슨 수렁 같았다. 한 번 갔다 하면 서너 바퀴씩은 기본으로 돌아야만 벗어나서 행선지를 향할 수 있었다. 길을 못 찾아서 많이 걷는 것쯤, 길치인 내게 일상다반사였음에도 이땐 피곤해서 그랬는지 나중에는 하카타 역을 가기도 싫었다. 여행 기간 내내 9시가 되면 나는 픽픽 쓰러지듯 잠들었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커피 한 잔 마시겠다고 카페를 찾기만 하면 끝도 없이 걸어야 했다. 널린 게 스타벅스이고 카페인 세상인데 왜 우리가 커피를 마시고 싶을 때는 주변에 하나도 없는지. 누가 억지로 꼬아 놓은 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뭐가 안 맞나 싶을 만큼 맘대로 되는 게 별로 없는 여행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당혹스러웠던 건 유후인에 가려던 날 아침이었다. J가 전에 다녀왔던 곳인데 좋았다고, 너희가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해서 W와 나도 기대가 컸다. 전날 밤 알람도 잘 맞춰 놓았고 아침에 숙소에서 시간 맞춰 나오기도 했다. 아홉 시 가량의 이른 시간이었어서 조용한 길을 걷는 데 여행지를 걷는 설렘보다는 마치 매일 걷는 길을 걷듯 일상적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고요한 평온은 금방 깨졌다. J가 멈칫하는 순간.
10시 반 버스를 예약한 줄 알았는데 9시 반 버스를 예약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은 거였다. 우리가 집에 나설 때 이미 버스는 출발했을 터였다. 예약한 J도 엄청 당황했고, J가 얼마나 미안해할지도 아는 우리도 당황했다. 일단 집에 있지는 않을 거니까 어디든 가 보자, 하고 우선 버스 터미널을 들렀다가 유후인행 버스 표가 더 이상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카타 역에도 (또!) 가 보고 백방으로 애를 썼지만 도저히 유후인은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표가 매진이었다. 정말 이럴 수가 있나? 유일하게 남은 표가 있었다. 나가사키에 갈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 명 한 명으로 나뉘어 버스를 타야 했지만, 그렇게라도 갈 수 있는 곳이 나가사키뿐이었다. 우리는 엉겁결에 계획에도 없던 나가사키행 버스에 올랐다.
나가사키 하면 이제 우리에겐 검색어 자동 완성처럼 '짬뽕'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르지만, 이곳은 나름대로 독특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오래 전 최초의 개항장이었던 곳이기도 하고 히로시마와 함께 원폭 투하 피해 지역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개항 즈음 화란인, 즉 네덜란드 사람들이 많이 살던 언덕배기가 볼 만 하다고 했다. 그곳을 오란다자카라 부르는데, 오란다는 '홀랜드'의 일본식 발음이고 언덕을 뜻하는 '사카'가 붙어 생긴 지명이다. 우리는 나가사키에 가자마자 택시를 타고 오란다자카로 향했다.
비가 내릴 듯 말 듯 흐린 날씨였다. 사진은 회색으로 남았지만, 많이 춥지 않아 그럭저럭 걸어다닐 만한 날씨였다. 웃고 떠들면서 천천히 언덕길을 올랐다.
언덕길을 넘어서자 작은 동네가 나왔다. 여기 어디엔가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구라바엔(Glover園, 즉 글로버 정원)으로 쭉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개항 당시 사람들이 살던 대저택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길을 물어물어 구라바엔에 올라갔지만 폐장까지 한 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이 된 저택을 비롯해 당시를 살던 사람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저택 몇 곳을 구경하고 나니 폐장 시간이었다. 언덕 아래로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너른 바다가 보였다.
뭣도 모르고 왔다가 적당히 훑어보고 나가기까지 딱 한 시간. 관광을 목적으로 했다면 아주 부족한 느낌이 풀풀 나는 여행이었겠지만, 나는 모든 여행 코스 중 나가사키가 제일 좋았다. 힘들다고 꽃이 핀 정원에 잠시 앉아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라면 잘 하지 않을 탭댄스(내가 춘 건 아니다)나 상황극 같은 것들로 깔깔거리는 것도 그냥 웃겼고, 사치의 냄새가 풀풀 나는 오래된 건물의 목조 바닥을 또각또각 걸어다니며, 오래 전 이 친구들과 수학여행 갔던 때를 어렴풋하게 떠올리고 미소 지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관광지 노릇을 해보겠다고, "바닥에 깔린 돌 중 하트 모양 돌을 찾아보라"는 미션을 브로슈어에 앙증맞게 넣어 놓은 것을 보며, 혼자 왔다면 절대 찾지 않을 그 돌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도 좋았다. 혼자가 아니라 같이라서 할 수 있었던 것들이었다.
출구 쪽에 있는 기념품 가게에서 엽서 몇 장을 사 들고 나왔다. 또 카페를 찾아 하염 없이 걸었다. 기념품 가게들은 거의 문을 닫거나, 마지막 손님을 끌어보겠다고 우리에게 말을 걸거나 둘 중 하나였다. 홍차 한 잔에 나가사키의 명물이라는 카스테라를 먹고 나오니 어느새 정말 어둑해져 있었다. 한 시간 간격의 버스를 따로 타고 돌아와 역에서 다시 만난 세 사람이 숙소까지 대략 걸어서 10분. 늦은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를 비추는, 아무럴 것도 없는 풍경이 괜스레 마음에 오래 남은 날이었다.
<길을 잃기 위해서>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후렴 가사는 "길을 잃기 위해서 우린 여행을 떠나네 어떤 얘기도 하지 않고 어디론가 걸어가네" 하고 지나간다. 사실 가사 전체를 관통하는 큰 메시지와는 좀 결이 다른데, 그냥 딱 그 부분이 좋았다. 목적지를 위해 최단거리를 설정하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바쁜 걸음도 좋아하지만, 때로는 길을 잃어도 좋을, 아니 길을 잃어서 더 좋을 걸음도 있다.
바쁘게 열심히 살던 한 시절이 잠시 끝났다는 것을 느끼며, 지금이 지나고 다시 바빠진 다음에 내 인생에 휴가라는 명목이 붙으려면 출산 휴가일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도 느끼며, 우리는 길을 잃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계획도 없고 성공한 것도 없고 그러다 보니 가끔 마음 상할 때도 있고, 아마 서로의 성격과 성향을 잘 모르는 사이였다면 싸웠을지도 모를 여정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그 길에서 우리는 오래 함께한 시간을, 그래서 즐겁다고 말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간을 주웠다.
앞으로 살면서 또 각자의 페이스대로 살다 보면 이제 다시는 같이 여행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바쁘게 공부하고, 정신 없이 일하고, 치열하게 사는 날들 가운데 잠깐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같이 하는 정도가 우리 함께 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기 쉽겠지. 그래서 더더욱, 길을 잃는 여행이 소중한 기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