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정문 근처 어느 한 골목길
열아홉, 수능이 끝났다.
그때까지의 우리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일순간에 바뀌기 시작했다. 큰 일이라면 큰 일이니고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우리에겐 마치 소행성 하나가 사라지고 새로 피어나는 것 같은 일이었다. 물론 그때는 몰랐다. 사실 모르겠는 것 투성이였다. 수능만 끝나면, 끝나기만 하면, 하고 벼르던 날이 왔지만 정작 자유롭고 기쁘다는 생각은 많이 들지 않았다.
수능 이후에도 면접이며 논술이 줄줄 이어져 의외로 바쁘기도 했지만, 꼭 그것만이 이유도 아니었다. 왜 이러지? 1년 내내 적어 내린 리스트에서 이미 본 영화 제목에 금을 하나씩 그어 지우면서도, 한 번쯤 보고 싶었던 가수의 공연에 가면서도, 그냥 이 모든 게 꿈인 듯 의아하고 얼떨떨했다.
그때의 변화는 혁명 당일 뚝딱이라기보다는 혁명의 여파처럼 서서히 다가왔다. 이를테면 예쁘고 당당한 여성의 상징 같아 보여서 꼭 신어보고 싶었던 하이힐은, 십이월에 처음 신었다. 그 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문명을 뒤로한 사람처럼 신발을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었다.
졸업식을 한 당일 저녁, 스무 살의 두 번째 달 어느 날. 졸업식 당일 저녁에 학년 전체가 다 같이 모여 펜션에서 술을 마시는 게 일종의 전통이었다. 그렇게 처음 술을 마셔 본 날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른의 상징 같아 보였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펜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얼굴이 발개진 아이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남겼고, 다음날 아침 나는 엄마가 끓여준 김치콩나물국으로 해장이란 것도 처음 해보았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 그즈음, 서툰 손으로 처음 화장도 했을 것이다. 틴트 정도는 사 보았지만 그전에 제대로 된 화장을 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아이라이너나 립스틱, 아이섀도 같은 것들을 사면서 이렇게 아주 조금씩 어른으로 발돋움하는 듯한 '기분'이라는 생각을 조금쯤은 했던 것 같다.
나중에 꼭 해 보겠다고 벼르던 것들을 그렇게 하나씩 해 나가면서도, 나는 별로 기쁘지 않았다. 그보다는 알 수 없이 막막했다.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당장은 이런저런 것들로 채울 수 있었지만, 눈앞의 시간이 예상되지 않는 건 난생처음이었으니까. 가끔 한두 살 많은 선배들이 선생님을 뵈러 왔다가 안부차 교실에 들러 꽃잎 같은 얼굴로 웃으며 설핏 이야기해준 내용을 제외하면 대학 생활에 대해 아는 것도 없었고, 사실 그때의 내겐 대학 생활 자체가 불투명했다.
수능이 끝난 교실에는 묘한 감정이 감돈다. 평소보다 잘 나온 사람, 꾸준히 나오던 성적에 비해 미끄러진 사람, 진작에 수시 붙어서 여유가 있던 사람, 끝의 끝까지 마음 졸여야 하는 사람... 그전까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하게 시험을 보고 큰 편차 없는 생활을 하던 아이들이 서서히 다른 공기에 살기 시작한다. 누가 어느 대학을 갔다는 플래카드가 강당 벽에 나붙어 휘날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제 정말 우리가 다른 길을 가게 되었구나 하고 실감이 났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스케줄에 움직이던 우리는 이제 다른 길을 간다고 알려주던 플래카드. 누군가의 이름은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은 없는 그 플래카드. 누군가에겐 자랑이고 누군가에겐 씁쓸함일 플래카드. (요즘은 불법이 되었다던데 차라리 잘되었다.)
나는 그 플래카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히 엄마 아빠의 마음을 뿌듯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이름은 2월 끝물에야 간당간당 추가합격으로 들어갔다. 친구 W의 이름은 없었다. 모든 노력이 보상받을 수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걸 알기에 우리는 너무 어려서 아직 노력밖에 배운 게 없었다. 알고 지내던 유일한 세계에서 내쳐지는 건 전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엄연한 현실은 차가웠다.
엄마의 눈물과 내게 악몽 같았던 하룻밤,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반수를 전제로 원치 않던 전공이었음에도 학교에 등록을 했다. (그리고 거기서 신나게 놀다가 반수를 못 할 위기에 이르자 또 하룻밤의 고민 끝에 자퇴를 하게 되는 건, 아직 몇 달 후의 이야기.) 그리고 마찬가지로 재수를 시작할 W와 함께 기분 전환 삼는다며 홍대로 갔다. 교실에서 매일 보던, 각별하던 친구와 이제 당분간 볼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기 위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W와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초등학교 때 W와 같은 학교 아이들이 학원에서 종종 이야기하는 걸 들어, 나는 W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주로 그 시절 성격이 당찬 여자아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던 '조폭 마누라' 같은 호칭을 들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결국 중학교에 가서 W를 만났다. 같은 반 스무 명이 쪼로록 같이 지내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 학년에 4반이 있는 중학교에 가면서, 다소 긴장한 채였다. 같은 반이 된 W에게 인사를 하겠다고 자리로 찾아갔을 때, 마찬가지로 긴장한 W가 벌떡 일어나 엄숙하게 악수까지 하면서 진지하게 인사를 받아 웃음이 터졌다.
그 후로 우리는 쭉 친하게 지냈다. 당시 아기였던 W의 막냇동생이 단축번호로 자꾸 내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와 뭐지 싶어 웃기도 하고, 학생회 임원을 같이 하기도 하고, 유독 잠이 많은 W를 깨우기도 하고, 교환 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다른 반이 되는 것 이상으로 달라지는 기로에 서 있었다. 둘 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씁쓸한 걸음이었지만, 적을 둘 곳이 없던 막막함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나는 그런 W의 마음이 어떨까 싶어 더욱 속상했다.
그때만 해도 아직 경의선이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기차였던 시절이다. 경의선 종점인 문산역보다도 한참 더 깊숙이 들어가야 나오는 시골에 사는 우리가 서울에 가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일찍부터 나서서 홍대로 갔다. 점심을 뭘로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도 있는 몹씨라는 카페에 가서 그때부터 이미 유명했던 초콜릿 케이크를 먹던 오후만은 사진과 함께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바닥에 의자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들어오던 2월 말의 햇살, 나른하면서도 어쩐지 서글프게 느껴지던 그 햇빛이 스웨터 위에서 반짝거리던 때 그 아릿한 감정들이 생각난다. 우리는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에 씁쓸한 고민들을 곁들여 먹었다.
'우리 우정 변치 말자' 식의 간지럽고도 직설적인 말 같은 건 하지도 듣지도 않았지만, 마치 그런 징표인 것처럼 길거리에서 핸드폰 고리를 똑같은 걸로 하나씩 샀다. 결국 우리는 그 고리가 달랑거리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졸업식을 했다.
스무 살이라는 단어를 발음해 보자. 풍선껌처럼 후 하고 둥실둥실 불어나다 터지는 단어. 발음조차 그 뜻만큼이나 풋풋하다. 그래서 열여덟의 나는, 열아홉의 나는, 스무 살이 되게 특별한 줄 알았다.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일이 적어도 두세 가지는 일어날 줄 알았고, 반짝거리는 새 구두 같은 날들만 매일매일 이어지는 건 줄 알았다. 꼭 그렇지 않다는 건 스무 살이 되자마자 이내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 그 빛이 희석된 모양으로 굳어진 것도 있다. 상대가 좋았던 건지 상대를 좋아하는 내가 좋았던 건지, 그저 사랑이라는 관념을 사랑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던 스무 살의 첫 연애가 그랬다. 두 달의 대학 생활을 아쉬워하며 접고 다시 수험생이 된 순간의 기분도 그랬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나중의 일이다. 스무 살이 한참 과거의 일이 된 후에야 이것들이 빛을 잃었다.
정작 스무 살의 그 한가운데서 가장 먼저 빛을 잃은 건 스무 살이라는 그 단어 자체의 환상이었다. 스무 살의 연애, 화장, 하이힐, 술, 대학, 이런 게 아니라 스무 살 그 자체에 대한 환상이었다. 그건 앞으로 갈 길에 대한 설렘보다 지나온 길과 헤어질 아쉬움이 더 컸기 때문이었고, 그 아쉬움은 플래카드가 나부낄 때 왔다. 여태까지와 같을 수 없다는, 짧게는 6년부터 길게는 19년을 겪어 온 모든 세계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아쉬움과 두려움에서.
그래서 W와 함께 걸었던, 아직은 추웠던 2월의 홍대는 내 기억 속에서 어쩐지 스산하다. 사람 붐비기로 유명한 몹씨조차 기억 속에선 별로 붐비지 않았다. 기분 탓에 기억이 왜곡됐는지도 모르겠다. 옛날의 영광만을 간직한 채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 되어버린 유원지를 볼 때의 마음처럼, 내 마음이 그렇게 스산하고 쓸쓸했는지도. 그래서 눈부셨던 그 날의 햇살보다 아직 차던 바람을 피부가 더 기억하는지도.
아무튼 우리에게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즈음 자주 듣던 노래 가사처럼, '지금 필요한 건 너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서 쉬운 마음으로 산책을 하는 것뿐'인 그런 시간이. W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 작은 핸드폰 고리가 있어 졸업식 날 마음이 조금이나마 덜 무거웠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이제 우리에게 스무 살은 아득해졌다. 여간해선 돌아보는 일조차 없을 만큼 머나먼 시간이 되었다. 곧 다가올 시간, 아니면 오늘 당면한 시간을 이야기하며 한숨 쉬고 토닥이고 울고 웃기 바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우린 둘 다 또 우리의 스무 살 그때처럼 수험생이 되어 다른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의 스무 살은 달콤 씁쓸한 초콜릿 한 조각으로 잘 남은 걸까. 더 이상 특정 나이에 대한 환상 같은 건 품고 있지 않지만, 나중에 돌아보았을 때 의미 정도는 있었으면 한다. 그 나이의 내게 이런 시간이 있었다고, 그 나이의 내게 이런 네가 있었다고, 그 정도 허심탄회한 고백 정도는 남는 매해였으면 한다.
또 한 해가 끝나가는 듯 하늘도 나무도 서서히 비어 간다. 곧 한 살을 더 먹게 될 코앞에서, 그 시절의 우리를 떠올려 본다. 차가웠던 시간이 이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고마운 길을. 같이 걸어서 그나마 쉬운 마음일 수 있었던 그 길을. 지금 다시 가서 똑같이 걷는다 해도 다시는 걸을 수 없을 그때의 우리, 그때의 그 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