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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Dec 09. 2016

서울, 서울, 서울

273 타고 가는 길

누군가 내게 여행지를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당장 행복한 고민에 빠져 들겠지만, 사실 별로 선호하지 않는 확고한 기준은 있다. 어디서나 비슷하게 펼쳐지는, 천편일률 도심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도심 한복판의 쇼핑 몰과 식당이 싫은 건 아니지만, 굳이 여행까지 간다면 그보다는 좀더 과거가 남아있는 면 쪽이 더 보고 싶다.


같은 이유로, 서울이 나의 여행지라면 강남보다 강북을 둘러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73번 버스는 탈 때마다 내가 이 도시에 속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해 주는, 이 타향을 구경시켜 주는 교통수단이자 유희 수단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면 전철보다 273을 탄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창 밖을 보는 게 전부인, 딱히 특별한 것 없는 길이지만 사실 사치스러운 시간 놀음이다. 


이미지 출처: http://visitseoul.net


273은 노선이 무척이나 길다. 학교 근처에서 273을 타면 인근의 대학교를 여럿 거쳐 대학로에 진입하고, 대학로에서 종로를 거쳐 충정로와 아현을 지나 이대, 신촌, 홍대까지 가기 때문이다. 거치는 대학교가 많아 언론에서 '스쿨버스'라고 칭하는 것도 본 적이 있다.


학교 근처에서 273을 타면 나와 비슷비슷한 또래의 대학생들이 보인다. 무심한 표정으로 제각기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사람들, 그러다가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얼굴에 화색이 도는 사람들. 각자의 무심해 보이는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표정이, 얼마나 많은 생각과 감정과 피로들이 켜켜이 쌓여 있는 것일까?


창 밖으로는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가게의 간판들을 구경한다. 오래 전의 그것들처럼 투박하고 정직한 무슨무슨 식당의 간판들. 식당, 이라는 말조차 입에 넣어 보는 게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며, 말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그 말을 머릿속에서 입 안에서 한 번 굴려본다. 반면 케이크처럼 예쁘게 잘라 다른 곳에 갖다 놓으면 어디 이국의 풍경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세련된 필기체의 간판도 있다. 그 안에서 분주하게 커피 머신을 만지는 직원들과, 들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못 한 채로 커피를 홀짝이는 직장인들도 본다.


동네의 시그니처 같은 가게들의 풍경도 있다. 아현을 지나갈 때 보이는 가구 상점들과 조금 더 지나면 보이는 웨딩타운에 치렁치렁 걸려 있는 드레스들. 하얀 웨딩드레스뿐 아니라 이브닝드레스 같은 것들도 걸려 있어, 낯설다는 감각으로 지나가곤 한다. 종로 보석상들 특유의 반짝거리는 조명도 눈길을 끈다. 보문역 근처의 야채 가게들은 왜 그렇게 인도에서 보던 야채 가게들을 떠올리게 하는지. 내가 살던 집은 아이들까지 몇십 명이 바글거리며 살았기 때문에 동네보다는 장이 서는 날 대용량으로 야채를 샀지만, 동네 가게를 지나다 보면 유독 눈이 가는 가게들이 있었다. 보통 구멍가게 한구석에 구색을 맞춰 야채를 팔기도 하는데, 대강 큰 통에 담아서 파는 다른 가게들도 있지만 어떤 가게는 흙색 감자 포대 위로 각종 야채를 어찌나 정갈하고 가지런하게 놓았는지 꼭 꽃구경하듯이 야채를 구경하며 산책하기도 했다. 보문역 근처의 야채 가게들을 보면 그 가게들이 떠오르면서, 결국 사람 사는 풍경이란 으레 비슷하게 마련이라는 생각까지 이어지곤 했다.



하지만 가장 묘한 기분은 종로를 지나 광화문으로 들어설 때 느낀다. 일반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종종 예술영화관을 찾은 일을 빼면, 광화문에 내릴 일이 내겐 별로 없었다. 종로를 지나면서 고층 건물이 양쪽에서 번득거리고, 나는 왜 고층 건물을 숲으로 표현하는지 이해하게 되고, 이곳이 서울이란 도시가 오래 품고 있던 심장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광장이 나오면, 그 광장 바닥에 보이지 않게 와글와글 펼쳐져 있는 다양한 감정과 생각, 이해들 앞에 잠시 할 말을 잃는다.


그 광장 한가운데는 늘 사진을 찍으며 구경하는 외국인이 있다. 방문하는 외국인은 이곳을 어떻게 느끼고 기록할까? 나는 그게 궁금하다.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과 어진 손을 내밀고 있는 세종대왕 동상, 아직도 검은 바다에 있는 이름들을 부르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천막, 형광색 조끼를 입고 걸어 다니고 있는 경찰들, 그밖에 계절에 옷을 갈아입듯 그때그때 시안에 따라 각기 다른 피켓을 들고 선 사람들이 오락가락하는 곳.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해치는 이제 한 발짝 물러나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 두 달간 완전히 새로운 의미마저 가져 버린 광화문 광장은, 지나갈 때마다 그 바닥에 깔려있는 무언가들이 나를 잡아챈다.


이미지 출처 연합뉴스


고궁과 고층 건물, 빳빳한 넥타이와 뾰족한 하이힐, 아픈 천막과 플래카드들이 모두 있는 곳. 작은 연극 무대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있고, 오래된 건물의 간판에 쓰인 건강원 방앗간 하는 글자들과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동일한 글자들이 나란히 있는 곳. 어디선가 여전히 유재하가 김현식이 흐르고, 다른 어딘가에서는 발랄한 걸그룹이 박자에 맞춰 윙크를 하는 곳. 종묘가 은은하게 미소 짓는 한편 커다란 교회 건물이 당당하게 서 있는 곳.


누가 그랬던가,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라고. 어디선가 읽은 그 표현에 무릎을 친 적이 있다. 되게 오래 산 건 아니어도 그래도 몇 년을 살았는데, 불과 2년을 산 인도의 집이 있던 곳은 '우리 동네'로 여겨지는 한편 서울과 나는 언제나 같은 반의 적당히 어색한 친구처럼 한 발짝 떨어져 멀뚱멀뚱 보고 있다. 그리고 273번 버스를 타면 새삼스럽게 나는 낯선 도시를 유람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갈 때는 그래도 몇 년씩 산 이 도시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해 본 적도 없다는 걸 깨닫고, 도심 한가운데 그런 박물관이 있다는 것을 이토록 생각도 않고 살았다는 걸 깨달으며 놀란다.


정신없이 이리저리 밀리며 살다가 이 도시를 떠나기 직전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이 도시에 산다, 고 말했던 지난 모든 순간이 이 도시를 여행하는 나그네의 걸음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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