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마 원폭 돔 가는 길
히로시마에서 보내는 첫 휴일이었다. 실은 평일이었다. 한산한 오전의 길거리를, 히로시마 역에서 노면 전차를 탈 때까지 걷는다. 하늘은 맑고 꽃은 예뻐 기분이 좋다. 그러던 중 뒤에서 괴성이 드문드문 들려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 하나와 아이 하나가 오고 있다. 아이는 계속해서 꺽꺽 소리를 지른다. 내가 천천히 걷고 있었는지 두 사람이 잰걸음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새 내 앞으로 그들은 계속 걸어간다. 시선이 닿지 않는 뒤에서 보니 아이는 마음이 조금 아픈 듯했다.
일본의 골목길에서 쉬이 허용되는 데시벨이 아닐 것이고, 아버지인 듯한 남자에게도 그런 상황이 편안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아이를 제지하거나 조용히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의미도 형태도 없는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기꺼이 허리를 숙일 뿐이다. 작고 조심스러운 행동 안에 깊숙하고도 따스하게 들어 있는 마음이란. 나는 경계심 없는 미소와 부드러운 눈인사밖에는 줄 것이 없는 행인이었지만, 그들은 마치 구세군 종소리처럼 감동을 작게 울리는 소리를 자기도 모르는 새에 내어주고 걸어갔다.
그런가 하면 이런 부자(父子)도 있었다. 노면 전차에서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똑같이 생긴 두 소년과 그 아버지. 장난꾸러기 두 소년은 계속해서 뭐라뭐라 속삭이고, 키득키득 웃고, 일어나고, 아버지는 그 때마다 앉으라 하고, 그러다가 전차가 원폭 돔 앞을 지나갈 때 두 아이는 전에 없이 조용히 멈춰 창밖을 가리켰다.
원폭 돔. 오래 전 이 도시 상공에서 인류 최초의 원자 폭탄이 터졌을 때, 그 직경 바로 아래에 이 건물이 있었다. 덕분에 주변을 모두 날려 버린 이 참사로부터 유일하게 부분적이나마 제 모습을 남긴 건물이 되었다. 히로시마에 오는 서양인들은 다 원폭 돔을 보러 오는 걸까 싶을 정도로 서양인들이 그 주변에 많은데, 우리가 탄 전차에도 큼직한 여행 가방을 질질 끌고 탄 서양인들이 앉아 있다가 원폭 돔 앞에서 내리고 있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여러 사람의 그 대조적인 방향, 그리고 또 다른 방향인 나까지. 우리 각자에게 그 찰나의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히로시마와 리틀 보이. 세계 최초의 원폭 투하는 분명 어떤 방향으로든 우리 모두에게 큰 상처다. 일본에겐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나라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평화 공원과 기념관을 심각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모두의 얼굴 빛은 각자 다른 방향의 다른 상처를 안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당시 "피해"국의 식민지였던 입장에서, 그들의 나이브한 상처는 은근히 거슬린다. 일본은 모든 실패의 기억을 담아두고, 그 실패 가운데 살아남은 유일한 건물만은 무너지지 않도록 철골로 잡아가면서까지 세워 두었다. 감추고 덮어 둔 실패와 그 위 재건의 기억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흔적도 없이 쓸려간 우리는 어디에 있나. 복잡미묘한 심경이었다.
작은 아이조차도 숙연하게 바라보는, 60년이 지나도록 남아 있는 그 상처가 우리 안에서는 과연 갈무리되어 있나? 원폭 돔에서 조금 걸어간 평화 공원에는 평화를 기념하는 상징이 되어 버린 종이 학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기념관 안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이 고요하게 놓여 있다. 피폭을 당하고 집에 돌아가 그 날 입고 있던 찢어진 원피스를 다음 날 다시 입기 위해 꿰매 놓고 저녁에 죽은 소녀, 피폭 당하자마자 달려온 부모님 품에 안겨 죽은 소년, 아들의 시체를 찾지 못하고 나중에 잔해에서 찾아낸 실내화 한 짝, 참사 며칠 후 쑹덩 빠져버린 머리카락 뭉치, 망가지고 녹슨 자전거의 잔해 같은 것들을 보았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전시물도 있었다. 은행 개점을 기다리며 돌계단 위에 앉아 있다가 그대로 검은 그림자만 남긴 채 사라져 버린 누군가의 흔적, 당일의 아비규환이 지나간 후에도 도시에 축축하게 내리던 검은 비가 그대로 남아 있는 벽 같은 것들. 생존자의 증언도 영상으로 남아 있었고 그 중에는 당시 일본에 있던 한국인의 증언도 있었다. 내 가족들을 모두 죽여 버린 이 원폭이 너무 밉다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할머니의 목소리, 당시 일하던 곳의 사장과 함께 사장의 부인 시체를 찾으러 나갔던 기억을 되새겨 보면서 관동 대지진 때처럼 되지 않을까 조선인으로서 불안했다는 말도 덧붙이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무너진 학교 건물 안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여러 명이 교가를 부르다가 목소리가 하나씩 사라지고 자기 목소리만 남았던 순간을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 그들은 이미 나이가 지긋했지만 상처는 사라진 게 아니라 그 긴 세월 내도록 그들과 함께 살아 있음을 보았다.
일본은 얼핏 보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골목길이 있는 나라 같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각자의 정원과 베란다에 널어 놓은 빨래와 이불을 보면서 잔잔한 삶의 냄새를 느낄 수 있는 골목길들이라는 느낌이 얼핏 든다. 서울의 분주한 일상과 고층 빌딩 숲을 등지고 나온 나는 그 모든 걸 여유롭게 볼 수 있는 외국인 여행자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뜻밖에 복잡한 마음이 남았다.
시내 한복판을 조금 벗어나 예쁜 카페로 들어섰다. 거의 벽장 수준으로 조그맣게 푹 들어간 계단 안쪽 자리, 낡은 나무 책상 1인석에 앉았다. 일기장을 꺼내 이런저런 상념들을 털어놓으며 혼자 시간 위를 둥둥 떠다녀 본다. 마음은 자연히 1940년대로 향한다.
광복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1945년에 끝났다. 폭력이 끊어지는 과정에서는 타인의 폭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었다. 결국 우리는 다소 제3자적인 위치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고, 그 후로 다 못 삭인 감정들을 엎치락뒤치락 와글와글 주고받았다. 정치인들은 손쉽게 말을 뒤집고, 공신력 있는 책에도 잘못된 정보들이 버젓이 인쇄되어 있다. 왜곡된 말과 글의 폭력에 속절없이 쓸려갔던 이들은 최선의 용기를 끌어모아 목소리를 냈다. 이들을 향해 허리 숙여 목소리를 들어 주었을 사람들은 이미 다 쓸려가고 없는데, 이제 누가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꺼이 허리를 숙여 줄 것인가. 그리고 그 작고도 조심스러운 행동은 세상을 얼마나 깊숙하고 따스하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런 날은 올까.
그 날 저녁, 시간이 남아서 들린 서점에서 호기심에 무심코 펴 본 역사책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일본 교과서 집필에도 참여했던 인물이 쓴 책이라는데 정말 과했다. 다른 책에서는 그래도 "조선 왕조"라고 하던데 이 책은 '이씨 왕조'라고 눙쳐 버리고 있었다. "일본 역사 교과서 필자로서 보증"하는데 일본은 "사료를 기반으로 역사를 바르게" 보고 있고 오히려 주변 나라의 눈치마저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않고 있다는 거다.
목차만 쓸어 보아도 그 내용을 알 만 했지만, 몇 꼭지는 찬찬히 읽어 보았다. 임나 일본부설은 말할 것도 없고, "고려의 모든 것을 부정한" 이씨 왕조, "국제법상 합법적인 합병"... 고종이 경술국치에 찬성한 "듯한" 느낌이 <승정원 일기>나 <일성록>에 나와 있다는 주장까지. (그 책의 어느 대목을 보고 한 소리인지 적어놓지도 않았다. 실존하는 책 제목만 들이대면 객관적인 증거인가?) 헤이그 특사는 단지 고종 개인의 권력을 위해 꾸민 행동이라는 문장 앞에서는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베트남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한 꼭지를 할애했다. 기생이라는 단어를 아주 지저분하게 끌어내려 묘사한 데 그치지 않고, 7-80년대에 일본에서 "관광으로는 불모지"인 한국에 "기생 관광"을 왔었다고 이야기하는 앞에서는 손이 떨렸다. 당시 성매매 관광 오는 일본인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동네 어른들 입에서 들은 적이 있었으나, 가해자의 입에서 건조하게 흘러나오는 소리는 훨씬 더 끔찍했다. 따뜻한 서점 실내에서, 한파라도 만난 사람처럼 어깨를 옹송그렸다.
단순히 민족 감정 때문에 화가 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민족주의를 덜어내고 역사를 볼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본의 시각이 어떤지도 보고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역사책 코너에 갔던 거였다. 시각의 차이를 보고 싶었고, 그중 받아들일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이면서 시야를 넓히고 싶었다. 그러나 거짓을 섞으면서도 거짓을 인정하지 않는 뻔뻔함, 같은 잘못에도 국적에 따라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불의함, 사람을 파편화하고 도구로 취급하고도 그걸 버젓이 이야기하는 잔인함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책의 저자가 교과서 집필진이라는 데 더 할 말을 잃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는 게 일본의 역사 교육이라면, 일반인 입장에서는 계속 해서 사과와 보상을 이야기하는 한국이나 중국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기에 피로를 느끼는 것도 이해가 간다.
원폭 기념관에는 마치 그곳의 모토라도 되는 양 그 날 하루아침에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사라졌다는 문장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 원폭 피해자들이 제국주의의 가해자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문장을 읽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며칠 무거운 마음으로 보냈다.
그러는 동안 한국에 있던 일본 대사가 송환되었고, 소녀상을 지키려는 이들이 분연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상처가 움직이고 있었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다. 많은 걸 바란다고 피로하게 여기는 이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이해시켜 주지 않았다. 거대한 녹슨 시계탑처럼 느껴지는, 정리되지 않은 역사의 상처를 마주하고 서서 망연자실한 며칠을 보냈다.
회복은 서서히, 사람을 통해 찾아왔다. 진솔한 일본인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일본을 바라보며 그 땅에 굳게 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나 대화하면서. 그 중 누구와도 역사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음에도 그들이 가진 따뜻함에 내 안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그러다 하루는- 대화의 맥락과도 전혀 상관 없었는데, 역사를 전공하시는 분도 아니었는데, 그냥 갑자기, 너무나 갑자기 어떤 분이 사과를 하셨다.
한국에 빚 진 마음이 많다고 웃으며 이야기하시던 그 분은 옆에서 통역해 주시는 분을 재차 채근까지 해 가며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일본이 과거 한 행동은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일본인으로서 너무나 미안합니다. 이 마음을 잘 좀 전달해 주십시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그 말을 다 통역해 달라고 부탁하는 그 말을 들으며, 그 진심이 묻어나는 얼굴과 시선과 말과 손짓 앞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용서는 나의 몫이 아니었으므로 내가 용서할 것도 없었다. 사과해 주셔서 고마웠지만 고맙다는 말도 웃기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양국 사이에 주고받아 온 나름의 언행들이 힘을 갖지 못한 이유를 새삼 깨달았다. 진심이 아니면 통하지 않으며, 진심만 있다면 매듭 짓는 일이 어렵지만도 않다는 걸.
나는 다시 한 번 아이에게 허리를 숙이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 우리 그런 존재이기를 바라는 나이브하고도 래디컬한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히로시마의 거리는 오늘도 깨끗하고 조용하다. 그 길 위를 걷는 나만이 복잡미묘한 마음에 이리저리 쓸려다니고 있었을 뿐이다. 언젠가 모든 상처도 다 무지개 다리 건너 별이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는, 그런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