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카오산 로드
희로애락이 잔잔하게 이어지는 평이한 시간 가운데 어느 고비를 만날 때마다, 그 날 그 날 현실이 때론 암담해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싶은 그런 때마다 속으로 되뇌던 말이 있다. 시간 빨리 가라. 얼른 여행 가게.
그렇게 친한 친구들과 가기로 한 여행 하나만 목 빠지게 기다리며 작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떠난 여행지는 지난 몇 년 간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찍어서 별스러울 것도 없는, 태국이었다.
'여행 가자' 했을 때부터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가득했다. 태국을 1년에 한 번씩 갔어도 일로 갔지, 온전히 놀러만 간 적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어디면 어때. 좋은 사람과 좋은 목적으로 가는 게 중요한 거지. 이미 가 본 여행지를 또 가면 그전에는 몰라서 안 보이던 것들이 또 보이기도 하기에, 간 곳 또 가는 거 원래 좋아하기에 아무렇지 않았다. 그저 좋았다.
여행의 묘미는 여행지에서 느끼는 기쁨에도 있지만 두근두근 즐겁게 준비하는 시간에도 있다. 우리는 가이드북을 하나씩 사서 꼼꼼하게 이것저것 알아보며 대강의 계획을 짜고 지도에 동선을 슥슥 그렸다. 본래가 계획적인 인간들은 아니었고 그래서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일단 밑그림은 갖고 거기서부터 유동적으로 움직이려는 심산이었다. 아는 곳과 알지 못하는 곳, 조용한 거리와 화려한 거리를 넘나들며 선을 긋고 고치고 하며 즐거워했다.
둘 다 일정이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주의였기에, 정작 세심하게 맞춘 건 따로 있었다. 오랫동안 친한 친구였던 만큼 그간 서로의 적당한 거리를 알음알음 잘 유지해왔지만 그래도 여행지는 다를 수 있으니까. 우리는 서로 좋은 건 좋다고 싫은 건 싫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서로를 배려한답시고 먹고 싶은 걸 놓치거나 하기 싫은 걸 억지로 하지는 않기로.
여행은 즐거웠다. 멋모르던 사춘기 시절부터 오래 함께해 온, 그러면서도 한 번 싸운 적 없는 친구였다. 셋이 가려다 한 명이 같이 못 가게 된 건 너무 아쉬웠지만 여행 자체는 마냥 행복했다. 우리는 잘 먹고 잘 걷고 잘 잤다. 음악도 듣고 사진도 찍고 많이 웃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자의 성지라는 카오산 로드도 처음 가 보았다. 우리는 대체로 호불호가 선명하고 또 그 취향이 대체로 비슷한 편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둘 다 카오산 로드에 대해서는 좋다 싫다 말하기가 어려웠다. 우선 사람이 복작복작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카오산 로드는 사람으로 미어터지는 곳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던 부산스러운 거리의 상인들, 서양인의 비율이 월등히 높아 여기가 외국이라는 점이 기묘하게 실감나던 인파, 그 북새통에서도 거리 한복판에 누워 마사지를 받으며 눈을 감고 있는 사람들, 물건을 들이밀며 흥정하는 사람들, 좋지 않은 음향에 어설픈 실력이지만 어쩐지 더할 나위 없게 그곳에 어울리던 밴드와 그 앞에서 맥주를 홀짝이는 사람들. 그 길의 한쪽 구석에 있던 수많은 헌책방에는 손때 묻은 책이 어디서부터 와서 또 어디로 흘러갈까. 그리고 마치 카오산 로드에 두 달은 앉아 있었던 것 같은 느낌으로 나른하게 걸어다니며 우리와 눈을 마주치던 사람들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 걸까.
카오산 로드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고 유쾌함과 불쾌함이 섞여 있었고,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은 제법 훌륭한 한국말을 끊임없이 쏟아냈고, "예뻐요"나 "사랑해요"가 대부분이었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은 싸구려 바닐라맛 아이스크림을 코코넛 과육이랑 같이 담아주는 정도라 기대치와 거리가 멀었지만, 연유를 듬뿍 담아 바나나와 얹어 먹은 로띠는 훌륭했다. 불그스름한 조명 아래 꽃무늬 테이블보를 씌운 탁자를 다닥다닥 붙여 놓은 길가 카페에서 이번 여행 첫 팟타이를 먹었는데, 거의 떡이 되어 나왔다. 피곤해서 눈을 반쯤 감은 채로 앉아서 먹은 그 팟타이가 나는 나쁘지 않았다.
너는 여기가 어때? 나는... 잘 모르겠어. 싫다기엔 싫지 않고 좋다기엔 좀... 내 취향은 아닌데 아무튼 좀 그래. 이상해. 이 길의 무엇 때문에 우리는 취향이 아닌 것들 사이에 앉아서도 이 길이 싫다고 단호하게는 말을 못 하겠는 걸까? 그 이상함을 알기 위해 우리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기 전 마지막 밤 애매하게 뜨는 시간에 카오산 로드로 향했다.
다시 찾은 카오산 로드는 저번보다는 좀 한산했다. 요전번에 "한국 분이세요?" 묻더니 자기도 친구랑 둘이 왔는데 맥주 한 잔 같이 하자고 서툴게 말을 붙이며 따라오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아주 혹시라도 또 볼 까봐 불편했는데 다행이었다.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팔며 제법 유창한 한국말을 하던 소년은 팟타이를 팔고 있었다. 내일은 또 무엇을 팔려나. 이번에는 소년의 음식을 팔아 주지 않았지만 먼발치에서 소년을 보며 살풋 웃었다. 야무지고 똑똑하니 어디 가서 뭘 하든 잘 해낼 것 같은 아이였다.
좋아했던 로띠는 한 번 더 먹었고, 너무 배가 불러 식사는 하지 않고 꼬치만 하나 시켜놓고 앉아 우리는 이번 여행이 어땠는지, 여기가 어땠는지 찬찬히 생각했다. 내게 제일 좋았던 곳은 방콕보다 도시 외곽의 휴양지 리조트였고, 4박 5일이 짧은 시간 같지는 않은데 너무 시간이 없었고, 그리고 카오산 로드는...
카오산 로드에서 나는 몇 년 전 찾았던 바라나시를 떠올렸다. 크지 않았던 기대마저 산산이 부서졌던 곳. 네이버 블로그마다 극찬 일색이었던 라씨는 정말 더럽게 맛이 없었는데 그건 내가 집에서 애들 준다고 디디들이 열심히 만든 라씨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터무니없는 교통비에 기함을 하면서 오토릭샤 기사와 바락바락 싸운 건, 기본 요금과 거리 대비 요금에 거의 정확한 감을 갖게 된 몇 달 간의 인도 생활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그곳이 그로테스크하고 싫은 와중에도, 이 바글바글 생지옥 같은 풍경이 누군가에게는 인도의 환상에 부합하는 곳, 재미있고 즐거운 곳일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카오산 로드도 태국에 오래 사는 사람들 눈에는 별 거 없고 터무니없는 곳이겠지 생각했다. 처음 갔을 때 코코넛 아이스크림을 팔던 소년이 팟타이를 팔고 있는 걸 보며 그 생각을 확인했다.
현지에 사는 사람과 여행자의 눈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 소년의 직무가 코코넛 아이스크림과 팟타이와 내일은 또 다른 무언가를 파는 거라면, 낭만을 발굴해 내는 것이 여행자의 직무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그 시끄럽고, 나의 보편적 취향에 맞지 않고, 그래서 좋다는 말로 담기엔 무리가 있는 카오산로드가 싫지만은 않았다. 바라나시와는 달리.
가는 곳마다 비슷한 보폭으로 같이 낭만을 캐내는 좋은 친구와 함께여서 더욱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