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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이정 May 10. 2024

꼭 편지할게요 내일 또 만나지만

이젠 조용히 내 마음을 드려요

  나는 여행지에서 마그넷도 사지 않고 스타벅스 머그컵도 사지 않는다. 냉장고에 다닥다닥 붙여놓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머그컵은 너무 무겁고 자리도 많이 차지하니까. 늘 빠듯한 무게의 짐을 겨우 들고 다니는 내게는 사치에 가까웠다. NGO에서 일을 하는 지금의 내게는 '해외' 뒤에 붙는 말이 '여행'보다는 '출장'일 때가 훨씬 많아, 여행 자체가 사치에 가까워졌지만.


  아무튼 여행이든 출장이든 일정을 다 마치고, 비행기를 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으면, 나는 카페에 앉아 작은 일기장을 펴고 그 여정의 소회를 기록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구글 맵을 켜서 'supermarket' 그 다음엔 'stationery'를 검색했다. '문구점'을 뜻하는 stationery의 스펠링은 왜 올 때마다 쓰면서 번번이 헷갈리는지, 사이에 네이버 영어사전 확인을 한 번 해줘야 하긴 하지만.



  슈퍼마켓이든 문구점이든 가면 나는 꼭 연필을 샀다. 사실 굳이 외국까지 가서 사 오지 않아도 이미 내 책상 서랍엔 연필이 가득하다. <아무튼, 연필>을 읽고 나서부터 연필을 쓰는 삶을 동경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세가 사람 잡는다. 정작 어린 시절에도 연필은 금방 뭉툭해져서 싫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줄곧 샤프펜슬을 썼는데. 그러나 그 시절에도 연필이 사각사각 굴러가는 소리나, 그때 연필심이 닳아 없어지는 것을 들여다보는 건 좋아했다. 나무와 흑연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녹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쩐지, 이 지구의 무수한 물질 가운데 일부를, 내가 써서 없애고 있다는 감각을, 했다. 그건 막연한 연결의 감각이었다.


  요즘은 그 연결의 감각을 좀더 명확히 하고자 연필을 산다. 출장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쥐고 있던 연필들. 서툴게 깎여 있거나 가끔은 뒤를 물어뜯어 놓기도 한 연필과 똑같은 것을 한 타 사들고 돌아온다. 그러다 옆에 흥미로운 종이가 보이면 같이 산다. 연필의 짝꿍은 종이니까. 작은 노트일 때에도, 심지어 영수증 책 같은 것일 때도 있다. 흥미롭게 생겼으면 산다. 그렇게 책상 서랍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다.


  이번에도 그렇게 뭘 좀 사올 참이었다. 게다가 이번은 정말 모처럼, 출장이 아니라 여행이었다. 수제 종이로 유명하다는 지역이었고, 연필과 종이를 잔뜩 파는 가게를 기어코 찾아서 노트와 연필을 바삐 뒤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후원자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동료에게서 편지 모임을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다. 왜 하필, 이런 지역에서, 이런 가게에서, 이런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이런 연락을 하신 거죠? 운명처럼 느껴지게 말이에요. 두 말 없이 곧장 하겠다고 했다.



  편지에 대한 나의 사랑은 역사가 깊다.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끝나고 남은 OMR 카드를 선생님이 대강 나눠주시면 다른 아이들처럼 수학 문제 푸는 연습장으로 쓰는 대신 "종이가 두껍고 좋다. 너 OMR 카드에 편지 받아본 적 없지?" 그러면서 카드 뒷면에 친구 줄 편지를 쓰던 아이였다.


  편지로 쓴 소설 <A가 X에게>를 너무 좋아해서, 여태까지 한 10권 샀다. 친한 사람에겐 친해서, 안 친한 사람에겐 안 친해서 참 많이도 선물했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는 편지 빼고 논할 수 없는 영화 <러브레터>. 심지어 가끔 영화 리뷰도 편지 형식으로 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글이 되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일하고 있는 이 기관과도 편지로 인연을 맺었다. 한비야 선생님의 책을 감명 깊게 읽은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후원을 신청했고, 지구 어딘가 후원아동과의 정다운 교류를 꿈꾸며 사전 뒤져 짧은 영어로 열심히 편지를 썼지만... 잠비아인지 말라위인지 아프리카 어딘가의 다섯 살 아이는 회색 마분지에 동그라미처럼 보이는 것 하나 정도를 그려 보내주었다. 음... 귀엽지만 우리 깊이 있는 대화는 어렵겠구나, 친구야.


  그러던 어느 날, 소식지 한켠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아이에게, 부쩍 외로움을 타는 것 같은 아이에게, 편지를 써주실 분을 찾는다는 한 사회복지사 분이 내신 광고였다. 편지를 받아 줄 곳이 있다니. 편지도 쓰고, <어린왕자> 책도 하나 사서 보내고, 그랬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편지를 자주 쓴다. 친구 생일에, 오랜 여행을 떠나는 사람을 만날 때, 위로가 필요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돌아온 날 밤에,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유가 다양해 보이지만 실은 하나다. 말로 하기 어쩐지 낯뜨거운 마음도 편지에는 자연스럽게 녹아드니까. 마음을 전하기에 편지는 참 좋은 수단이다.


  그런 편지를 받으면 마음이 든든했다. 국밥 잔뜩 먹고 난 뱃속처럼. 이 온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느끼면 좋겠다. 편지라는 말은 어쩐지 정성의 동의어가 되면서 아주 잘 써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럽게 느낀다면, 그렇지 않다고 꼭 말하고 싶다. 편지는 국밥이라고요.


  내가 가장 아끼는 편지 또한 포스트잇 하나에 아빠가 샤프펜슬로 적어준 '사랑한다', 이름까지 총 일곱 글자 짜리 편지다. 오래 전 내가 인도에 살던 시절, 눈 내린 겨울 마을에서 엄마가 두 장에 걸쳐 구구절절 쓴 편지 끝에, 아마도 엄마의 채근 끝에 적었을 일곱 글자는 지금도 내 지갑에 고이 접혀 들어 있다.


  귀엽고 깜찍한 편지지 고르지 않아도, 글씨 예쁘게 또박또박 쓰지 못해도, 길고 멋진 문장 유려하게 쓰지 않아도. 편지는 그저 편지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은은한 힘이 된다는 걸. 마음 흐린 날 기댈 곳이 되어 준다는 걸. 그걸 더 많은 사람들이 알면 좋겠다.



  눈치 채셨는지. 사실 이 글도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 모임에 초대해요. 얼굴 맞대고 만나 편지에 대해 다정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또 편지를 써보아요. 인생 내내 편지에 진심이었던 사람이, 잔뜩 부풀어 있는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며,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월드비전 후원자 대상 모임이에요. 혹시 당신의 통장에 자동이체 하나가 걸려 있다면, 잠비아인지 말라위인지 어딘가에 사는 후원아동이 있다면, 오세요. 혹시 없는데 너무 오고 싶다! 하시면 시작하시기에도 좋은 기회랍니다. 5월 한 달 동안 다정한 편지로 우리 같이 만나요.


https://project-orange.vake.io/commerce/products/CP:3RCV9FW549DDG


**5월 모임은 끝이 났지만, 월드비전 후원자 커뮤니티 '오렌지농장'은 7-8월 두 달의 여름방학을 보내고 9월에 다시 돌아옵니다. 그때 또 무슨 모임이 등장할까요?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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