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의 일기
오사카에서 4년을 지내면서도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일기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낯선 곳에서 나는 아침의 그 시간들에 더 몰두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의 생활이란 처음의 기대와 들뜸을 빼고 나면 피곤한 부분도 많다. 그 피로를 눈 녹듯 녹여주었던 일본에서 만난 내 친구 에짱, 그녀와 있었던 일에 대한 일기다.
*작년 연말 어느 저녁, 유독 추운 날이었는데 낮 동안의 외출이 피곤했던 나는 잠시 누워있었다. 몸만 피곤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즈음의 나는 좀 울 것 같았다. 누구와 어디에 있던 언어 때문에 사소한 피곤이 쌓이곤 했다. 나는 여행 중이 아니므로 ‘한 권으로 배우는 일본어 기초 회화’에 나오는 것보다 훨씬 다양한 말들 속에 살고 있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매일 새로운 단어들을 듣게 된다. 그때마다 의미를 묻거나 눈치로 때려 맞히거나 그렇게 내가 대화의 80%를 이해한다고 해도 나머지 이해하지 못한 20% 때문에 종종 문제가 생기곤 했다. 내가 놓친 말들을 되물으며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일은 일상이었고, 상대방의 말을 오해해서 엉뚱한 수고를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미안, 그건 무슨 뜻이야?’, ‘이렇게 하라는 거 아니었어? 어, 미안.’, ‘늘 신세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친절하게 알려줘서 고마워.’
정말이지, ‘미안해’와 ‘고마워’의 세계가 지긋지긋했다. 어느 날은 고등어를 구워 먹으려고 했는데 방사능 때문에 수산물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에 진공 팩에 든 비싼 물건을 원산지 꼼꼼히 따져 사왔더니 스시용 생선이라 다시 가서 바꿔 온 적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고등어를 바꾸러 가면서 ‘이건 참 너무 바보 같잖아.’하는 생각에 피곤해졌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유독 추웠던 날, 약속이 있었다. 나는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먼저 나가 점심도 거른 채 아이의 유치원에 보낼 어떤 물건을 열심히 찾아다녔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물건은 살 필요가 없는 것이었고 친구들을 만나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나는 정말로 울고 싶었다. 점심을 걸렀으면서도 먹었다고 둘러대야 했던 일이나 추운데 한 시간이나 헛고생을 했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하나씩 보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들이, 그러니까 고등어를 잘못 사와서 바꿔야 했던 일처럼 사소한 일들이 자꾸 쌓이다 보니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일도 마음에 남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대로 누워버린 나는 ‘역시나 바보 같아. 진짜 피곤하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깜박 잠이 들었다.
그러다 벨 소리에 잠이 깼다. 깜짝 놀라 나가보니 에짱이 서 있었다. 에짱은 그날 만났던 친구 중 한 명이었는데 헤어진 지 채 두 시간도 되지 않아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에짱을 보니 어쩐지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연락 없이 와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건넨 에짱은 현관에 선 채 불쑥 선물만 건네주고 바쁘게 돌아갔다. 잠결에 에짱을 맞고 보내느라 어리둥절했던 나는 뒤늦게야 고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일 년 간 애쓴 써니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답장이 왔다. 확 눈이 뜨거워졌다.
한국에 있었으면 하지 않아도 될 사과의 말들과 들이지 않아도 될 수고가 이어지면서 피로가 차오른 건 사실이었지만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때그때 주어진 대로 생활했을 뿐이다. 그런데 에짱의 문자에 1초의 틈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걸 보고 그동안 애썼던 거였구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애쓰고 있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들의 나에게 애썼다고 말해준 에짱 덕분에 나는 거짓말처럼 정말로 괜찮아졌다. 피곤하고 엉성했던 시간들이 헛된 것이 아니었구나. 에짱의 한 마디는 일 년 동안의 나를 감싸 주었다. 그것은 물 위에 떨어진 빗방울처럼 작은 듯 보이지만 멀리멀리 퍼져나가는 그래서 점점 커지는, 그리고 무엇보다 아주 따뜻한 위로였다.
에짱의 한 마디는 내 마음으로 성큼 들어왔고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다. 사랑받고 있다는 그 기분은 나를 굉장히 안심시켰는데 그 평화로움은 행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날, 우리 집 현관 앞에 서 있던 에짱의 조금 쑥스러워하던 모습, 찬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오느라 빨개진 뺨과 코, 그러면서도 활짝 웃던 얼굴, 서둘러 돌아서던 에짱의 뒷모습,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흔들어주던 손, 모두 잘 기억하고 있다. 어쩜.
에짱의 마음 덕분에 나는 또 무사히 강 하나를 건넜다. 에짱에게 받은 마음, 잘 간직하고 키워서 나도 누군가에게 성큼 다가가 건네주어야지 다짐했다. 온기는 혼자 만들 수 없는 것, 함께 품고 어루만져주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혼자여서는 안 되는데, 실은 내가 온기를 품고 너를 떠올리고 있으니 너는 혼자가 아니다. 언젠가 너에게로 성큼 다가설 그날까지, 지금도 애쓰고 있을 너에게, 이것은 빗방울을 닮은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