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리허설이 없지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by 박선희
그는 한없이 자책하다가 결국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수정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테레사와 함께 사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혼자 사는 것이 나을까?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 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렇기에 삶은 항상 초벌 그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초벌 그림>이란 용어도 정확지 않은 것이, 초벌 그림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밑그림, 한 작품의 준비 작업인데 비해, 우리 인생이란 초벌 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 그림이다.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요즘엔 책을 사거나 빌릴 시간이 없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내키는 대로 골라 다시 읽고 있는데 기억 속의 인상과 다를 때가 많아 자주 놀란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있는데 예전에 읽을 때 그어놓은 밑줄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간혹 메모도 해놓았는데 아무리 봐도 왜 그었는지 알 수 없는 곳만 골라서 밑줄을 그어놓았다. 지금 다시 밑줄을 긋는다면 나는 전혀 다른 문장들에 표시를 해 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밑줄을 긋는 대신 책의 모서리를 접어둔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의 거리가 나쁘지 않다. 다시 읽으며 내가 접어둔 최초의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테레사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존재가 벅찬 토마스는 어떤 것이 좋은 선택일까 고민하다가 실제로 선택하고 살아보기 전까지 그 선택이 좋은지 아닌지는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한 선택이 좋은 선택이었는지 아닌지는 선택의 순간에는 절대 알 수 없다.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 살아봐야,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다. 모든 선택은 처음이니까, 한 번도 걸어 본 적 없는 걸음이니까.


우리의 매 순간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닮은 것은 있어도 어떤 것도 똑같지 않고 절대 두 번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못하고 무대에 오르는 배우처럼 살다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죽을 때조차, 죽음이야말로 정말 리허설이 없지. 죽기 직전에 숨은 막히는데 아 시팔, 이럴 때 숨은 어떻게 쉬는 거야, 이런 거 처음이라 알 수가 있나 막 당황하다가 가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이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리허설 없이 오르는 무대라니 배우에겐 그 자체가 하드코어다. 사실은 모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어쩔 줄 모르는 채, 마치 리허설을 한 번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니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당신의 서투름이나 이기심 그리고 당신의 선택을.


그리고 나는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의 자세에 대해 생각한다. 리허설 없이 무대에 오른 배우가 무대를 즐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대를 예측하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자신을 믿고 흐름에 맡겨. 자신을 믿어. 그리고 무대의 흐름을 타고 눈앞에 벌어지는 사건들에 집중해.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는 거다. 고민하지 말고, 예측하지 말고 지금을 하나씩 하나씩. 그러다 보면 어느새 연기력 만렙의 고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러나 저러나 연기력 만렙의 고수는 아직 요원해 보이니, ‘한 번 일어나는 일은 중요치 않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문장의 유효기간이 끝날 때까지 되는대로 닥치는 대로 가볍게 살기로 한다.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키는 대로 굴지, 리허설이 없었는 걸, 내 잘못은 아니야, 인생 정말 하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