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당신 앞에는 무한한 자유가 펼쳐져 있습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향기를 내뿜는 대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대지를 즐기세요. 겁내는 자는 아무것도 즐기지 못합니다. 그러니 두려움을 떨쳐버리세요….증오는 인간의 정신력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망가뜨립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똑같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낭비는 아무에게도 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오래 앉아 있지 말고, 수면은 정확하고 빠르게 하세요. 할 수 있습니다. 더위가 괴로우면 지나치게 그것을 의식하지 말고 대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척 행동하세요….누군가 당신에게 예의를 갖춰 선물을 한다면, 그냥 받아들이면 됩니다. 하지만 반드시 예의를 갖춰서 받으세요. 모든 순간을 음미하고,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학식 높은 사람들의 지적인 말보다는 당신 자신의 마음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가능하면 학자들은 피하도록 하세요.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그들은 대개 비정하기 때문입니다. 웃고 장난칠 기회를 최대한 많이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당신은 더 아름답고 더 진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설사 힘든 일이 많더라도 만사를 항상 밝게 받아들이세요. 우아하게 차려입으세요. 그러면 존중과 사랑을 얻습니다. 돈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감각적으로 신경을 쓰면 됩니다.
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모든 말이 마음에 들지만 그중에서도,
대지는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 되기를 원합니다.
겁내는 자는 아무것도 즐기지 못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더위가 괴로우면 지나치게 그것을 의식하지 말고 대신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척 행동하세요.
학식 높은 사람들의 지적인 말보다는 당신 자신의 마음과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합니다.
웃고 장난칠 기회를 최대한 많이 만들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당신은 더 아름답고 더 진지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산책자>를 읽을 때 저 대목들이 정말 좋았다. 잊지 않으려고 몇 번이나 읽었다. 더워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척해야지, 겁내지 말아야지, 장난도 많이 치고 많이 웃어야지 그런 생각을 했다. 더워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척,이라는 대목을 읽을 때면 매번 웃음이 났다. 그런데 그래도, 아무리 좋아도 시간이 지나면 저 좋은 구절들도 모두 잊게 된다. 그게 그렇게 되고 만다.
잊지 않으려고 해도 잊게 되는 게 우리의 삶이니까. 며칠 전엔 오랜만에 집에서 혼자 고요하게 시간을 보냈다. 라면을 끓여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목욕도 하고 틈틈이 혼잣말을 했다. 머리가 많이 길었네, 음 좋아, 너무 맛있겠어, 날씨가 정말 좋네. 별말 아닌 혼잣말을 내뱉는데 그 시간이 퍽 충만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하고 책장 앞에 섰는데 제목을 쭉 훑다 그런 생각을 했다. 너희들은 내 안에 들어와 무엇이 되었니. 연을 쫓는 아이, 사막 식당, 좁은 문, 라쇼몽, 거미줄, 산책자, 너희들은 내 안에서 무엇이 되었니. 분명 내가 들어갔던 세계들인데 기억이 희미해서 불쑥 그런 물음이 떠올랐다. 이게 그러니까 이렇게 되고 만다니까.
그렇게 책장 앞에 서 있는데 곧 빙그레 웃음이 났다. 선명하게 새겨지지 않았대도 흘러갔대도, 분명히 내 안에 남아 마음을 지켜주는 낮은 기둥들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낱낱이 기억하지 못한데도 그 세계들은 이미 나를 한번씩 들었다놓았다. 그 세계들을 통과하며 나는 한번씩 흔들렸고 그때마다 나를 조금씩 재배열했다. 그러니 사라지지 않고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을 것이다. 어제의 내가 오른쪽이 아닌 왼쪽의 골목으로 들어서게 만들었을 것이다. 나의 선택에 좀 더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어도 좋아. 아름다웠다.
내가 들어갔던 세계들과 내 안에 남아있는 세계들을 떠올렸다. 두말할 것 없이 멋지다. 시간이 흘러 설령 잊게 된대도, 그게 그렇게 되버리고 만대도 역시 읽기를 멈출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