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특강 / 문장의 기술] 크리티카의 인문학 에세이 中
글쓰기의 실용성에 대한 이의제기
글쓰기가 업(業)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글을 쓰는 이유가 실용성 때문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에 관한 책과 강의로 유명한 어느 작가도 말했듯이, 글쓰기에 타고난 재능이 있지 않는 이상 대개의 사람들은 성실하게 글쓰기 근육을 키워 적당히 산문을 쓰는 정도만으로도 훌륭하다는 식의 충고가 상식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난 이 상식에 대해 조금 딴지를 걸고 싶다. 글의 실용성은 글쓰기가 갖는 효능 중 일부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잘 쓰게 만드는 지속적이고 강한 원동력은 될 수 없다고 말이다.
훌륭함에 대한 쾌감과 욕망
사교육계 강사였다가 훗날 입시 사이트 사업가로 유명해진 혹자는 한때 수능 공부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다들 수능을 마치 저돌적으로 열심히만 공부하면 좋은 점수를 맞는 시험처럼 생각하는데, 실제 대입에 성공하는 애들은 수능 공부 자체에 재미와 흥미를 느끼는 부류다”라는 식의 발언이었다. 난 이 말이 글쓰기를 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통용되는 일종의 잠언(箴言)이라고 본다. 글쓰기는 기계적으로 운동하듯이 연습한다고 완성되는 능력이 아니다. 세상에 뿌려진 숱한 글 중에서 멋지고 진실 된 표현들 하나하나에 쾌감을 느끼고, 본인도 그러한 표현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즐기듯이 글쓰기 방법론을 탐닉하는 자가 비로소 좋은 글쓴이도 될 수 있다. 재미와 흥미를 느껴야만 지난한 글 연습 과정을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과 승화로 글 연습하기
내가 개인적으로 잘 아는 명문장가 한분이 계신다. 한번은 그로부터 본인이 문장력을 어떻게 키웠는지에 관해 얘기한 걸 들을 일이 있었는데, 제법 귀감이 되는 바가 있어 기억을 살려본다. “어릴 때부터 좋은 문장과 문구, 단어들을 보면 늘 메모를 해뒀다. 책이나 잡지에서 본 것이든, 방송 미디어의 그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에 학교 과제를 하거나 개인적인 취미로 글을 쓸 때마다 그를 인용하거나 내 방식대로 응용해 바꿔써보곤 했다. 생각해보면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훌륭한 문장‧문구‧단어를 조곤조곤 내 안에서 읊조리고 맛볼 때 그 묘한 쾌감이 좋았고, 그런 것들을 내 것으로 승화해 표현했을 때 내 글이 전과 달리 한층 다른 차원으로 격이 상승되는 것 같은 그 기분을 즐겼다. 주위의 칭찬과 부러움도 내 글쓰기의 자존감을 강화하는 데 주효했다. 그리고 이렇게 소소한 재미와 흥미들이 쌓여 내가 더 나은 글쓰기 방법을 욕망하도록 나를 부추겼고, 그와 같은 욕망에 때때마다 충실히 답해온 결과 대단치는 않더라도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글 실력과 말 재주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글쓰기에 유미주의(唯美主義)는 있을 수 없다
나는 예술과 기술이 별개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교와 기능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다. 가급적 ‘남다른’ 표현력을 갖고자 하는 탐미적인 욕구가 있고 그를 꾸준히 지향했을 때, ‘못해도 범상한 수준’의 표현력이나마 가질 수 있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도 없을뿐더러, 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지향점이 높고 깊을수록, 연습을 거듭했을 때 최소 평균 내외의 위치와 내공을 얻을 수 있다. 평균을 지향하면 평균 미만이 된다. 아름다운 글쓰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이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용성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적어도 글과 말은 확실히 그렇다. 글과 말은 소통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글과 말이 독자와 청자에게 멋지게 들렸다는 뜻은 그 표현의 화려함 이면에 진실 된 메시지가 내재해있다는 얘기이다. 진실 된 뜻은 널리 회자된다. 소통에 성공한다. 명문장은 뜻도 명품일 때 명문장이다. 따라서 ‘쓸데없이 예쁘기만 한 글‧문장‧문구’는 모두 언어도단이다. 美만 추구한 글은 진짜 美도 아니고, 진짜 글도 아니기 때문이다. 몸의 근육을 단련하면 아름다운 몸이 만들어지듯, 글쓰기 근육을 키우는 일도 이와 매한가지다.
조금은 느슨하게 목표를 설정하기
그래서 글쓰기를 연습하기로 다짐하고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지향점에 한계를 긋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일례로 “나는 단문(短文) 위주로 군더더기 없는 글만 쓰려니까, 화려한 수식과 만연체 등의 장문(長文)은 삼가겠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실제 쓰이는 산문들을 쓸 작정이니까, 詩나 소설 같은 감성적인 문학류는 다소 멀리하겠다!”, “일상의 감성과 생각을 내 의지대로 표현해보고 싶으니, 사회과학·자연과학 서적들보단 인문학 책들을 보며 글 감각을 키워야지!”, “어차피 내가 글쓰기의 달인이 될 리 만무하니까, 평이한 문체의 글을 보고 따라 연습하겠다!” 등등 이처럼 지향점에 한계를 미리 설정해버리면 자신의 쓰기 능력 향상에도 반드시 한계가 있다. 단문에도 장문에도, 인문학류의 글에도 사회·자연과학류 글에도, 달인의 문장력에도 필부필부의 그것에도, 타자에게 울림을 주는 속칭 좋은 표현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각각의 좋은 표현들은 글의 장르와 문장 형식을 넘나들며 상호 교환될 수 있다. 본인에게 쓸모 있는 것들만 영리하게 챙기고 싶은 심리는 이해하지만, 되레 본인의 글쓰기 경험치만 저해시킬 뿐이다.
유희와 쾌락의 시작은 표현력에서부터
그래서 일단은 글의 장르나 문장의 종류를 불문하고 최대한 자신이 쾌감을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좋은 표현들을 챙겨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욕망의 영역에 우선은 제한을 풀어두는 것이다. 앞서 소개한 그 분 말따나, “훌륭한 문장‧문구‧단어를 조곤조곤 내 안에서 읊조리고 맛볼 때 그 묘한 쾌감”을 야금야금 깨달아가고, “그런 것들을 내 것으로 승화해 표현했을 때 내 글이 전과 달리 한층 다른 차원으로 격이 상승되는 것 같은 그 기분을 즐”길 줄 알아야 계속해서 글쓰기를 연마할 수 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주위의 칭찬과 부러움”도 얻을 테고,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는 욕망에 관성이 붙는다. 그땐 비로소 누군가가 말려도 스스로 알아서 더 좋은 표현을 갈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