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1969년산 앨범 커버
현재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1969년산 앨범 커버
* 이 글은 이동규 작가가 시민기자 자격으로 언론사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글의 원본입니다.
횡단보도를 걷는 네 남자
내가 아주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비틀즈 전집이 LP로 있었다. 음악광이던 아버지가 한 장 한 장 모아놓은 것들이었다. 가끔씩 LP 몇 장을 한꺼번에 꺼내서 바닥에 깔아놓은 뒤, 큼지막한 사각형에 그려진 앨범 표지들을 물끄러미 감상하고는 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앨범이 있었다. 멤버 4명이 일렬로 줄을 서서 쪼르륵 횡단보도를 걷고 있는 사진이 새겨진 커버였다. 게다가 멤버 중 한명은 맨발인데다 한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다. 4명 모두 하나같이 표정은 심각했고, 분위기는 고요한 것 같기도 하고 냉랭한 것 같기도 했다. 기이하고도 특이한 광경이었다. 게다가 표지 어디에도 앨범의 이름은 없었다.
<Abbey Road>. 아주 나중에 글을 조금 배우고 나서야 이 LP 이름이 <애비 로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앨범 커버가 비틀즈 앨범 중에서 뿐만이 아니라, 팝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힐 만큼 유명한 사진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런던 속 비틀즈의 흔적을 찾아
애비 로드는 영국의 런던에 실존하는 도로 이름이다. 앨범 커버 속의 도로명이 애비 로드인데, 당시 비틀즈가 한창 해당 앨범을 녹음하던 스튜디오가 횡단보도에 인접해있었다. 그때가 이미 멤버들끼리 불화가 심해져서 다들 해체를 예감하고 있던 탓인지, 사진 찍기가 귀찮다는 이유로 그냥 스튜디오 앞에서 얼른 촬영한 것이라는 후문이 있다.
아버지 덕에 반 강제적으로 한때나마 비틀즈의 팬이었던 나는 훗날 런던을 여행할 일이 생기면 이곳을 꼭 한번쯤은 찾아가보고 싶었다. 사실 제대로 된 비틀즈 팬이라면 영국까지 놀러간 이상 그들의 고향인 리버풀을 찾아 잉글랜드 북서부까지 성지 순례를 해야 하겠지만, 세파에 닳고 닳아 신앙심이 1/5 정도로 쪼그라든 나에게는 그저 런던에 새겨진 과거 영웅의 흔적 정도를 찾는 것만으로도 성지 순례였다.
지하철 ‘세인트 존스 우드(St.John’s Wood)’ 역에서 내려 ‘그로브 엔드 로브(Grove End Rd)’를 따라 걸었다. 아침에 폭우를 쏟아내서 마치 오늘 할 일을 다 했다는 양 그날 10월의 런던 하늘은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쾌청했다. 왕복 2차선 도로를 사이에 끼고 거리 양 옆으로 황갈색 벽돌 건물들이 고즈넉하게 늘어서 있었다. 개중에는 데스몬드(Desmond)와 몰리(Molly)의 두 아이가 뛰어다니며 ‘오브라디 오브라다(Ob-La-Di, Ob-La-Da)’를 외칠 것 같은 조그만 정원 집도 있었다.
성스러움과 속세가 교차하는 혼돈의 명소
그렇게 고요하고도 냉랭한 공기를 헤치며 걷다보니 어느덧 애비 로드와 이어지는 삼거리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껏 조용하고 잔잔했던 분위기가 일순에 바뀌는 느낌이었다. 이제껏 걷는 동안 사람이라고는 몇 명 구경도 못했는데 목적지 즈음 도착하니 이미 약간 멀리서도 “아! 저곳이 ‘애비 로드 스튜디오’ 근처구나”하고 직감할 정도였다.
횡단보도 양 끝에 옹기종기 모여서 웅성거리는 사람들, 혼자서 혹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앨범 커버처럼 횡단보도를 걷는 관광객들과 그들을 찍어주는 일행, 이제나 저제나 언제 횡단보도를 건너야 ‘인생 샷’을 건질 수 있을지 호시탐탐 기회를 탐색하는 이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진 찍는 데 늑장을 부리는 얌체들에게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들 등등, 방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들썩임이 그토록 짧고 조그마한 공간 안에 한껏 밀집해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래도 명색이 영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락 밴드의 성지가 예상외로 매우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공간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비틀즈의 앨범 커버를 재현하고 싶어서 먼 곳까지 여행 온 이방인들과, 그저 출퇴근을 하거나 인근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늘 애비 로드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지인들이 묘하게 신경전을 벌이는 장소였다. 전자에게 애비 로드는 일종에 ‘성역’ 또는 ‘특별체험의 장’이라면, 후자에게 그것은 런던 내의 여타 일반적인 도로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상물’이나 ‘짜증나는 거리’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셈이다.
종교학의 거장 엘리아데의 개념을 인용하자면 애비 로드는 ‘성과 속’(聖과 俗, Scared and Profane)이 공존하는 관광 명소다. 마치 팔레스타인 지방의 일개 하천에 불과했던 요르단 강이 예수가 그곳에서 세례를 받은 뒤 ‘요단 강’으로 특별해진 것처럼, 일개 자동차 길에 불과했던 애비 로드가 비틀즈의 승은을 입은 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횡단보도로 신분상승을 한 것이다. 물론 본인이 그리스도인도 아니고 비틀즈 팬도 아니라면, 여전히 요단 강과 애비 로드는 그저 물과 콘크리트에 덩어리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살짝 멀리서 이 장관들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여기 애비 로드는 그렇게 ‘신성함과 세속성’이 그리고 ‘외부인과 내부인’이 서로 충돌하는 탓에 매일이 꽤나 떠들썩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장 체험으로 확인하는 ‘밈(Meme)’
흥미로운 점이 또 하나 있다. 관광객들은 하나같이 앨범 <애비 로드>의 커버를 제들 나름의 방식대로 모방하고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단시간에 온갖 사람들의 다양하고도 개성 있는 패러디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싶다면 애비 로드만큼 좋은 곳도 드물 듯하다.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유전자의 속성을 얘기하기도 했지만, 책의 말미에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으로서 ‘밈(Meme)’이라는 것을 다소 짧게나마 소개했다.
그는 인간 세상에서 생존의 법칙에 맞춰 복제가 이뤄지는 것은 유전자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꾸려낸 온갖 ‘문화 요소’ 또한 마치 유전자처럼 스스로 적자 생존식의 복제를 거듭해나간다는 것이다.(후대 학자들이 이 복제의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다산성, 충실성, 장수성’이라는 개념도 개발했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일개’ 수필이니만큼 이렇게까지 복잡한 논의는 생략하도록 하자.)
흔히 인간 사회에서 누구나 알법한 ‘명제, 표현, 음악, 그림’ 등이나, 속칭 유행이라 불리는 ‘신조어, 패션, 놀이’ 등과 같은 문화 일체를 말한다고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베토벤 5번 교향곡 <운명>의 첫 소절 ‘빰빰빰빰!’이나, 누가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한 ‘헬조선’ 같은 신조어가 그 예다. 지하철 통풍구 위에서 하얀 드레스를 부여잡는 ‘마릴린 먼로’의 영화 포스터나, 지금도 열풍이 시들지 않는 ‘먹방’도 일례다. 위의 사례들은 모두 성공한 밈이라 할 수 있다.
여기 애비 로드는 비틀즈가 만들어 낸 밈의 망령이 살아 숨 쉬는 현장이다. 앨범 <애비 로드>의 커버는 1969년에 생산된 이래로 근 반세기 가량 꾸준히 전 세계의 사람들로 인해 복제에 복제를 거듭해나가는 중이다. 비틀즈는 해산했고 멤버였던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도 사망하여 더 이상 비틀즈는 현존할 수 없다. 그렇지만 앨범 <애비 로드>의 사진은 마치 독립된 유전자처럼 제 혼자서 비틀즈 매니아와 관광객들의 뇌 속에 기생하며 끊임없이 대를 이어나가고 있다. 밈 덕분에 비틀즈의 인생은 짧지만, 그들의 예술은 길어진 셈이다.
"Hello Goodbye", 비틀즈
난 결국 이러한 혼란의 도가니 속에 과감히 파고들어가 ‘인생 샷’을 남기지 못했다. 이유 역시 혼란했다.
20% 정도의 ‘팬심’을 가지고 이제 와서 알량하게 비틀즈의 충성스러운 팬인 것 마냥 그들의 성역을 기만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내 뇌 속에 자리한 문화 기생충이 시키는 대로 카메라 앞에서 애당초 잘되지도 않는 연기를 부러 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은 분노의 때로는 원망의 눈빛을 보내며 경적을 울릴까 말까 고심하는 운전자와, 그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관광객들을 전후 사방으로 세워놓고 유유히 도로를 가로지를 배짱이 없었던 듯도 하다.
그래도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도 없었다. 오히려 해체된 지 이제 곧 50년이 되어가는 와중에도 이렇게나마 그들이 전 세계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기 좋았다. 한때나마 영웅이었던 뮤지션들이 세월이 지나며 점차 쇠락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처럼 마음 쓰이는 일도 없을 텐데, 비틀즈는 여전히 건재한 듯해서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 무럭무럭 자라날 팝 키즈에게도 여전히 영웅이기를 바랄 뿐이다.
애비 로드에 왔다. 볼만한 광경, 훈훈한 풍경, 그거면 됐다. 잘 구경했다.
“안녕? 안녕! 비틀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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