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천득과 로버트 프로스트
북적이던 구정 명절의 소란함이 지나가고, 비로소 고요가 내려앉았습니다. 새 집에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시고, 이제 곧 이웃이 될 딸아이 가족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했던 마음을 가라앉히며, 저는 조용히 책 한 권을 펼쳤습니다. 뉴아티 글쓰기 북클럽 리더 미니린님께 선물 받은 피천득의 수필집,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입니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피천득이라는 이름은 익숙했으나, 그의 생애를 깊이 들여다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가 소개란에서 '영문과 졸업', '교사'라는 두 단어가 제 눈을 번쩍 뜨이게 했습니다. 3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어와 아이들 사이에서 분투해온 저에게, 그는 단순한 문학가를 넘어 친근한 대선배님으로 다가왔습니다.
급한 마음에 목차를 훑어 내려가다 제 시선이 멈춘 곳은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배철현 교수님을 통해 프로스트의 시론과 그가 지닌 고귀한 고독의 무게를 배웠던 저였습니다. 그의 시를 수없이 낭송하고 그 깊은 울림을 유튜브 영상에 담아 공유할 만큼, 프로스트의 시는 이미 제 삶의 일부였습니다. 그렇기에 피천득의 글 속에서 만난 그의 이름은, 낯선 곳에서 오랜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특히 놀라웠던 것은, 피천득 작가가 미국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와 직접 대화를 나누고 함께 공부하며 깊은 교감을 쌓은 사이였다는 사실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1, 2〉를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저는 전율했습니다. 교직의 선배이자 문학의 선배인 그가 전해주는 프로스트의 육성은, 책 속의 활자와는 전혀 다른 온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저 책으로만 접하던 거장 프로스트가 아닌, 직접 만나고 겪은 이가 들려주는 그는 훨씬 더 입체적이고 다정했습니다. "인생의 어느 길을 선택하든,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는 프로스트의 고백은, 정년을 3년 앞두고 새로운 삶의 전환점에 선 제게도 묵직한 위로로 닿았습니다.
제가 낭송했던 그의 시들이 피천득 작가의 유려한 산문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습니다. 영문학자로서의 날카로운 통찰과 수필가로서의 맑은 서정이 고루 깃든 그의 글을 읽으며, 저는 교직 생활 내내 추구해온 'CHaT(Chunk + Havruta + ThinkWise)'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떠올렸습니다. 결국 문학도 교육도, 삶의 파편들을 모아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지혜로운 생각을 빚어내는 과정이 아닐까요.
선물 받은 '고흐의 아몬드 나무' 자를 대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간 이 만남은, 단순한 독서를 훌쩍 넘어서는 시간이었습니다. 시와 산문, 그리고 삶의 인연들이 층층이 겹쳐지는, 경이롭고 고요한 오후였습니다.
이제 저는 다시 프로스트를 읽으려 합니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를 것입니다. 피천득이라는 따뜻한 창을 통해 바라본 프로스트의 숲은, 예전보다 훨씬 더 깊고 푸른 빛을 띠고 있을 테니까요.
시(詩)라는 인연의 숲에서 만난 두 거장-피천득과 로버트 프로스트 (글&낭독: 이 선)
https://youtu.be/G63QEr4gJdg?si=SxEnN4u7VZD55V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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