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근대를 향한 첫걸음

격동의 한반도

by 써니사이드업

19세기는 서구 사회에서 거대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정치·경제·사회 구조가 급격히 바뀌면서, 근대 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어요. 제국주의 열풍도 거세게 일어나 서구 열강들은 세계 곳곳을 점령하며 식민지로 만들었죠. 과학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다윈, 니체, 쇼펜하우어 같은 인물들이 등장해 기존 질서를 뒤흔드는 새로운 생각들을 쏟아냈습니다. 이렇게 근대라는 파도가 서구를 중심으로 요동치던 시기에, 안타깝게도 조선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었던 거예요. 내부의 혼란과 외세의 압력 속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서구사회와 조선 (출처: ChatGPT 생성 이미지)


그 뒤를 이은 일제 강점기는 한국 사회에 깊은 상처와 뒤틀린 유산을 남겼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배어 있어요. 서구 문화와 근대화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도시를 권력의 선전 도구로 삼는 발상, 지나친 서열 문화, 교육과 경쟁 중심의 풍토, 그리고 민족주의에 대한 집착까지―이 모든 것은 일제 강점기의 경험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결과였습니다.


1945년,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을 때 사람들은 기쁨에 벅찼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곧 한반도에는 이념의 경계선이 그어졌고, 한 민족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말았어요. 이어 한국 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으면서 나라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분단과 긴장―그야말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19세기 - 놓쳐버린 근대화와 개혁의 기회

18세기 조선은 영조와 정조의 시대를 지나 비교적 안정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국정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궁궐 안에서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왕실의 친인척 세력이 정치에 깊이 개입하면서 결국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로 이어졌어요. 그 과정에서 왕권은 약해지고, 국정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이 백성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습니다. 양반들은 여전히 특권을 누렸고, 농민들에게는 세금이 끊임없이 부과되었죠. 먹고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은 곳곳에서 집단으로 저항했고, 그 속에서 새로운 사상이 싹텄습니다. 바로 동학이었어요.


1860년에 경주 출신의 최제우는 “사람은 곧 하늘이다”라는 가르침으로 동학을 세웠습니다. 모든 계층과 남녀를 아우르는 평등의 메시지는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억눌린 민중 의식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말 대표적 화가 조석진이 그린 군국기무처 회의 모습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결정적인 사건은 1894년에 터졌습니다. 가혹한 수탈과 부조리에 분노한 농민들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저항을 벌인 겁니다. 바로 동학농민운동이예요. 처음에는 관군을 물리칠 만큼 기세가 대단했어요. 서울을 향해 북상하는 그들의 발걸음에 조선 정부도 크게 긴장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정부는 스스로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이 일본의 개입이라는 또 다른 비극을 불러왔던 거예요. 갑신정변 때 일본과 맺은 톈진조약에 따라 청의 파병 사실을 일본에 알렸고, 일본은 곧바로 더 많은 군사를 이끌고 인천항으로 들어왔습니다. 내란을 막겠다며 외국 군대까지 불러들인 것도 기가 막힌데, 그것도 두 나라의 군대가 함께 들어온 것이었죠.

갑오개혁 시기의 조선 신식 군인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조선에 군대를 들여보낸 일본은 같은 해 7월에 경복궁을 기습했습니다. 고종을 위협해 정권을 친일 내각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이어 ‘군국기무처’라는 초법적인 기관을 세우고 ‘갑오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신분제와 노비제의 폐지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어요. 물론 신분제와 노비제가 사라진 건 환영할 일이었지만, 일본의 의도는 달랐습니다. 친일 세력을 강화하고 기존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속셈이었지요. 그 결과 친일파들이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이송되는 전봉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한성 탈환을 위해 북상하다가 공주 우금치 고개에서 조일연합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 패배한다. (출처: Wikimedia - PD)

동학농민군은 다시 대규모 저항에 나섰습니다. 서울을 향해 진격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습니다. 대포와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과 맞닥뜨리자 농민군은 버틸 수 없었죠. 결국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했고, 저항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의 외침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취를 남긴 거예요.




르 주르날 일뤼스트레 (Le Journal illustré)실린 을미사변 기사의 삽화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외교적으로도 시련은 이어졌습니다. 19세기 후반, 미국·프랑스·일본 같은 서구 열강은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 개방을 강요했습니다. 결국 조선은 개항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사회 질서를 크게 흔드는 계기가 되었어요.


1895년에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일본의 낭인들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잔혹하게 살해한 겁니다. 바로 ‘을미사변’이예요. 당시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와의 외교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일본은 그런 움직임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거예요.




사진 뒷편 언덕에 보이는 것이 러시아 공사관이다 1900년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고종은 더 이상 경복궁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겼고, 이 사건은 ‘아관망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왕이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한 전례 없는 일이었어요. 고종은 러시아·영국·프랑스 등 강대국들과 손을 잡으며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길을 찾고자 했던 겁니다. (참고로 ‘아관파천’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파천은 국왕이 도성 밖으로 몸을 옮기는 경우를 뜻하는데, 고종은 한양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파천’이라는 말에는 일제가 국왕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당시 외신들도 ‘망명(asylum)’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 결과, 1897년 고종은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긴 뒤 ‘조선’이라는 국호를 버리고 ‘대한제국’을 선포했습니다. 자신을 황제로 칭하며 자주국가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덕수궁은 황궁으로 바뀌었고, 대한제국은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고종 황제 1907년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하지만 대한제국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04년에 일본은 러시아와 한반도의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른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조선의 운명은 급격히 기울었죠.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고, 고종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1907년 결국 퇴위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면서 식민지 시대로 들어가게 되었던 거예요.


이 길고 어두운 시간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 있기까지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그 시절의 상처와 흔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나쁜 유산을 남긴 일제 강점기

일제강점기는 지금도 한국 사회의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문화와 질서 그리고 사고방식에 영향을 준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겉보기에 ‘근대화’로 보였던 많은 변화들은 사실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무너뜨리고, 식민지 체제를 굳히기 위한 목적이 더 컸던 거예요. 그래서 그 그림자는 지금도 우리 사회 위에 드리워져 있는 셈입니다.

창경원 동물원 1910년. 창경원은 조선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훼손하기 위해 일제가 고안한 시각 장치였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 공공누리 제1유형)

1) 우리 것은 낡고, 외국 것은 앞서 있다고 믿게 되다

일제는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우리는 너희보다 앞선 문명을 가졌다”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퍼뜨렸습니다. 서양식 건축, 일본식 교육, 철도와 도로를 모두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포장했죠. 그러는 사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낡고 뒤처진 것으로 여기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우리 것에 대한 열등감, 서양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사회 속에 싹트기 시작했던 겁니다.


조선총독부 전경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2) 도시가 권력을 드러내는 무대가 되다

오늘날에는 신문, 방송, 인터넷이 주요한 매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선전 매체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경복궁 한가운데 세워진 조선총독부 청사였지요. 민족의 상징적 공간을 점령해 기를 꺾고, 식민 통치의 위엄을 ‘눈으로 보이게’ 한 겁니다. 또 넓게 뻗은 신식 도로, 일본식 관공서, 서양식 학교 건물도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3) 위계가 지나치게 일상화되다

지금의 한국 사회는 나이, 직급, 학번 같은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본래 조선시대만 해도 지금처럼 서열에 집착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일제는 통치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권위와 복종 중심의 질서를 만들었고, 그것이 점차 사회 전반에 퍼져나갔던 거예요. 여기에 군대 문화가 더해지면서 ‘상명하복’이 당연한 사회 풍토가 자리 잡았습니다. 한때 한국 사회는 이렇게 위계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곧 질서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죠.


4) 공부는 곧 신분상승, 경쟁은 생존 수단이 되다

식민지 체제를 유지하려면 ‘쓸모 있으면서도 말 잘 듣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인력을 공급하는 곳이 바로 학교였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교육을 잘 받으면 사회적 지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교육은 곧 계층 상승의 통로가 되었고, 경쟁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 되었어요. 오늘날의 입시 경쟁과 사교육 열풍도 이때 형성된 깊은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우리 민족’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성을 밀어내다

일제강점기라는 혹독한 시대를 견뎌내기 위해, 우리는 ‘민족’이라는 정체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방식이었죠. 하지만 해방 이후에도 그 사고방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점점 그것은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고, 한국 사회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데 닫힌 태도를 가지게 되었어요.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 다문화 사회에 대한 불편함, ‘우리 것이 최고’라는 과도한 자부심―이런 모습들이 여전히 남아 있는 그 시절의 잔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북분단과 한국전쟁 – 끝나지 않는 시련

1945년에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한국은 해방을 맞았지요. 하지만 그 해방이 곧바로 진정한 자유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반도는 곧 미국과 소련의 영향 아래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두 강대국은 각자의 방식으로 ‘신탁통치’를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잠시일 거라 믿었지만, 외세가 들여온 이념의 불씨는 점점 민족 내부의 갈등을 키워갔습니다. 결국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체제를 가진 두 개의 국가로 나뉘고 말았던 거예요.

(출처: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전쟁은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북한군의 남침은 단숨에 한반도를 집어삼켰습니다. 서울은 불과 며칠 만에 함락되었고, 전선은 끝없이 밀리고 또 밀렸습니다. 그 뒤를 따라온 건 폭격과 피난, 그리고 수많은 희생이었어요. 3년 동안 이어진 전쟁은 민간인과 군인을 포함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마을은 사라지고, 도시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삶도 함께 부서졌던 거예요.


1953년에 전쟁은 멈췄지만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휴전선만 생겼을 뿐,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으니까요. 그 사이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전쟁 직후 1인당 GDP는 약 67달러, 지금 돈으로 따져도 9만 원 남짓에 불과했어요. 당시 세계 평균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치였지요. 정부는 외국의 원조 없이는 나라를 꾸려가기 힘들었고, 국민들은 먹을 쌀과 머물 집조차 구하기 어려웠습니다.


산업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변변한 공장 하나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죠. 갈라진 땅 위에서 사람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박함이 훗날 한국 사회가 산업화와 근대화를 향해 전력 질주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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