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는 글은 내가 된다.
나는 일머리가 좋은 편이다.
신입일 때 부터 그랬다. 새로운 것을 배우는데 빠르고, 적응력이 좋아서 회사 생활 시작 이후로 쭉 인정받으며 일했다. 첫 회사에서 한 달 교육을 받고 배치된 부서는 인사팀이었다. 가서 보니 내가 일하는 부문이 굉장히 국한적이고 시간은 남아 돌았다. 주어진 업무 외에도 복사도 하고, 노동청 심부름도 다녀오고, 글도 쓰고 해도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지금 같았으면, 이게 왠 꿀잡이냐 싶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녔을텐데, 20대의 나는 지루함을 견디기 어려워 '글로벌 컨설팅 회사'로 커리어를 옮겼다. 여기가 나의 본격적인 커리어의 시작이다.
'빅4'라고 불리는 회계법인과 같이 운영되는 컨설팅 회사 중 하나였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회사를 다닌다는 자랑스러움, 세계 각국에서 온 외국인 매니저들과 일하는 즐거움, 싱가폴과 미국 본사에서 진행되는 각종 워크숍과 트레이닝들, 그리고 젊은 혈기넘치는 유학파 출신 동료들 사이에서 신나게 6년을 일했다.
신난다고 말하기에는 물론 고난행진이긴했다.
프로젝트가 없을 때는 한가하지만, 제안서를 쓰거나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밤새기를 밥먹듯이 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우리와 계약한 기업들로 출근한다. 각종 대기업에 들어가 본 것 같다. 네 군데의 굵직한 은행 프로젝트, 식품 회사, 텔레콤 회사, 보험 회사 프로젝트 등 다양한 인더스트리를 넘나들며 배움의 연속이었다. 낯선분야에 상사들이 어시스턴트로 넣으면 각종 자료를 보면서 미리 공부하고 늦게 까지 남아 리뷰하면서 6년을 마치 12년처럼 일했다. (법정 근무시간으로 계산하면, 그때 일한 시간이 진짜 12년 될지도 모른다)
자료 분석, 로직 구성, 스토리텔링. 이 세가지가 완성되면 보기 좋게 장표 구성까지. 그리고 해당 내용 발표와 커뮤니케이션. 내가 생각하는 일련의 지식노동 사이클/프로세스이다. 나는 이 사이클을 6년 동안, 잠도 못자가며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가며 배웠고 익혔다. 그래도 나는 내가 컨설턴트인것이 자랑스러웠다.
번아웃이 왔다.
엄청난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뒀다. 물론 번아웃 만으로 그만둔 건 아니다. 당시 상사들 진상짓 때문에 그만뒀다. 내 직속 상사는... 리더십 회의에 (중고)신입인 나를 보냈다. 리더십 회의에 그녀만 빼고 모두 외국인이어서 영어로 회의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학생 출신이냐? 아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미국 연수(?)를 두 달 다녀온 것이 전부인 대한민국 토종 대학원 졸업생이었다. 아무튼, 회의에 내가 가야 한다고 미리 알려주지도 않았다. 수요일 저녁 5시 반에 리더십 회의가 있었는데, 몸이 안좋다며 5시에 갑자기 대신 들어가라는 식이다. 무슨 내용을 얘기해야 하냐고 물으면, 대충 몇 마디 해주고 퇴장이다. 웃으며 도망가기 시전.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귀여운 편이었다.
마지막 프로젝트는 많이 빡셌다. 그 플젝 매니저는 좀 극단적인 사람이었다. 동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장례식 다음날 언제 오냐고 전화한 것으로 악명이 이미 자자했다. 나와 동료들 사이에 경쟁을 붙여서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결정적인 일도 있었다. 당시 어머니가 방사선 치료 중이셨는데, 어느날 컨디션이 무척 안좋으셨다. 그 날은 엄마가 무척 걱정이 됐다. 날마다 자정에 퇴근하던 나는 마침 담당 업무도 마감됐고 해서 이날만 일찍(그게 저녁 7시다!!!) 퇴근하면 안되겠냐고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그 매니저는 알겠다고 하더니, 6:50분에 나와 전혀 상관없는... 다른 팀 회의에 나도 같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며 불러 세웠다. 결국 나는 11시에 퇴근했고, 그날 나는 이 회사를 그만둬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럼에도 책임감으로 그 프로젝트를 배째지 않고 버티다가 몇 달 후 사표를 내고 그곳을 떠났다.
그 매니저만 빼고 다른 매니저들과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퇴사한 후 잠시 쉬고 있었다. 하지만 3개월 후 다른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다른 컨설팅 법인으로 옮겼는데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감사하게 몇 달 후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이때는 밑에 두 명의 팀원이 생겼다. 작은 팀의 팀 리더를 하게 된 것. 프리랜서로 조인했기 때문에 보수가 높았고, 팀원도 생겼다.
그건 좋았는데 아주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만났다. 나 같은 주니어 리더는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달래는 방법으로 생각나는게 업무 능력 밖에 없었다. 당시 순진했던 나는 고객들을 데리고 술을 사준다거나 골프 접대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했다. 오직 내가 해주는 접대라고는 식사를 사드리는 것 뿐이었다. 아무튼, 처음 팀 리더를 맡은 나는 나와 동갑인 두 팀원들을 얼르고 달래고 때로는 굴리면서 프로젝트를 무사히 끝냈다. 역시 믿을 건, 프로젝트 능력과 팀 매니지먼트 능력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때도 나는 소같이 일한 것 같다. 작은 팀이라도 팀 리더가 되니 알게된 것 하나는 클라이언트 커뮤니케이션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헤드헌터에게서 연락이 왔다. 동료가 추천을 했다고 했다. 감사한 일이다.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외국계 기업에 취업을 하게 됐다. 이 회사에서 나는 정식으로 팀 리더를 하게 됐는데 이때는 두 번째라고 관록이 붙기 시작해 훨훨 날기 시작했다.
클라이언트 관리 실력도 늘었다. 무엇보다 고객사 프로젝트 담당 상무님이 내가 한 일을 너무 좋아하셔서 입지가 “을“답지 않게 견고해 졌다. 이 회사는 우리나라 모 자동차 회사였는데, 완전 군대 같은 서열과 문화였다. 상사 말이 곧 법인 그런 곳.
그 곳에서 내가 들어오기 전 몇 개월간 결제 못받고 고전하던 보고서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최고 담당 임원분이 그걸 보고 '잘했다,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거다'라고 칭찬 한마디 해주신 이후로 나의 프로젝트 생활은 거의 누워서 떡먹기 수준이었다. 컨설팅 일을 이렇게 대우받으면서 한 때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파견나간 대기업에서 '노예'처럼 일했다면, 이 프로젝트에서는 대우받는 노예 정도?
하이라이트는 그 보고서를 요약해 계열사 사장님들 앞에서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말 안듣던 사람들이 발표 준비 과정도 다 돕고, 발표 연습 하자며 먼저 부르고, 전날 집에 일찍 보내고, 새벽부터 모닝콜하고 난리. (지금 생각해 보면 걱정이 됐을것 같다 ㅎㅎㅎ)
겁 없던 나는 신나게 발표했고, 사장님들이 박수쳐 준 이후로는…. 한 마디로 거의 놀러 다닌 것 같다. 드디어 내게도 '컨설턴의 꽃'이라고 불리는 잘나가는 매니저 시즌이 왔다.
나는 박수칠 때 떠났다. 사실 커리어 상으로 잘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어했다. 그 화려하고 연봉도 좋은 직업을 왜 떠나냐고.
유학파가 가득한 업계에 있었기 때문에 나도 유학을 가고 싶었다. 예비 남편은 유학 준비 중이었다. 같이 유학을 하고 와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직을 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MBA가 싫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도전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교육 정책'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매우 과감한 턴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의 망가진 입시 정책을 개선하는 이로운 사람이 되야겠다는 거룩한 목표를 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미국 대학 입시 정책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고, 케이스도 주마다, 사립/주립 대학마다 조금씩 변형이 있었다. 거대한 시스템이었다. 파악하는데만 3년이 걸렸던 것 같다. 문자 그대로 집에 오는 차 안에서 거의 매번 울었다. 영어가 안되서 울고, 내용이 어려워서 울고, 챙피해서 울었다. 나는 진짜 잘 안우는 사람이었는데, 미국에서는..... 참 많이 울었다.
내 노력과 눈물이 무색하게 길은 잘 열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선택이 실패였나 아니였나 고민한다. 직업적 면으로 치면 실패가 맞다. 하지만 필요한 스킬을 연마한 면으로 치면 나쁘지 않았다. 영어와 리서치. 그리고 미국 대학 입시 정책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졸업했다. 비록 잡은 없었지만.
내게 결혼은 빅 이벤트긴 했지만, 빅 임팩트는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는 달랐다. 아이를 키우며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 하지만 시간은 매우 빨리 흘렀다. 학위를 마칠 무렵 출산을 했고, 나는 잠깐 쉰 것 같은데 6년이 흘렀다. 자신감 넘치고 박수 받던 나는 온데간데 없고, '고학력 주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그 자괴감으로 나 자신과, 그리고 남편과 3년 정도 미친듯이 싸웠던 것 같다.
그렇다고 싸우기만 할 수는 없었다. 싸워봤자 변하는 것도 없고 더 답답하기만 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미국에서 비자 때문에 돈 버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편집일 발룬티어를 시작하게 됐다. 나는 '읽고 쓰는 일'을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봉사 그룹에 들어가 잡지 발행을 위해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고, 영화 감상문을 썼다. 그러다가 신문에 칼럼을 쓸 기회를 얻었고, 팬이 조금 생겼다. 그러다가 에세이 프로젝트에 뽑혀 책을 한 권 내게 됐다. 독후감상문을 써서 상과 상금도 받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쓸 때 행복하고 뿌듯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돌아보니, 나는 살면서 글로 종종 상을 받거나 칭찬과 격려를 받으며 살아왔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서 한 미디어 스타트업을 추천받았을 때 지원했다. 조금 더 지속가능한 글쓰기와 돈벌이가 같이 갈 수 있길 바랬기 때문이다. 그곳이 목적지였나 묻는다면, 출발선이라고 답하겠다. 그렇게 나는 글쓰며 돈 버는 미디어 산업군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인생에 나를 정의하는 직업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이것을 머리로는 받아들였지만, 마음으로 인정하기 까지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소개하는 난에 직업을 적을 때는 문제가 없는데, 나를 어떤 사람인가 소개하려면 무엇을 적어야 할지 망설였다.
내가 쓰는 글에 따라 내가 정의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기사를 쓰면 기자다. 연구 논문을 쓰면 교수다. 칼럼을 주로 쓰면 논설가나 칼럼니스트가 된다. 시를 쓰면 시인, 소설을 쓰면 소설가, 에세이를 쓰면 에세이스트다. 이쪽은 통틀어서 작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 수필집을 나눠주거나 칼럼에 수필을 기고 했을 때, 받는 사람들은 나를 '작가님'이라고 부른다. 회사에서 내 이름을 찾으면 '기자'라고 뜬다. 회사에서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 사람들은 나를 '리서처'라고 부른다. 나는 내가 작가인지, 기자인지, 리서처인지 아니면 이 모든 것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
회사에서 내 글은 취재보다는 자료를 연구하고 리서치해서 쓰는 분석 글들이 더 많다. 주로 산업 트렌드 분석글이나 금융분석 글을 많이 썼다. 어렵고 많은 노고가 드는 글쓰기다.
개인적으로는 수필을 쓴다. 소설을 권했던 사람들이 있지만 상상력 한계가 심하다. ㅎㅎㅎ 수필을 쓸 때는 즐겁고, 한 번 시작하면 대부분 한 자리에서 다 써내려 간다. 리서치 라이팅 때와는 180도 다른 스타일과 방법이다. 현재는 이 두가지의 글쓰기가 주된 나의 글들이다.
나의 다음 5년은 '나는 작가입니다' 라거나 '나는 수필가 입니다' 라거나 '나는 저널리스트입니다'등 한 단계 더 짙은 색깔을 가지고, 더 구체적으로 나에 대해 쓸 수 있는게 목표다.
내가 나를 정하는게 아니라, 내 글이 나를 정의한다. 그렇다, 내 글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정한다.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그렇다.
그렇다면, 나를 더 잘 알려면? 더 정확하게 알고 싶다면? 혹 더 빨리 알아가려면? 더 많이 자주 써야한다는 사실. 새해에는 내 글을 더 많이 써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