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굳찌 Jun 23. 2023

워킹맘, 합격한 자의 옷차림

나를 새롭게 정의하는 워킹맘의 옷차림

합격이었다.

'축하합니다'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았다.

가벼운 파트타임 리서치 일이었는데, 내가 이렇게 간절히 합격 소식을 기다렸나 싶을만큼 뿌듯했다.

남편이 어떻게 됐냐고 물을 때 마다, 잊고 있는 척, 관심 없는 척, 무심한 척 했다. 하지만 합격 이메일을 받자, 거실에 있는 남편을 향해 대한독립선언 하듯 외침.


"나 붙었어!!!!!!"


남편은, "그래 그럴줄 알았어! 오늘 엄마 회사 취직했으니까 외식하러 가자!"고 기뻐했다.

나는 "아직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외식을 해앵~" 하면서도 싱글벙글 했다. 아이는 "엄마 왜? 왜? 엄마 무슨 합격했는데?" 하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같이 신이 났다.


결국, 합격한 주말에 우리는 해프문 베이(halfmoon bay)에 있는 맛집으로 향했다. 우리식구 모두 좋아하는 크랩 샌드위치와 파스타를 파는 집이다. 가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리고 기다리는 시간도 많아서 정말 먹고 싶을 때만 맘먹고 가는 레스토랑이다. 바로 이런 날!!!

일단 축하부터 하고 시작하자고!





마치 신학기 처럼, 모든 것은 봄에 시작됐다.

처음 인사하기로 한 날은 3월 둘째 주 였다.

합격한 사람들은 다운타운의 '위워크(wework)'에서 만나기로 했다. 작은 회사라 아직 사무실이 없어서 공유오피스를 빌려쓰고 있다고 했다.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일 주일에 한 번만 나오면 될 것 같다고 했다.  미국에서 양가 부모님의 도움없이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는 너무 좋은 업무 조건이었다.


무엇부터 준비하면 될까?

신나서 다음 주에 있을 첫 출근 준비를 하려고 보니 '회사용 옷'이 없었다. 남편은 출근용 옷을 사라고 했지만, 아직 일도 시작하지 않은 파트타이머에게 그건 좀 사치같았다.


그래서 옷장을 털기 시작했다.

벽장으로 가서 가장 안쪽에 들어가 있던 정장들을 꺼내봤다. 회사를 꽤 오래 다녔었기 때문에 정장이 제법 여러개 였다. 먼지를 털어내며 꺼내본 나의 사회생활용 옷들...

10년간의 먼지가 고스란히 내려 앉은 정장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멀쩡했다. 한 벌 한 벌 꺼내다 보니... 나의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 처럼 스쳐 지나간다.


나는 그 시절 주로 바지 정장을 입었다. 치마 정장은 손에 꼽는다. 치마 정장 입는 걸 불편해 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치마 정장들은 정말 맘에 들어서 산 옷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10년만에 꺼내드는데도 애착이 간다.


먼저, 진보라 치마 투피스 정장.

회사 행사가 있다던가 격식있는 자리에 가야 할때 입던 정장이었다. 톤이 많이 내려간 짙은 보라색이라 색깔이 독특하면서도 차분했다. 이 옷은 얇은 벨벳 스카프와 세트였는데 아주 고급지고 예뻤다. 게다가 나는 진한 보라색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입으면 내가 매우 예쁘게 느껴지는 마법의 옷 같았다...그러나 10년 후, 마법은 커녕 옷이 안들어간다는 슬픈 이야기.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입던 브라운 치마 투피스 정장.

자켓은 트위드 재질로 베이지와 브라운 색이 섞여 있었다. 단추는 작고 진한 브라운 색 벨벳으로 포인트가 됐다. 치마는 단추랑 같은 색깔의 빌로드였고, 튤립 꽃잎 같은 쉐입이다. 허벅지 쪽은 살짝 붙고 무릎 쪽은 물결처럼 여유롭다. 화려하고 우아한 옷이었기 때문에 출근할때는 입지 않았다. 주로 결혼식이나 돌잔치 등에 입었다.


검은색 벨벳 원피스.

이 옷은 회사 연말 파티용으로 샀다. 백화점에서 샀냐면 그것도 아니고, 강남역 지하 상가에서 샀다. 아주 심플한 벨벳 원피스였는데 역시 까만 벨벳으로 된 납작한 목도리와 세트였다.

나는 회사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 원피스를 입고 세트로 된 목도리 대신 진주목걸이를 하고 갔었자. 예쁘다고 칭찬 많이 받았던 옷이었다. 아... 정말 꽃 같던 시절이었는데! 부럽다 그 시절의 나~~


꺼내다 보니 나는 '벨벳' 재질을 무척 좋아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시절에는 몰랐다는게 더 신기함)

미국에서 유학한 후 주부로 살다 보니 그런 내 취향은 어디론가 잊혀지고...날마다 청바지, 티셔츠, 츄리닝, 잠바, 운동화가 교복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은 나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반영하는 존재란 것도 함께.


센티해 지는 기분을 뒤로하고 치마정장이 모두 안맞음 확인. 재사용 불가. 결국 아직 맞는 브라운 치마 정장만 제외하고, 나머지 옷들은 모두 도네이션 하거나 재활용 분리수거함으로 향했다.




바지 정장을 둘러볼 차례.

이 옷들이 주로 평일에 회사 출근 용이었자. 당시 내게 믹스앤 매치란 없었다. 좋아하는 옷들을 고심해서 고를 때와는 달리 출근용 옷은 일종의 '작업복'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90프로가 세트정장이다. 게다가 옷 고르는 기준도 아주 명확했다.


1.  단정할 것.

2. 무늬가 가급적 없을 것 (줄무늬나 체크무늬도 지양)

3. (여성으로서) 몸의 느낌이 최대한 드러나지 않을 것.


얼마나 드라이한 느낌의 옷들이었을지 기준만 봐도 알 수 있다. 바지 정장들은 출근이라는 목적에 맞게 블랙 계열(검은색, 회색), 블루계열(네이비, 소라색), 브라운 계열(짙은 갈색, 베이지색), 이렇게 세 가지였다.


꺼내다 보니... 겨울용과 여름용으로 소재만 좀 다른 채 비슷한 옷들이 도돌이표처럼 나왔다. 디자인도 아주 흔한 스타일 그 잡채!!! 주로 남자 정장처럼 테일러드 칼라다. 가끔 차이나 칼라도 있다. 그 당시에는 칼라 없는 정장 자켓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 옷들은 어떻게 샀느냐? 필요하면 기준에 맞는 스타일과 색깔을 찾고, 가격이 적당히 맞으면 산다. 아주 빠른 쇼핑이 가능했다.


다행히 바지 정장 세트 중에 아직 맞는 자켓들이 있었다. 무늬 없는 검은색 테일러드 정장 자켓, 역시 무늬 없는 어두운 네이비 색의 정장 자켓 두 개를 건졌다.


결국 까만 정장 자켓을 입고 가기로 했다.




회사원일 당시에 나는 7센티미터씩 되는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그 위로 바지를 덮었다. 즉, 다리가 길어보이는 착시효과를 누리는데 집착했었다는 이야기. 때문에 바지 길이는 모두 내 다리에 비해 7센티미터 씩은 길었다. 아이를 낳고 하이힐은 다 내다버려서, 지금 가진 3-4센티미터 굽의 구두를 신으면 모두 질질 끌렸다. 대략 난감.


그래서 검은색 정장용 바지 (발목까지 오는 것으로)만 하나 사기로 했다. 이건 어디라도 두루 입을테지.


구두는 굽이 높은 것으로는, 거의 15년 전에 거금 23만원을 주고 산 비즈가 달린 검은색 벨벳 소재 힐이 하나 있긴 했다. 아껴 신어서 15년이 지났어도 멀쩡하긴 하지만, 출근 분위기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다행히 교회 갈때 필요한 경우가 있어 사둔 짙은 블랙 구두를 한 켤레 발견! 그걸 신고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한 바탕 나의 옷장과 추억을 한참 정리하고 나서야 나의 첫 출근룩이 완성됐다. 나는 이제 새로운 내가 됐다.


<컴백투오피스> 준비 끝!

아임 뤠디~~~~!!!

대충 이런 느낌



매거진의 이전글 내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은 창대하리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