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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재천 Apr 16. 2018

인도의 종교 - 수피사상

<사진출처 :  구글 이미지>


인도 종교의
표면적인 갈등은 힌두교와 이슬람교 그리고 시크교 사이에서 비롯된다.
BC 8c경부터 북인도인더스강 하류의 ‘신드’지방에서, BC 10c경에는 ‘펀잡(현재, 씨크교의 중심지역)’지방에서 이슬람교가 안착하였다.
남인도의 ‘케랄라’ (2) 지방에서는 아랍의 여행자와 상인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이슬람교가 자연스럽게 전파되었다. 문헌(알비루니의 키탑 울 힌드)에따르면 서아시아지역에서 힌두사상과 힌두교가 성행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불교 교리, 힌두 신화, 우화, 천문학, 의학서가 아랍어로 번역되기도 하였다. 


마우리야왕조의 ‘아쇼카’(2)왕이 전파한 불교는 중앙아시아 아프가니스탄과 비단길을 연한 지역에 전파되어 불탑과 사원이 성행하였으나 이슬람교가 들어오면서 점점 쇠락해졌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슬람교에는 또 다른 사상이 물밑으로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이슬람교의 '수피즘'이다.수피즘은 BC 10c에 페르시아에서 성행하던 이슬람 신비주의로써 “神에 대한 사랑과 헌신으로 神과 합일을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수피사상을 추종하는 이들은 주로 이슬람 제국주의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로써 오직 神에 대한 헌신을 요구한다. (이 논리가 이번 논의의 핵심 주제) 이들은 이슬람 전통의 불합리한것을 과감하게 탈피할 것을 요구하였다. 


초기 ‘수피로는
8c경 여성수피 '리비아' 10c '만수르 번 할라지' 있다. 그들은 "神과 합일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사랑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범신론자들에 의해 만수르가 처형되기도 하였지만 이슬람교의 확산은 상대적으로 수피즘은 국외로 퍼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인도에 수피즘 전래는 터키족의 인도 진출과 함께 전해졌으며, 초기 수피즘은 불교, 요가의 수행방법 중 하나로 받아들여졌다. 수피들은 조직, 고행, 단식, 호흡법등을 요가사상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등, 이슬람교에서 배척당하던 수피즘이 인도에 들어와서 불교와 힌두교와 밀착하게 되었다.

 


(1) 남인도의 '타밀어'에는 우리말과 유사한 단어가 3,000개가 넘는다고 하니 이것 또한 연구해 볼만한 일이다.

(2) ‘알렉산더대왕이 남겨논 잔존세력을 물리치고 왕이 된 ‘찬드라굽타의 치세 하에 ‘아쇼카 ‘탁실라 우자인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노년에 수행자의 삶을 살고 있던 부왕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왕자들 중에서 가장 먼저 수도(파틸리푸트라)에 도착하여 99명의 형제들을 살해한 다음에 왕이 되었다.


그가 ‘마우리야왕조를반석에 올려놓고자 이웃나라를 정벌할 때는 잔혹하기 그지없는 군주였다고 한다. 그는 군사,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손색이 없는 탁월하면서도 비정한 군주였다. 그런 그가 ‘마우리야왕조를 비웃던 ‘칼링가'왕국을 무찌르는 전투에서 피아의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핏물이 강이 되어 흐르는 전장을 둘러보다가 문득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으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가 되 뇌인 말은 “무명용사의 죽음은 ‘위정자들의 욕심으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생존을 목적으로 삶을 위하여 평생을 몸부림친 것이다이였다.


그 후,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힘에 의한 무력 통치를 포기하고 불법을 기초로 한 법과 진리로 선정을 펼쳤다. 그는 불교 이외에 인도의 모든 종교를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아들을 스리랑카로 보내어 불교를 전세계에 알리는데 힘을 쏟았으며,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요순의 이상 정치를 실천한 위대한 왕이었다.

아쇼카왕의 '카링가 전장'

오늘날,
인도의 새로운 리더 모디(Modi)총리가 그를 상징화하면서 자신과 동일시하고자 하는 전략에는 분명 이유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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