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나마스떼, 인디아입니다.
2017.09. 27
고대종교 Veda사상에서 출발한 힌두교는
오랜 세월 동안 지나치고 까다로운 제의(제사의식과 절차)와 엄격해진 교리로 대중들과 점점 멀어지고, 불교.자이만교의 확산으로 인하여 한 동안 그 기세가 위축되었다. 힌두교의 ‘브라흐마’(제의를 주관하는 사제계급)는 AD 4c에 ‘굽타’왕조가 들어서면서 ‘크샤트리아’(왕, 무사계급)들이 왕권을 강화의 수단으로 ‘비슈누(힌두교의 번영과 유지의 신)’神과 동격을 허락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다졌다(정치와 종교 패권의 Deal). 그에 따라 ‘굽타’왕조 시대를 지나면서 점차적으로 힌두교의 신(神)들은 인격신으로 변화한다. 불교도 이와 같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붓다'는 인격神으로 변모하였고(석가모니 불상 등으로) 이와 동시에 '비슈누'도 인격神이 되었다.
'마우리야'왕조에서 꽃을 피웠던 불교가 ‘굽타’왕조로 들어서면서 쇠락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힌두교에게 영향을 주어 '박티'사상이 힌두교의 지식(즈냐나), 행위(카르마)와 함께 인간이 해탈하는데 중요수단 중에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박티사상은
7-12c경에 남인도에서 북인도로 확산된 사상이다.
그 동안 인도인들이 믿고 있던 힌두 神은 비인격적, 절대적, 추상적, 딱딱한 이성적인 神으로써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으며, 불교.자이만교의 ‘고행과 명상’과 함께 힌두교의 인격신에 대한 헌신과 사랑이 神과 합일을 이루고 해탈에 이르는 길이며, ‘神 앞에서 누구나 다 평등하다’는 사상으로 발전하고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박티’ 종교인들은 힌두이즘의 카스트제도를 부정하고 신에게 헌신을 강조하면서 산스크리티어가 아닌 지방 토속어와 타밀어를 사용하여 민심을 파고들었다. 따라서 박티사상은 남인도지역에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점진적으로 북인도로 전파되었다. 이것은 수피즘의 ‘이론과 실천’이라는 현실적인 합일과 함께 더욱 더 대중들에게 신뢰와 믿음을 갖게 되었다.
<박티종교와 수피즘의 교차>
이와 같은 기조는 15-16c에 들어서면서 기존의 낡고 형식적인 종교가 자신의 이성과 열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종교이념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사상가는 ‘나낙’과 ‘카비르’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나낙’은 ‘박티’즘과 ‘수피’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시크’교의 창안하였다. 그는 1469년 라비강변 탈완디의 ‘난카나’에서 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인도의 풍습대로 조혼하고 페르시아인 이슬람교도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난 다음 아프가니스탄 귀족이 경영하는회사에서 일하였다. 하지만 그는 성자와 사두들과의 토론을 즐겼으며 명상하기를 좋아하고 생활화 하였다. 이윽고 명상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그는 출가하여 ‘수피’가 되었으며, 인도 전역을 순례한 다음 가족과 재회하여 펀잡지방의한 마을에서 살다가 1539년에 세상을 등졌다.
‘나낙’은
“神은 오직 하나뿐!
사랑과헌신의 마음을 지닌 체 神속에서 살면서 神의 이름을 끊임없이 부르면 누구나 해탈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가르친다.
“神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순수해야하고 스승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상이 힌두교와 이슬람교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1)카스트제도의 타파, 2)출가와 같은 극단적인 삶을 배격하고 3)건전한 생활을 강조하는것으로써 후일, 무굴제국 ‘악바르’의 정치철학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마스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