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낯선 땅, 느리게 흐르는 시간을 만나다
이제 막 돌을 지난 아이의 유모차를 밀고 처음 마트로 향하던 날을 기억한다. 남태평양의 외진 나라, 모든 것이 생소한 작은 마을에서 도보 5분 거리에 마트가 있다는 사실은 이방인에게 꽤 든든한 위로였다.
여름임에도 습기 없이 청량한 공기, 그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쨍한 햇살을 받으며 걷고 있자면, 처음 마주치는 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인사를 건넸다. "하이", "헬로우". 그들의 얼굴에 머문 해사한 미소는 익숙지 않았지만, 그 자연스러운 환대가 이내 마음 한구석에 온기로 스며들었다.
마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앞서 들어가던 현지인 남성이 문을 열더니, 나와 아이가 완전히 통과할 때까지 그 묵직한 문을 붙든 채 기다려 주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선 것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조용히 제 길을 갔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장면이 선명한 잔상처럼 남아 있는 것은, 그것이 내게는 경이로운 배려였으나 그에게는 숨 쉬듯 당연한 일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유모차는 엄두도 못 낼 가파른 동네를 오가며, 아기띠에 아이를 메고 시장바구니를 든 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던 날들이 스쳐 갔다.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었던 인구 밀도 높은 도시의 삶. 그 숨 가쁜 흐름이 전부인 줄 알았던 나에게, 그의 배려는 이역의 땅이 건네는 첫 번째 악수였다.
그 낯선 호의가 이 도시의 다정한 질서임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란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남편이 운전하던 차 안, 카시트의 아이가 갑자기 토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황한 우리가 급히 차를 세우고 정신없이 물티슈를 찾던 그 짧은 찰나였다.
"헤이!"
어딘가에서 들려온 외침과 함께, 지나가던 차의 열린 창틈으로 물티슈 한 통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전할 틈도 없이 그녀는 홀연히 멀어졌다. 고속도로 진입을 앞둔 긴박한 도로 위에서, 그녀는 멈춰 선 차 안의 곤란함을 단박에 읽어내고 가장 절실한 물건을 선사한 채 떠난 것이다. 달리는 차 창밖으로 던져진 것은 물티슈가 아니라, 이방인의 당혹감을 닦아주는 다정한 손길이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뉴질랜드에는 위기의 순간마다 기꺼이 멈춰 서 온기를 더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숲의 숨결처럼 도처에 스며 있었다.
성인이 되어 이주한 내게 이곳의 언어와 문화는 여전히 아득한 간극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민족과 언어를 넘어 곤경에 처한 이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오는 이들의 모습은 내 안의 웅크린 긴장을 가만히 녹여낸다.
그들에게서 타인의 고단함을 그저 지나치지 않는 법을, 머뭇거리는 더딘 발걸음 앞에 먼저 손을 내미는 명료한 다정함을 본다. 조건 없이 건네온 그 무구한 손길이야말로 내가 이 땅에서 처음 마주한 가장 눈부신 햇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