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똘한 기술 문서는 일당백, 그 이상의 가치가 있더라.
애플에서 일할 때 솔직히 말하면 회사를 너무 편하게 다녔다. 기술 문서가 잘 돼 있었던 덕분이다. 애플에서는 User Guide 외에 KB와 HT로 문서를 분류한다. KB는 Knowledge Base Article로 특정 기술에 대한 개념 이해를 돕기 위한 문서이다. HT는 How-To 문서로 일종의 튜토리얼이라고 보면 된다. 어떤 상황에서, 왜 이 트러블 슈팅을 시도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Step-by-step으로 따라 하기 쉽게 문서가 구성돼있다.
문서가 워낙 잘 돼있다 보니 여러 면에서 활용도가 높았다. 트레이닝 기간 동안엔 읽어볼 문서 목록 리스트만 잘 챙겨보면, 트레이너가 하나하나 설명해주지 않아도 됐다 (나중에서야 느낀 거지만 트레이닝 시스템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온보딩이 잘 돼있는 건지 새삼 깨달았다) 고객을 상대하다 이슈를 발견하면 동료한테 하나하나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검색하면 이미 문서에 다 정리가 돼있다.
회사가 잘 구축해놓은 시스템 덕분에 일하기 편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숟가락만 얹으면 되는 시기에 입사한 거라 딱히 할 말은 없다. 10여 년 전에 승진한 매니저 말에 따르면 기술 이슈 불러주고 트러블 슈팅 방법을 문서로 작성하라는 게 면접 과제였다고 한다.
기술 문서의 중요성은 아이폰 앱 개발 코딩 캠프를 들을 때도 느꼈다. Swift는 애플에서 만든 언어다 보니 모든 공식 문서가 기본적으로 영어다. 부트 캠프를 듣는 수강생들 중엔 영어가 부담돼서 공식 문서를 그럴듯하게 설명한 블로그를 보거나 아니면 파파고 같은 번역기를 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모든 정확한 내용은 이미 공식 문서에 잘 나와있다. 결국엔 공식 문서를 봐야 제대로 개발을 할 수 있었다.
부트 캠퍼 리더 또한 이 사실을 강조했다. 이해가 잘 안 돼서 블로그를 보는 건 괜찮지만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고 하셨다. 공식 문서는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그만큼 중요한 자료인 셈이다.
애플에서의 기술 지원 근무, Swift 앱 개발을 경험하면서 결국 나는 기술 문서가 얼마나 중요하고 활용도가 높은지 깨달았다. 이러한 일련의 경험이 연결되면서 기술 문서에 내가 직접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매력적일까?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됐다. 감사하게도 테크니컬 라이터로 그 생각을 마침내 실현하게 됐다.
여전히 기술 문서를 누가 보냐며, 왜 중요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테크니컬 라이터와 번역가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기술 문서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편으론 안타깝다. 문서가 정말 잘돼 있는 회사를 아직 안 다녀봐서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니면 개발자들이 힘들게 개발한 기능을 구조화된 정보로 정리하기까지 뒤에 숨겨진 노력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닐까?
사실 이러나저러나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하면서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