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유진의 작품을 고은빈이 쓰다
공중다리의 사색 – 겨울나무로부터
- 손유진 작품에 대한 고은빈의 사유
전시의 중심에는 세 점의 겨울나무 연작이 있다. 돌이켜보면 이 작품들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버티며 이끌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그가 바닥에 눕거나 둘둘 말려 있을 때는 유약한 천일 뿐인데, 신비롭게도 그의 생명력에 상응하는 언어를, 장소를, 사람들의 마음을 그 스스로 찾아나간다. 그 덕분에 작가의 첫 개인전은 작가를 드러내는 대신 온전히 <겨울나무 연작>을 위해 준비되어, 여러 사람의 정성을 이곳으로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공중다리”는 겨울나무를 비유하며, 겨울나무는 손유진 작가의 영혼을 다시 비유한다. 추위를 맞는 겨울나무의 가지 곁에는 무성함도 짙푸름도 없다. 하지만 그 밑으로는 땅을, 위로는 하늘을 의지해 나무는 그의 생명력을 피워낸다. 시 <겨울나무 숲>에서 드러나듯 공중다리들은 그 전 과정을 깨어서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가라앉히는 존재들이다. 그처럼 이 전시의 제목은 겨울나무가 품고 사는 삶의 깊이를 환기하는 시적인 언어로 다가온다. 동시에 그것은 ‘겨울나무로부터’, 혹은 그것을 담아낸 <겨울나무 연작>으로부터 우리 자신에게 찾아오는 사색의 시간과도 맞닿아 있다.
부드러운 천에 단단하게 수 놓인 겨울나무 “이것보다 더 나다운 것은 없겠구나.”라는 작가의 놀라운 표현을 이 전시로부터 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 전시된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공중다리’이다. 겨울나무에 대한 작가의 열정은 일관된 하나의 주제에 몰두하면서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그것을 표현하도록 그를 이끌었다. 나는 그가 걱정하던 바와는 달리, 겨울나무의 존재 전체를 여러 방향에서 살피며 한없이 깊게 이해하는 작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전시는 가장 그 다운 모습으로 준비되었기에, 겨울나무 숲은 바깥을 향해서도 문을 열어놓게 되었다.
- 이 모든 게 내 노력에서 온 것이 아님을 기억하려 합니다. 자연스럽게 찾아오기도 해서, 제가 한 것은 문을 열고 있었다는 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열고 있으면 새도 들어오고, 햇살도 들어오고, 비도 들이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정리하게 됩니다.” (4.6일의 손유진과 고은빈의 대화 기록 중)
작가가 천을 짓는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어떤 시간을 견뎌왔을지, 그가 지켜온 그늘을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어쩌면 바로 그 시간이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곳에 숨겨진 겨울나무의 진실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작업실을 구하기 이전에 보내온 삶은 작업의 저편에서 조용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지난 2년은, 작가마저 기대하지 않았던 그의 첫 개인전을 천천히 채워나갔다. 결국 이 전시는 손유진 작가가 소중히 엮어낸 그 두 모습의 시간, 그로부터 생겨난 어떤 가능성일 것이다.
그의 겨울나무 작업을 지켜보며
- 손유진의 작업에 대한 고은빈의 사유
나는 그의 작업이 정말 ‘천 자체’를 사용하는 보기 드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날것 그대로의 실이고, 그것이 짜인 천이며 그밖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회화로 접근하기에는 그것에 남겨진 구멍들이 그 이미지를 두께와 질감, 노동력과 시간의 영역으로 밀어낸다. 결국은 가장 단순하고 강렬한 것의 느낌만이 남는다. 나는 내 앞의 그 천이 사라지는 줄 알았다. 어떻게 이렇게 버리고 또 버려서 가벼울 수가 있을까. 천은 자신이 간직한 삶을 제거했다기보다 온전히 하며, 가장 순수한 것들로부터 서 있으려고 한다. 천을 짠 ‘실’은 수십 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고, 미세한 공기와 번지는 톤으로 모여 있다. 그 실은 무게가 있고, 부피가 있으며, 가늘지만 길게 이어진다. 실과 실이 교차하면 단단함이 생긴다. 면적은 시간에 비례해 확장되고, 시간은 실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실이 멈춰야 할 곳을 지시한다. 한 장의 천으로 채워지기까지 작가의 시간은 건조하게 기록되는데, 어떠한 복잡하고 기교적인 작용 없이 정직함과 성실성에만 대응하는 작업의 소박함이 내게는 가장 경이로웠다.
1.
작년 12월 말, 다음 작품의 소재를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리고 2월이 되어 작가가 겨울나무 연작을 시작할 무렵에도 나는 그와 같이 있었다. 그렇게 기대하고 확신하며 처음 그 작업이 시작되었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은 이미 그로부터 먼 곳에 와 있음을 느낀다.
작가가 바라보는 겨울나무는 분명했다. 그는 ‘하늘을 배경으로 햇살을 받는 나뭇가지’라는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가 가진 가장 단순한 것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임을 알았다. 그렇게 작가의 겨울나무는 작가가 매일 만나던 그 나무, 작가에게 매일같이 작업의 확신을 주었던 나무로부터 점차 내면의 이미지로 정제된다. 그 무렵 나는 작가가 얼마나 그 작업을 시작하려는 마음으로 가득했는지를 곁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나뭇가지에 닿아 있는 햇살을 그리고 싶었다. 이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잔가지에 따뜻한 햇살이 닿아 있는 것을 보면 나는 내가 늘 꿈꾸던 어떤 세계 속으로, 내 안의 그늘 속으로 기쁨의 구름들이 들어와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심의 거리를 지키는 나무들은 자유롭게 자라지 못한다. 겨울에서 봄 사이, 사람들의 손길로 얌전히 다듬어져 있다. 그 잘려진 자국 위 여린 속살에 또다시 햇빛이 다가와 앉는다. 마치 쓰다듬는 것처럼, 난 네가 잘 자라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것처럼.”(작가의 작업일지에서)
2.
가지들은 휘어 있는 곡선을 거쳐 직선으로 뻗는다. ‘선’은 작가가 바라본 겨울나무 가지의 전부를 간직하기 위한 가장 가난한 형태이다. 그 선은 오로지 방향성을 기억하는 속도로만, 자신의 띠 있는 몸이 계속되고 있음을 안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그곳의 가지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였다.
살아 있음은 사랑으로 피워낼 새로운 생명을 기약하는 것이다. 가지를 그리는 직선에 비해 겨울나무에 그려진 원은 따뜻하다. 원은 느리게 베풀어지며, 직선과 반대로 가능성을 품은, 생성하는 형태다. 그래서 이 원들은 다양하게 해석되어도 결국 겨울나무 연작에서 가장 소중하게 다루어진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겨울나무가 자신의 삶을 확인하고, 믿고, 그 운명을 사랑하게끔 하는 무언가.
겨울나무에서 치유의 힘을 느끼는 사람들은, 지난 12월 겨울나무 앞에 서 있던 작가와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하는 것일지 모른다. 겨울나무는 햇살로, 그의 겨울 눈으로, 침묵하는 겨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3.
두 번째, 세 번째 겨울나무를 작업하는 사이 여름이 되었다. 첫 번째 겨울나무에서와는 다르게 표현된, 또 다른 나무들이 보인다. 작가는 이전만큼 가까이서 겨울나무를 느끼지 않았다. 자연스러운 멀어짐에서는 작가와 겨울나무의 새로운 관계가 싹텄고, 겨울나무 연작을 마친 뒤에 새로 시작될 작가의 시간이 준비되었다.
두 번째 겨울나무 <공중다리의 사색>은 한 나무의 초상처럼 보인다. 그 나무 기둥을 따라가는 선은 느리고 조심스러우며, 그 나무의 겨울은 가볍게 오르는 선이 아니라 추위 속 온기의 흔적을 짚어가는 선으로부터 온다. 세 번째 <향하는 나무>에서 나무는 더 이상 작가가 직접 마주친 장면으로부터 재현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무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새롭게 내려진 부리, 혹은 뒤집힌 방향의 가지들이다. 그래서 형태는 더 낯설면서도 자유로워 보인다.
작가의 첫 번째 겨울나무를 보러 갔을 때, 나는 무척 긴장해 있는 작가에게 어떠한 말도 표정도 남겨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가 나에게는 정말로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던, 삶에 몇 안 되게 찾아오는 귀한 만남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겨울나무가 좋고 나쁨을 변론하지 않게 만드는 훌륭한 작업이라고 느꼈다. 그 가까이에서는 세잔의 세계를 다시 보는 기분이었다. 자연에 덧대어지는 수많은 의미, 그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세계에서 이미 원리는 익숙한 질서를 넘어서 있다. 이 세계의 어머니가 되는 세계, 건너편의 언어, 인간의 사유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꿰뚫고자 하는 자연에 대한 경험은, 어둠의 이해를 통해 세계를 밝히기에 서늘하게 느껴진다. 마치 작가가 택한 실의 ‘없는 듯이 살아나는’ 색감처럼, 겨울의 추위는 동시에 겨울의 온기로부터 온전해졌다.
- 그의 겨울나무 작업을 지켜보며, 글 고은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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