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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 Jun 01. 2021

내 동생, 한호 이야기 (1)

그때는 나 하나 지켜내기도 버거웠다.

어린 두 남매만 남기고 동생네 부부는 홀연히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저 불쌍한 아이들을 어쩌랴. 살아남은 남매만이라도 온전하면 좋으련만, 둘째 한호는 부모의 사망 소식도 모른 채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로 간신히 연명하며 외롭게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병원 측은 한강성심병원이 생긴 이래 아직 한호처럼 심한 화상 환자는 없었다며, 이 상태라면 한호가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살 희망이 없는데, 앞으로도 병원비는 무척 많이 들 것이라며 한호의 입원 여부를 보호자가 결정하라고도 했다. 한호는 화상 자리가 짓무르거나 곪지 않도록 특수기능을 가진 바람 침대를 사용해야 했다. 1990년 초반 당시 중환자실의 하루 입원비만 해도 50만 원에, 밀린 병원비만도 2개월 동안 이미 몇 천만 원이었다. 동생네가 남겨놓은 재산도 따로 없는 데다 졸지에 보호자가 된 나의 친정어머니 또한 빈손이나 다름없었다.

산소호흡기만 떼면, 한호는 이틀이면 죽는다고 했다. 사망한 부모를 대신하여 졸지에 보호자가 되어버린 친정어머니와 나는 달리 방도가 없어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한호를, 친정어머니가 사는 시골집으로 데려갔다.

한호를 시골집으로 데려온 뒤, 친정어머니는 직장에 가는 시간을 빼고는 곁에서 간병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낮에는 고모인 내가 간병을 도맡았다. 그렇게 우리는 교대로 아이 곁을 지키며 곧 죽을 목숨이라던 한호가 죽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는 1주일이 지나도록 죽지 않았다.


- 김정희 저, [하나님의 , 정희] 중에서 




한호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아간 것은 딱 한번뿐이었다.

살 가망이 없어서, 낼 병원비가 없어서 한호는 퇴원했다. 그리고 인천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왔다.

그즈음 학교가 개학을 하였고, 나는 서울 외할머니 댁에서 지내며 중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산소호흡기만 떼면 이틀이면 죽게 된다던 한호는 할머니 집에서 머물며 한참을 더 살았다.

나는 주말이 되면 인천으로 내려갔다. 사고 후 방학 동안 사촌언니를 따라가게 된 교회 중등부가 너무 좋았다. 즐거웠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교회로 갔다. 중등부 예배가 끝나는 시간이면 어두움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나는 동생에게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내 마음은 더 어두웠다.

교회에서 한호가 있는 할머니 댁까지 가는 길은 버스로 40분 정도 걸렸다. 버스에 내려서 어두운 골목을 따라 한참을 가야 했다. 가로등도 몇 없었고, 그나마도 꺼져 있을 때도 있었다. 나는 그 길이 너무 싫고 무서웠다. 할머니는 일을 하셨다. 저녁에 집에 가도 할머니는 없었다. 굳게 잠긴 문을 내가 열고 들어가서, 어둡고 캄캄한 방의 불을 내가 켜야 했다. 그 어두컴컴한 방에는 꼼짝 못 하고 누워 있는 동생과 텔레비전 불빛만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 길이 싫었다. 그 골목도 싫었고, 굳게 닫힌 문도 싫었고, 캄캄한 방도 싫었고, 토요일이면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동생도.... 어쩌면 싫었을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누나니까. 토요일이면 동생을 만나러 갔다. 명탐정 코난 만화책 두 권과 동생이 좋아하던 땅콩빵을 한 봉투 사들고는 동생에게 갔다. 캄캄한 골목을 지나, 굳게 잠긴 문을 열고, 캄캄한 방의 불을 켜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동생을 불렀다.

'한호야! 누나 왔어!'

누워있는 동생의 입에 땅콩 빵을 잘라서 넣어주며, 누워있는 동생의 눈 앞에 명탐정 코난 만화책을 펼쳐 들어주었다. '누나, 다음'이라고 말하면 만화책을 한 장 넘겨주었고, '누나, 아~'하면 땅콩빵 한 조각을 입에 넣어주었다. 그렇게 나는 누나의 의무를 다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고, 다음날 아침이면 교회에 가야 한다는 핑계로 일찍 집을 나섰다.

내가 동생을 보러 간 것은 두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게는 일 년보다도 더 길었다.


그때는 나 하나 지켜내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한참을 지나고 보니...

한호는 할머니 집에서 지내는 동안, 매일 어둠 속에 혼자 있었고, 채널을 돌릴 수도 없어 틀어진 채 봐야 하는 텔레비전이 유일한 친구였고, 일주일 내내 누나가 오기만을 기다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는 일 년 같았던 그 시간이 한호에게는 얼마나 길었을까.  

매일 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매일매일 엄마와 아빠가, 누나가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래서일까... 나는 지금도 어둠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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