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레스팅 캐릭터(interesting character)
회사 선배가 나를 보면 빵 터지는 날들이 있다. 부장님이 그 선배에게 나한테 관심 있냐고 물었더니 선배가 보고 있으면 재밌다고 한다. 부장님이 “사차원?“ 이러니까 사차원이긴 한데 나쁜 뜻은 아니라고 열심히 포장한다. 아주 평범하고 단정한 베이지색 롱 셔츠원피스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입고 약간 누리끼리한 톤온톤의 양말에 검은색 부츠를 신고 출근한 날이 있었다. 부츠를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더니 전체적으로 비슷한 톤이 되었다. 검은색이나 진회색 얇은 아우터가 있었으면 입었을 텐데 당장 없어서 그나마 어울리게 톤온톤 아우터를 걸친 것이었다. 선배가 왜 이렇게 즐거워했나 했더니 방아깨비가 생각났다고 한다. 길쭉하고 색상이 한 톤이어서 곤충 중에서도 방아깨비가 생각났다고 한다. 부장님이 그게 더 특이하다고 했다. 나의 패션을 보면서 혼자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니 기쁨을 주어서 즐거웠다. 그날 방아깨비 생각을 하니까 하루종일 웃겼다.
거의 모노톤으로 입었더니 방아깨비 같다고 해서 다음날은 금요일이기도 하고 해서 청바지와 흰 티에 대조되는 비비드한 핑크톤의 셔츠를 걸치고 갔다. 여름에 걸치면 시원해 보일 것 같아서 겨울에 할인할 때 미리 사둔 옷이었다. 출근해서 의자에 셔츠를 걸어놓으니까 그 셔츠를 보고 또 빵 터졌다. 점심시간에 대화를 나누면서 나보고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존재라고 한다. 주변에 그런 옷을 입는 사람이 없으니까 보면 즐겁다고 한다. 나라도 한참 어린 남자 후배가 포인트 되게 옷 입고 오고 자기 일은 묵묵히 하면서 말 걸면 재밌게 받아주면 즐거울 것 같다. 8년 차인데 아직도 부서에서 막내인데 그런 일은 언제쯤 생기는 거지? 그런데 나처럼 외관과 실제의 간극이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그 간극에서 주변에 있으면 즐거운 감정이 나오는 것인데 특히 이런 공기업에서는 더더욱 흔치 않다.
겉으로 보면 새침할 것 같고 시크할 것 같은데 털털하고 유쾌해서 좋아하는 것 같다. 스타일 구경하는 것도 재밌고 대화를 나누면 유쾌하니까. 선배는 나의 다른 모습은 모른다. 삶에 꽤 진지하고 보기보다 성실하고 깊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회사일은 성실하게 한다. 불평불만을 잘 안 할 뿐이다. 사수가 없어도, 처음 해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도 그냥 묵묵히 최대한 혼자 자료 찾아보고 고민해 보고 상상력을 동원해가면서 한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 하기 싫고 어려워도 누구한테 말해서 해결되는 것도 없는데, 스트레스는 조용히 혼자 푸는 것뿐이다.
어려운 것을 해결하는 것에 멘탈 내공이 깊다. 살면서 많은 것이 어려웠어서 어렵다는 것에 그렇게 좌절하지 않는다. 숫자 잘 못 읽고 기억 잘 못해도 학교 수학시험에서 100점도 맞고 서울대도 가고 경제학도 복수 전공했다. 그냥 하고자 하는 것에 필요한 만큼만 방법을 찾아서 하면 된다. 경제를 복수 전공할 때 계량경제학에서 난관이 있었는데 커리큘럼 겹치는 인강을 찾아내서 듣고 답안지 써서 낼만큼만 풀이과정 식을 외워서 겨우 패스했다. 수학이 이해가 잘 안 되고 기하학적 사고가 안돼도 경제학 교수 될 것도 아닌데 전공필수 과목 f 안 맞을 정도만 하자는 마인드로 하면 된다. 하기 싫고 재능이 없는 일들은 그런 마인드로 통과해 왔다.
어제는 모처럼 부서 저녁 회식을 했다. 연례행사 수준으로 1년에 한 번 정도 저녁 회식을 한다. 선배가 오빠미소와 아빠미소 그 사이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붓다의 미소 같은 인자한 미소이다. 내가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주는 존재인데 그런 인자한 미소 정도는 나한테 보답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부장님한테 이 선배가 나한테 너무 관심이 많다고 말하며 인자한 눈빛으로 빤히 보는 것에 약간의 불편감과 어색함을 드러냈더니 또 “보고 있으면 재밌다”는 표현으로 답한다. 부장님이 나보고 영어 표현으로 인터레스팅 캐릭터(interesting character)라고 한다. 내 삶의 모토가 영감을 주거나 재미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be inspiring or interesting)인데 인터레스팅한 캐릭터라는 표현을 들으니 내 모토대로 살아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장님이 진정한 인터레스팅한 캐릭터라서 부장님도 “인터레스팅한 캐릭터세요. “라고 말했다. 부장님도 나처럼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인터레스팅하다, 독특하다는 말은 칭찬이다. 칭찬에 칭찬으로 답한 것뿐이다.
2차로 옮겨서 학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서울대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선배가 나보고 “대리님은 성실하지는 않지 않아요? 머리가 좋은 것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나를 잘 모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특정한 쪽으로 좋기는 한데 그게 딱히 공부 쪽은 아닌 것 같다. 공부머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리고 꾀도 잘 쓴다. 시험을 잘 보는 꾀.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에 대한 꾀.
소위 공부를 잘하는데 필요한 암기력, 집중력, 숫자감각 이런 것은 별로 좋지 않다. 목표지향적이고 인내심이 좋아서 공부를 잘하고 싶었을 때는 공부를 엄청 많이 했다. 양으로 승부했던 것 같다. 60점만 넘으면 되는 자격증 시험 같은 경우는 나만의 방법을 찾아서 딱 그만큼만 했다. 뉴로다이버전트라 똑같은 방법으로 공부하면 안 되고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를 들면 문제은행식의 한국사 시험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역사 인강 같은 것을 들으며 역사의 흐름을 공부하는 것은 도움이 안 되고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보고 눈으로 사진을 찍듯 답을 외워서 시험을 보는 것이다. 신경다양인들 중에 수학을 엄청 잘하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사람마다 재능은 달라서 자기만의 재능을 잘 살리면 된다.
너무 성실하고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면 인터레스팅한 캐릭터가 안된다. 맨날 노는 것 같은데 일이 되어있고 시험에서 성적을 잘 받고 그래야 인터레스팅한 캐릭터이다. 인터레스팅한 사람들은 장점을 잘 살려서 활용하는 사람들이다. 겉으로는 웃기고 허술해 보이지만 자기만의 방법으로 이뤄낸 성공 경험이 쌓여 자신감이 단단한 사람들이다. 자신감이 있어야 내려놓고 망가질 수도 있고 웃긴 사람이 돼도 오히려 즐거운 것이다.
바보 같은데 똑똑하고, 똑똑한데 바보 같고, 맨날 간식 먹고 밥을 많이 먹는데 나름대로 탄탄하고, 연애에 관심에 없을 것 같은데 연애에 대해 글 쓰는 것이 취미인 반전에서 인터레스팅함이 나온다.
회사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여러 사람들한테 보고 있으면 재밌다, 재밌을 것 같다는 말을 들어왔다. 예쁘다는 말이 더 좋긴 한데, 재밌다는 말도 괜찮다. 사람들을 웃게 할 때 즐거운 것 같다. 재밌는 사람으로 잘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