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도 눈이 돌아가기 시작했던 순간

몰입의 끝은 사랑의 끝이었다

by 해센스

어디서부터 잘못돼서 관계가 소원해지고 끝나게 됐는지 되짚어봤다.


말로는 거리라고 했지만 처음부터 최소 1년 이상 롱디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로 알고 만났고, 너무 바쁘다고 하기엔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발등에 떨어진 일이 있어도 당장 사랑에 빠져있으면 그런 행동들이 나올 리 없었다.


우리는 최소 삼 주간 겉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각자 다른 것들에 몰두하며 이 연애의 진짜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을 행동으로 표현하기를 멈췄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였을까. 어쩌다가 연애와 사랑에 무척이나 진지했던 우리가, 엄청난 확신과 결심을 가지고 시작한 이 연애를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행동하다가 끝내게 되었을까.


이미 내 입장에서는 2월 내내 여러 가지 면에서 믿음과 신뢰가 깨져있었다.


그리고 내 행동은 알게 모르게 그걸 그대로 보여줬다.


절친 오빠가 너 예민한 모습 한 번도 못 봤는데, 뭐가 예민하다는 거냐고 연애할 땐 예민하냐고 물었다. 그땐 그냥 얘는 신경을 긁는다고 답했다. 정신없고 시끄럽다고 했다(물론 이것을 지적한 적은 없다).


그는 원래 그랬다. 내가 사귀었던 사람들은 원래 처음부터 그들이 가진 모습 그대로였고 나는 그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서 장점을 보고 사랑하기로 결심했다. 눈치 없고, 못 멈추고 계속 혼자 떠드는데 순수한 면이 좋았다. 거짓말은 못할 것 같아서 그 면을 높이 샀다.


내가 예민해지기 시작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그의 모습을 빨간펜 선생님처럼 지적하고, 이것저것 규칙을 만들기 시작한 건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랑에서 빠져나오고 나서 나온 행동이었다.


전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연락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여사친이나 전여친에 대한 대화를 했었는데 이 사람 얘기는 쏙 빼놓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도 모르게 백 퍼센트의 올인과 몰입이 깨졌다.


그리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루 정도 시간을 가졌을 때 이미 난 사랑에서 빠져나왔던 것 같다.


그런 사람인 것 자체가 싫었다. 직전 여친도 아니고 몇 년 전에 사귀었던 전여친인데 여사친이라고 칭하며, 나를 만나기 전에 결혼까지 생각했다던 전여친도 있는데 그때도 이 관계를 계속 유지해 왔던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실망스러웠다.


몰입이 깨지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야가 360도로 넓어졌다. SNS든 모임에서든 전체공개 연애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도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오로지 그에게만 100% 몰입하고 집중했다. 그는 여러 명과 썸탈 수 있었으면 진짜 좋아하지 못했을 것이라 했는데, 그랬다. 우리는 처음에는 몰입했다. 난 그런 줄 알았다.


나를 두번 째 만나기 전날에 여사친/전여친을 만났는 줄 몰랐고, 나와 사귀고 대화하는 와중에 전여친과도 대화하는지 몰랐다.


내가 이해 못 한다고 한 이후에, 모든 전여친들을 다 차단했다고는 했는데, 나는 계속 그가 바람피우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리고 SNS에서 전여친들의 흔적을 뒤져봤다.


내게 처음 헤어지자고 말하던 날, 내 행동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몰랐다. 내가 예민해졌던 건 단지 회사일이 바빠서 피곤하고 스트레스받고, 여자의 신체 사이클 때문인지 알았다.


진짜 문제는 믿음이 사라진 것이었다.


내 화법의 문제는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 번 붙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관계의 지속성과 안정성에 대해 완전히 깨진 신뢰는 이미 깨졌던 믿음과 몰입을 아예 산산조각 냈다.


이제 난 그를 제일 좋아했을 뿐이지, 그 하나만 마음에 두기를 포기했다. 다른 사람들도 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행동에 옮기진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바람피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완전히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는 마음가짐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바람피우지 않는 이유가, 관계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라고.


그 말에 너무나도 공감이 된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서 몰입이 깨지는 순간부터가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실상 바람이고, 사랑이 깨지는 시점이다.


그도 느꼈을 것이다. 헤어지면서 그랬다. 공부 때문에 바빠서 어떻게 연애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부산에 더 이상 친구도 없고, 쓸쓸하다고 했다. 모임도 나가고 여사친도 만들고 만나고 싶은 것 같았다. 이미 내게 몰입이 깨진 상태인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는 믿음이 있으니까 모임이나 술자리에 가고, 또 가게 내버려 두는 관계가 아니다.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몰입이 깨져서, 사랑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만큼 사랑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서 적극적으로 모임에 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이 아닐까.


그에게 차이고 나서 친한 오빠가 운영하는 산책 겸 가벼운 등산모임에 갔다. 어떤 분이 내 옆에 찰싹 붙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산에 올랐다.


목소리가 편안하고 대화도 너무 편안하게 되길래 약간의 호감이 싹텄다. 나는 그에게 산을 좋아하냐 바다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나는 관심 있는 사람한테만 그런 사적인 질문을 한다.


그는 내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다. 내 기준에서는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묻는 건 둘이 같이 잠재적으로 밥 먹을 사이에서나 하는 아주 사적인 질문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그가 결혼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아이들은 아내와 함께 지내고 롱디를 하고 있다고 했다.


산에 올라가는 동안 직장 때문에 그동안 어디 어디 지역에서 살았었는지도 이야기했어서 나와의 대화에서 가족에 대한 얘기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그는 그 정보만 콕 뺐다.


그가 그저 산행하는 동안 나와의 대화를 즐겼다고만 느껴졌다.


결혼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아내에게서 몰입이 깨졌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반쪽짜리, 70퍼센트짜리 사랑은 없다. 100퍼센트의 몰입이 사랑이다.


나의 엑스 역시 나와 만나는 텀을 참는 대신 그저 부산에서 즐기고 싶은 것뿐이다. 다시 바쁘다는 핑계로, 외로움을 방패 삼아 가벼운 관계들로 돌아가겠지.


나는 100퍼센트 몰입하고 100퍼센트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을 함께 할 100퍼센트의 짝을 찾는다. 모든 모임과 술자리는 다 포기할 수 있다. 100퍼센트의 믿음을 깨지 않을 사람과의 관계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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