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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센스 Jun 12. 2024

너무 좋아해서 그렇다

본격 연애상담 이야기

마지막 상담일을 앞두고 선생님한테 남자친구와 대화하다가 느꼈던 강렬한 감정에 대해 물어보고 싶어졌다. 남자친구가 어떤 말을 지나가듯 했는데 분노에 휩싸이고 상처받고 마음이 아팠던 일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다.


이게 이 정도로 화나고 가슴이 아프고 마음을 닫아버리고 싶고 순간 관계에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겁나는 감정이 들 일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평소처럼 역할놀이에 심취해 즐겁게 통화하다가 어렸을 때 좋아했던 가수 얘기가 나와서 노래 이야기로 넘어가던 참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2000년대 초반 가수 얘기를 하다가 남자친구가 자기가 그 가수의 어떤 노래를 잘 부른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여자가 자기가 그 노래를 불렀을 때 설렜다고 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여사친이라고 했다.


아주 옛날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순간 분위기를 싸하게 굳혔다. 오빠 선 넘었다고 했다.


원래 잘 화를 내지 않아서 목소리는 올리지 않았지만, “잠 안 와” 부터 시작해서 길고 긴 통화가 이어졌다. 남자친구는 그냥 계속 미안하다고 했다.


왜 굳이 나한테 다른 여자가 설렜다고 했던 이야기를 하지, 설렌다는 단어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쓰는 아주 강렬한 단어 아닌가 싶었다. 그 상황을 떠올리게 된 것도 싫고, 나한테 굳이 이 얘기를 필터 없이 무심코 한 것도 싫었다.


이번에도 새벽까지 길고 긴 통화를 하며 화 한번 안 내고 침착하게 나와 이야기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자고 일어나면 풀릴 줄 알았다. 그런데 아침에도 안 풀렸다. 남자친구에 대한 감정이 여느 아침과는 달랐다.


오후가 지나가며 내가 매일 썼던 기록들을 읽어보니 나는 이 사람을 정말 많이 좋아하고 특별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었다. 그래도 선생님한테 물어보면서 이 사람을 더 이해하고 내 마음도 돌아보고 싶었다.


상담 선생님한테 이 일과 느꼈던 감정을 이야기했다. 내 남자가 다른 여자 이야기하는데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며 기분 나쁜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순간 화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시간이 조금 지나자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정도로 겁났다고 했다. 선생님이 어떤 마음인 것 같은지 물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른 여자를 이야기해서 생겨난 질투심인지, 나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필터 없이 말한 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돌아봤다. 처음에는 왜 이 정도 배려를 안 해주지 하고 화났었는데, 다음날까지 안 풀리는 감정은 질투심에 가까웠다. 나는 질투심을 느끼면 더 마음이 강렬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놓아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인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 이야기를 하면 무의식에 강렬하게 각인된 불안이 자극되고 뇌에서 위기 상황이라고 인식하고 도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발동되는 것 같았다. 어떤 가벼운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었든 완전히 지나간 과거의 여자 얘기였든 여자 얘기만 하면 화나고 만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식었다.


선생님한테 원래 여자와 관련해서는 굉장히 민감했고 질투심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가정사를 언급하며 내 문제로 치환하지 않았다. 무의식적으로 여자 문제에 있어서 조금 더 예민할 수는 있지만, 그냥 그 사람을 많이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싶었다. 통화할 때 머릿속으로 했던 생각은 ‘나는 이제 이 정도로 확신을 느끼고 마음을 줬는데, 나한테 이렇게 옛날 여자 이야기를 한다고? 아… 괜히 이렇게까지 또 마음을 줬구나. 다시 이 정도로 상처받지 않을 정도로 거둬드리고 싶다’ 였다. 마음을 열었던 만큼, 딱 그만큼 상처받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닫고 싶었다.


선생님이 저번에 남자친구가 나이에 비해 동심이 있고, 이런저런 것 하고 싶어 하고 자유로운 면이 있어서 좋다고 하지 않았냐고 했다. 교류분석 이론에서 자유로운 아이(Free Child)가 아마 높을 것이라고, 천진난만하게 그만큼 자기가 그 노래를 잘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 다른 생각 못하고 말한 것일 것이라고 했다.


그도 내게 그렇게 설명해 줬다. 물론 나도 질투심을 유발하려고 한다거나 원래 내게 그 정도 배려심 없이 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나를 너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을 알아서 불안했던 것도 아니다. 난 그냥 다른 여자 + 설렌다는 단어의 조합이 미치도록 싫었을 뿐이었다.


선생님이 남자친구의 장점 3가지와 단점 3가지를 빠르게 이야기해 보라고 했다. 장점 3가지로는 1) 생각하는 것이 열려있다, 2) 행복하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그리고 부정적이거나 약한 마음을 표현하는 것까지 감정표현을 잘한다, 3) 말을 천천히 부드럽게 하고 느긋하고 옆에 있으면 편안하다 가 있다고 했다. 단점은 1) 가끔 생각 없이 말할 때가 있다 … 그리고 그 한 가지밖에 생각 안 난다고 했다.


장점 2) 번과 단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MBTI F냐고 했다.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내게 F라고 했었다고 했다. 자유로운 아이(FC) 기질이 높아서 그런 것이든, MBTI가 F라서 그런 것이든 단점을 줄이면, 내가 좋아하는 그 장점도 같이 낮아질 것이라고 했다.


그런 관점으로 설명해 주시니 완전히 이해가 되고 마음이 풀렸다. 한 사람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니 행동이 이해가 되고 수용이 되었다.




상담이 끝나고 남자친구를 만나 선생님과 했던 상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자기가 그렇게 말할 땐 이해를 못 하더니 선생님이 말하니까 바로 이해가 되냐고 그랬다. 이론을 가지고 통합적으로 이야기를 해주니 이해가 잘 됐다고 했다 ^^


선생님이 너무 좋아하면 연인의 어떤 말이나 행동에서 완전히 논리를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고 했다. 나보고 어제 완전히 논리를 잃었다고 했다. 스노볼(snowball)이 계속 커져서 애벌렌치(avalanche)가 됐다고 했다. 작은 눈덩이로 시작되어 산사태가 났다고 했다. “나 빠졌나 봐” 하고 인정했다.


선생님이 연인 간에 대화할 때 싫은 포인트를 발견하고, 그 지점에 대해 인지하고 알려주는 것은 건강한 관계라고 했다고 전해줬다. 여자 얘기는 가족 여자 얘기 외에는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해주면 된다고 했다고 했다.


그는 고백할 것이 있다며 자기는 사실 T인데, 친구가 연애하려면 여자한테 F라고 우선 말하고 사귀고 나서 사실대로 말하라고 조언해 줘서 F라고 했다고 했다. T인 것 같을 때도 있었어서 그냥 반반 정도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에겐 충분히 F인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 결혼은 T와 하려고 했어서 잘됐다고 했다. MBTI 이야기를 하다가 같이 일하는 여자팀장님과 본인이 MBTI의 맨 앞 글자만 달라서 처음부터 끌렸다고 했다고 했다.


뭐??????!!!!!!! 과거의 다른 여자 + 설렜다에 이어, 바로 다음날 이제는 현재 같이 일하는 여자와 끌렸다고????


단어선택 조심하라고 했다. 끌린다라는 표현은 다른 이성과 함께 쓸 수 없는 표현이라고 했다. 보통 그냥 사람으로서 잘 맞는다든지 통한다든지 하는 표현을 쓴다고 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풀려고 만난 자리니까 몇 마디만 하고 일단 그냥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다.


자기가 한국말 잘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어렸을 때부터 해외에서 오래 살아서 한국어 단어 하나하나를 잘못 사용할 수 있으니까 봐달라고 했다. 그게 아니었으면 진짜 2차 대전 각이었지만 넘어갔다.


그러면 영어로는 뭐냐고 물었다. Feel the connection이라고 했다. 뭐 커넥션, 연결??!! 커넥션도 딱히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니었다.


결국은 설렜다는 표현은 끌렸다에 묻혔다. 그래도 사람을 통합적으로 바라봐야 하니 내가 좋아하는 그의 장점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상담실에서 이 이야기를 하기를 정말 잘했고, 상담받길 잘했다. 끌렸다라는 단어를 참아낼 수 있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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