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과 1월 1일
연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으로 가득 차있어야 할 것 같고 마음은 따뜻함과 올해의 성취로 인한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 같다.
여느 때처럼 쓸쓸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일도 재미없고 사람들 사이에서도 겉돈다. 1년 동안 내가 따뜻함을 거의 나눠주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다. 몰라서 헤맸던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사무실에서 그 누구와 언성 높이거나 나쁜 감정을 주고받은 것도 없다. 일도 사람도 나를 노골적으로 괴롭힌 적은 없다. 오히려 내가 한 것에 비해 받은 것이 더 많다. 이 정도면 어쩌면 누군가에겐 부러울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
공휴일을 제외하면 매일 주식시장이 열리고 매일 돈을 벌거나 손실을 방어할 기회가 열린다. 아침에 회사 갈 의욕은 없지만 일어나서 주식투자 루틴을 실행해야지하는 원동력으로 매일 아침 잘 안 나오는 도파민을 조금이라도 짜내 침대밖, 집 밖을 나선다. 공부하고 베팅하고 대응하고 매일 바빴다. 국장이 너무 좋아서 글을 발행하지 못했던 것도 있다. 상승장 때 많이 벌고 하락장 때는 아예 주식을 쉬는 전략을 택하고 있어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느라 바빴다.
12월 31일. 공휴일이 아닌데 국장이 쉬는 날이다. 나에게는 휴가이다. 아침에 음악을 들으며 출근하고 싶은데, 매일 주식방송을 듣고 기사를 읽으며 출근했다. 오늘은 음악을 들으며 출근했다. 9시 땡 하면 주식창을 여는데 오늘도 습관처럼 열긴 했지만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쓸쓸한 마음. 주식투자로 인생 바꿔보자고 마음먹었으니까 다른 것들은 조금 포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주식시장이 안 열리니, 다른 힘든 일들을 주식으로 상쇄시키고 있었다는 생각도 든다. 몇 년에 한 번씩 올 수밖에 없는 하락장이 오고, 주식을 거의 다 뺀 상태가 되면 아마 난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공부나 글쓰기로 다시 정신을 다른 데 쏟느라 바쁠 것이다. 나를 바쁘게 하는 것들이 사실 나를 지탱하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느낀다.
남자친구와 최근 같이 하는 게임을 시작했다. 인스타그램 알고리즘에 그 게임을 같이 하는 짧은 영상 추천이 종종 되길래, 가볍게 ”우리도 이거 만들어볼까?“라고 카톡을 보냈는데, ”난 안 하고 싶어. “라고 답이 온다. 부드럽게 말하면 되지 왜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냐고 하니, 이런저런 복잡한 일은 누가 할 건데라고 한다. 무조건 같이 하자는 것도 아닌데 이러저러해서 안 하고 싶다고 부드럽게 말하면 되지 왜 따지듯 말하냐고 하니, 자기가 제안한 것도 아닌데 왜 디테일하게 말해야 하나면서 끝내는 “그냥 하기 싫어. 그게 내 이유야. ”라고 한다. 카톡으로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루의 기분이 와장창 무너진다. 울고 싶은데 뺨맞은 기분이다.
여느 때처럼 미안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한 번 폭락한 하루의 기분이 쉽사리 다시 올라가지 않는다. 좋아하는 언니를 만나 신선한 샐러드를 먹고 고소한 우유에 밸런스가 완벽한 아이스 라떼를 마셨는데도 잠깐일 뿐이다. 언니의 이런저런 고민과 힘든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감춰지지 않는 천진난만한 표정과 목소리에 대비돼 난 언제 이렇게 아이 같은 마음을 잃었나 하고 더 우울감의 늪으로 빠진다.
내 탓. 쓸쓸한 건 사람들에게 더 온기를 나눠주지 않았던 내 탓. 뿌듯함으로 가득 차지 않은 건 기준치가 높은 내 탓. 그보다는 성취에 사실 그렇게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내 성격. 남자친구의 이런 태도에 눈물이 나고 억울함이 드는 것도 이 관계를 어찌 됐든 놓지 않고 끌고 온 내 탓. 올해 들어 특히 더 아이 같음을 많이 잃은 건 주변을 더 어른스러운 사람들로 채우지 못한 내 탓, 아니 내 욕심과 조급함 탓.
결국 내 탓. 모든 게 내 탓. 남 탓하며 일 년을 보냈지만, 12월 31일에 결국 결말은 내 탓.
오늘 내가 더 행복하지 않은 건 행복에 대한 내 명확한 그림에서 기준치를 미달한 것. 행복에 대한 내 그림은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람들과의 의미 있는 관계’, ’누구에게나 자신 있게 정말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 ’다니기 싫은 회사를 다니지 않고 불편한 사람들과 최대한 엮이지 않으며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는 자유‘이다.
이 그림이 그려졌거나 이 그림이 그려지는 과정으로 가고 있다고 느껴져야만 나는 행복하다. 이 그림이 오히려 지워질 때면 나는 행복하지 않다. 아직 꽤나 먼 곳에 있고, 내 통제 밖의 일들로 너무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 행복이라는 나의 그림.
이런 행복이 수치는 아니지만 어쩌면 수치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수와 함께해 온 세월, 정말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 0명 또는 1명(0명이면 0점 1명이면 100점), 무례한 사람들의 무례한 언행의 빈도와 수, 경제적 자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자산의 크기와 내 연평균 수익률과 소비규모 등등…
이 그림이 딱 들어맞을 때만 행복할 수 있다면 난 대부분의 시간에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목표 지향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삶의 태도가 하루하루의 행복을 앗아간다. 성취에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행복이라는 목적을 성취하고자 고군분투한다.
서은국 교수의 행복에 기원이라는 책에 따르면 행복이라는 건 초콜릿 같은 소소한 즐거움의 가랑비에 젖는 것이라는 데, 조금 비싼 초콜릿을 까먹어봐도 좀처럼 올라오지 않은 12월 31일 나의 행복하지 않는 기분의 기원을 파헤쳐본다.
기분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의 전환을 시도해 본다. 목표나 목적이 무엇이 됐든 성취가 아닌 성장을 기준으로 바라보면 스스로에게 좀 더 나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난 어떤 성장을 했나 구체적으로 적고 마음속에 새기고 이런 기분이 들 때마다 꺼내 읽어보면 한 조각의 초콜릿이 입안에서 녹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2026년의 목표도 어떤 구체적인 성취 기준이나 상세한 리스트 대신 ‘성장‘으로 정하면 더 연말에 훨씬 더 행복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2025년. 사고 싶은 것 거의 다 사고, 먹는데 아끼지도 않고 사치도 조금 부렸지만 자산을 굴려서 연봉보다 큰 규모의 자산 상승을 시켰다. 잘 안 맞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려고 애쓰기보다, 그리고 그 틈에서 우울해하기보다 그 시간을 투자와 트레이딩 공부하는데 할애했다. 2021년도에 똑같이 정말 많이 힘들었는데, 그때 외로웠던 시간에 엄청난 성장을 한 것을 바탕으로 올해 초부터 이건 나에게 주어진 엄청난 성장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사람들에게도 같은 상황에 다르게 대처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사실 한 해 내내 매일 뿌듯함을 느꼈다.
1년 내내 나는 누군가를 견뎠고, 그 역시 최선을 다해 나를 견뎌줬다. 희생과 사랑으로 나를 감싸고 우리를 지켜줬고 웃을 일 없는 내 하루에 아이처럼 크게 웃을 수 있는 수많은 시간을 선물해 줬다. 싸울 때마다 내 부족함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어떻게 하면 타인을 덜 화나게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덜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뼛속까지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다.
2024년에 같이 일했던 사람의 방법을 그대로 배워서 2025년에는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했던 사람은 아니지만, 함께 일했던 경험이 내 시간과 고민을 정말 많이 아껴줬다.
같은 관심사와 가치관을 공유하는 언니, 오빠와 모임을 만들었다. 내가 모임을 주도하기 때문에 이 모임을 통해 내가 원하는 성장을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가는 건 야속한데 결정을 못해서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병원이나 다니자 하고 피부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피부과를 다니고, 다른 건강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병원을 열심히 갔다. 눈에 딱 보였던 스팟들이 연해졌다.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 외적으로 눈에 띄는 개선을 시켰다. 이것도 성장이라면 성장이다.
2026년에도 성장하는 한 해가 되자고 다짐한다.
하락장이 온다면 자산을 지키는 방향으로 대처하는데 조금 더 성장한 사람이 되기.
관계가 나 자신을 지키기 힘들어지게 한다면, 나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조금 더 성장한 사람이 되기.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주변을 잘 돌아보지 않고 지낸 지 3년. 이 정도면 충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 것 같으니,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함을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의 온도가 성장한 사람이 되기.
모임과 브런치 치우기.
결국 주변과 비교하지 않고 내 속도로 성장하는데 집중하자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