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의 고요하고 평화로운 하루
안녕하세요
네
이거 레몬차 드세요
앞접시 갖다 주세요
아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드 이걸로 결제했는데 이걸로 바꿔주세요
업무 문의 전화 와서 설명
이런 거 찾고 있는데요
이거랑 이거 주세요
월요일에 늦은 시간으로 바꿀 수 있나요
시간 되는 때 있으면 알려주세요
오늘 내가 한 말들의 거의 전부이다. 약속이 없었으니 수다나 잡담은 일절 하지 않고 실용적인 말만 하고 하루를 보냈다.
출근을 해서 업무처리를 했고 점심도 부서 사람들과 함께 먹었고 필요한 게 있어서 빠른 쇼핑을 했고 운동을 갔다 왔다. 점심시간에 산책도 잠깐 했고 잠깐씩 쉬기도 했다.
외롭지 않고 아주 좋았다. 그 누구도 나에게 사생활을 묻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나의 시공간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은 아니다.
안부가 궁금하고 잡담을 좀 나누고 싶은 사람들도 있는데 내가 해야 될 일에 대해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소요될지 파악을 완전히 못한 상태에서는 그럴 여유가 안 생긴다. 그리고 아직 지난 주의 사람 과부하에서 회복 중이다.
잡담은 원래 거의 하지 않는다. 하루에 업무적인 대화 말고는 안녕하세요만 말한 날도 6년이 넘는 회사 생활동안 매우 많았다. 합쳐보면 3-4년은 하루에 잡담을 다섯 마디 이내로 했을 것 같다. 더 길지도 모르겠다.
하는 것들이 많아 챙기고 공부해야 할 것들이 수두룩해서 잡담을 하지 않아도 늘 바쁘다. 하지만 약간 심심할 때는 있다. 진지한 대화보다는 장난치고 농담을 하고 싶다. 하지만 서로의 조크를 완벽히 이해할 소울메이트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에 꿈도 꾸지 않는다. 괜한 농담을 던졌다가 설명하는 데만 시간이 소요되고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까.
아주 운이 좋게 입사 후 첫 부서에서 사수 과장님이 나와 같은 부류였다. 그는 그 당시 40대 후반 정도였는데 나처럼 아이의 마음을 가진 숨은 천재였다. 대부분의 부서 사람들은 그저 그의 어떤 고집과 말없이 혼자 시간을 보내는 면을 보고 반사회적인 인물로 평가했지만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다. 하루에 한 번씩 지나가며 농담을 하고 장난을 쳤다. 초등학교로 돌아간 것 같은 그런 장난. 그런 순간이 회사 생활에서 재밌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한테 “OO씨 하루에 몇 마디 했어?”라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농담으로 물어본 것이고 악의라곤 전혀 없었다. 그저 동족에 대한 애정이었을 뿐.
그는 숨은 천재였기에 자료만 다운로드해서 붙여 넣기만 하면 가공된 자료가 나오는 엑셀파일을 만들었고 나한테 모든 자료는 처음부터 다 주었다. 그리고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소리 내 의견도 내어주었다. 서로 사적인 대화는 거의 나누지 않았지만 서로가 소울이 잘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외로움을 만드는 것은 대화의 시간이 아니라 분위기이다. 각자 할 일을 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지 않는 분위기면 전혀 외롭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벌어지는 일상의 예측가능성이 좋다. 올해 부서를 옮기고 업무도 약간 바뀌어서 새로 터득해서 해야 하는 일들이 좀 있었다. 시간적으로 밀렸던 일을 끝냈고 업무의 방향성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해서 마음에 여유가 좀 생겼다. 여유가 없었다고 하기엔 난 언제나 여유 넘치게 생활했지만.
부서 사람들을 제외하고 업무와 연관된 사람들이 10명이라 10명 하고만 필요할 때 의사소통을 하면 된다. 그들과의 소통이 어렵지 않고 모두 협조적이다.
부서 사람들도 루틴에 충실하다. 늘 사무실 주변 식당 몇몇 곳(5개 이내)에서 점심을 먹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늘 같은 카페에서 커피를 돌아가면서 산다. 각자가 좋아하는 간식이 있어 자리에서 자기만의 간식을 먹는다.
점심시간과 짧은 회의시간, 때로 길어지는 이야기시간을 제외하고는 각자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 시간에 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머릿속에서 오만 다른 생각이 헤엄치고 있어도 가끔씩 반짝이는 눈망울을 보여주며 고개만 끄떡끄떡 하면 된다.
업무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 대한 터치도 딱히 없다. 내가 해야 되는 일만 때맞춰하면 된다.
이런 규격 안의 자유로움과 평화가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회사 앞날이 어둡다고 하는데 늘 내 살길은 마련해놓아야 한다.
어쨌든 부서의 분위기는 정말 좋다. 안 좋은 일도 몰아서 오고 좋은 일도 몰아서 오나 보다.
아, 난 친한 사람들한테는 말이 많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저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