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만과 편견 4/4

by 파란

산만하고,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거나 지적을 해도 문제행동이 반복되는 아이들을 가르칠 때 난 동생을 겹쳐 본다. 일을 할 때는 동생처럼 가족의 입장으로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기 때문에 오히려 혹독하게 쓰디쓴 말을 내뱉는다. 한바탕 하고 나면 고등학생도 되지 않은 질풍노도 어린 나이의 아이들에게 무슨 짓인가 회의감이 밀려온다.

무엇보다 동생처럼 하고 싶어도 잘 안 되는, 당장의 학원보다 병원이 시급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 난 그 아이에게 동생을 바라보는 마음이 투영된다.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아 단호한 말투로 더 옥죄고 부정적인 내용을 쏟아낸다. 하지만 결국 그 아이에겐 상처만 남을 것이다. 공자는 자기 가족을 가르칠 수 없는 자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 했으니, 죄책감은 더해진다. 내가 누굴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나 될까.

그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행동을 조금이라도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의 오만이다. 이는 동생과 그 아이들을 비슷하게 묶어서 바라보는 나의 편견에서 시작되었다. 반복되는 문제행동들을 통해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고 고쳐보려는 나의 행동들. 물론 나도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충분하다. 나는 선생님으로서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그 누구도 뒤처져서 걷지 못하도록.

옆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들은 평가의 말들은 고심할 만하다. ‘책임감 있는’ '융통성이 없는' ‘고집과 소신 있는'. 나에 대한 수식어들과 함께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으니 좀 덜어내고 힘을 빼라는 조언을 들었다. 충고를 들었음에도 머리론 이해하지만 마음에 와닿지 않는다. 아직도 동생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생각이 현재진행형으로 꽉꽉 뭉쳐있으니 어떻게 덜어낼 수 있을까.

어차피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변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하라고 한다면 난 견디지 못하겠다. 직업 소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할 뿐인 난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할까. 결과를 바라지 않고 그저 최선만을 다하면 그만인 걸까. 그러다 내가 다 타버리진 않을까.

부모님은 동생이 이미 사회인으로서 책임감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문제가 터지면 뒷수습을 해줄 생각을 갖고 계시다. 난 자식을 생각하는 그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다. 또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고 변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이해의 영역일까. 공감의 영역일까. 현재진행형의 문제라 내 안의 결론은 없고 의문만 가득하다.

초등학생이었을 때 동생과 성당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문득 기억난다. 30분 이상을 걸어야 했던 거리였다. 길치였던 난 큰길가 위주로, 엄마가 알려준 길로만 다녔다. 한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동생은 옆에서 잘 걷다가도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사라지곤 했다. 공간 지각 능력이 탁월했던 동생은 샛길이 보이면 그 샛길로 갔다. 난 짜증이 났고 몇 번 화를 내기도 했다. 가던 길로 가야지 왜 자꾸 다른 길로 빠지냐고. 옆에서 동생이 없어지면 찾아야 했고 그렇다고 동생을 따라 낯설고 새로운 길로 가기엔 두려웠다. 신기한 건 내가 가는 길목에 동생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거나 마주쳤던 것이다.

내가 가는 길이 정도(正道)이고, 동생은 틀린 길을 가고 있다고 내 무의식의 저편 어디엔가 깔려 있다. 이는 내가 옳다는 오만과, 동생의 삶에 대한 편견이 깔려 있다. 난 오만으로 가득 차 있으며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편견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들을 해왔음을 인정한다. 다만, 동생이 지금 샛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면 내 울렁거리는 속이 조금은 편안해지는 기분이다. 풀지 못하는 난제의 매듭이 느슨해지는 느낌이다. 사실 무엇이 옳은 생각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다. 나의 오만과 편견을 받아들이고 동생이 걷고 있는 그 길도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난제의 실마리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