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왔다는 제주의 소식을 들으니 3년 전, 제주를 처음 홀로 갔던 때가 기억난다. 아래에 이어지는 글로 다사다난, 우당탕탕, 고진감래, 2020년 연말의 제주 기억을 공유해보려 한다. 아무래도 그 해의 제주를 겪으며 나는 진정으로 제주를 사랑하게 된 것 같으니.
오늘은 꽤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인 것을 무서워했던 내가 이곳에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을 보면. 제주도를 혼자 와야겠다는 결심의 시작은 그 애였던 걸 인정한다. 여름휴가로 갔던 제주에서 알게 된 그는 여러모로 멋있는 사람이었다. 살고 싶은 삶을 차근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 말하는 대로 이루어 내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더 알고 싶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동경과 애정 사이의 마음에서 널 뛰면서 마음껏 설레었다. 동경의 마음으로 그와 만나게 된다면, 나는 동경에 가까워지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애정의 마음으로 그와 만나게 된다면, 사랑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제주도를 ‘혼자’ 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렸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가게들은 9시에 문을 닫고, 처음 혼자인 여행이 두려웠고, 종잡을 수 없는 내가 두려웠지만 마침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고 또 확인해보고 싶었다. 내가 그 사람에게 가진 감정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그에게 오랜만에 연락해 물었다. 연말에 남은 연차를 써서 제주도에 갈 예정인데, 나와 놀아줄 수 있느냐고. 그는 너라면 언제든지.라고 대답했다. 걱정은 물러갔고 기대가 몰려왔다. 혼자인 제주 여행이 그렇게 결정되었다.
그리고 12월 30일.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눈이 엄청 오네. 너 못 오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에이, 설마. 그럼 장화 신고 가지 뭐. 하며 전화를 끊고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가던 중, 내가 탈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제주에는 대설 특보가 내렸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다가 택시 안에서 얼른 가장 빠른 시간의 다음 비행기를 예약했다. 다시 예약한 비행기가 출발하기까지는 5시간 정도의 텀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울하고 아쉽지만 다행스러운 마음으로 공항에 도착해서 멍하니 앉아 잠시 고민을 했다. 아, 가지 말까. 갑자기 대설특보라니. 가지 말란 신의 계시가 아닐까.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떡하지. 등의 고민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떡하지를 100번 정도 중얼대다가 공항 근처에 사는 이모가 생각이 났다.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마침 외출 후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던 이모는 나를 데리러 공항에 와주었고, 우리는 우선 점심을 먹기러 했다.
우리는 팔공산으로 향했다. 오리 고기를 먹을 계획이었다. 가는 내내 이모는 내가 혼자 가게 될 제주를 험담했다. “눈이 그렇게나 왔으면 도로가 다 얼었을 텐데, 니 어디 가지도 못하겠다. 숙소까지 어떻게 갈라고? 공항에 갇혀 있어야 할 걸?” 그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운전을 못하는 사람이니까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는데, 둘 다 안 오면 어떡하지. “코로나 때문에 10시면 식당도 다 문 닫는다며. 저녁이나 먹을 수 있을랑가. 공항에서 혼자 컵라면이나 혼자 먹어야겠네- 이 연말에!” 공항에 내리면 7시쯤 되려나. 아, 그 애랑 근사한 저녁을 먹으면서 할 얘기가 많았는데. “이 추운데 어떻게 돌아다니려고. 괜히 가서 고생하지 말고 이모야랑 눈 구경이나 하러 가자. 응?” 하, 그래. 그럴까. 눈도, 추위도, 혼자도, 코로나도 걱정인데. 그냥 눈 구경이나 하고, 집에서 쉴까. “비행기 취소해라아- 대신 이모야가 재밌게 놀아줄게!” 하아, 그래. 이번엔 제주에 갈 운명이 아닌가 보다. 이모의 제주 험담이 나에게 제대로 먹혀들고 말았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비행기를 취소하고, 그 애에게 전화했다. 이번엔 아무래도 못 가겠다고. 그 애는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보자.라고 했다.
[ 팔공산 한티재 :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과 하얀 솔잎 ]
오리 고기는 아주 맛있었다. 배가 불러지니 어지러웠던 마음에도 여유가 조금 생겼다. 우리는 한티재를 드라이브했다. 온통 하얗게 된 숲 길이 펼쳐졌다. 응달에 차곡히 쌓인 눈과 하얗게 옷 입은 솔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구경하며 가는 내내 감탄했다. 적당한 곳에 주차를 하고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에 내렸다. 흠 없이 새하얀 들판을 처음 더럽히는 영광을 차지하며 얼마 동안을 걸었다. 발을 뗄 때마다 뽀드득- 하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달을 처음 밟았던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생각했다. 마음이 어느새 맑아졌다. 꽤 즐거운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주는 아니지만.
우주인의 마음으로 눈 밭을 한참 누비다가 손과 발을 녹일 겸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얼룩진 거울 같은 호수를 바로 앞에 둔 카페였다. 추운 겨울인데도 물새들이 잔잔한 물결을 가르며 왔다, 갔다 했다. 새들은 안 추울까. 물 묻은 발이 얼면 어떡해, 쟤들은 난로도 없잖아. 글쎄. 발에 피부가 없어서 추운지 모르는 거 아닐까. 그런가. 그런데 닭발에는 살이 붙어 있잖아. 아이고, 그러네. 하며 우리는 물 새들의 겨울나기에 대한 걱정을 주고받았다. 쟤들은 어디에서 잘까, 고민하고 있던 찰나 이모가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너 진짜 혼자 제주도를 가서 어쩌려고 했어? 운전도 못하는 게. 집 나가면 뭘 해도 고생인데.” 나는 대답했다. “제주에서는 고생해도 재밌어. 집에 가만히 있으면 뭐 하냐, 잠이나 잤겠지.” 나는 이모에게 되물었다. “그럼 이모야가 만약에 내였음 어쨌을 거야? 제주도 갔을 거야, 말았을 거야?” 이모는 픽-하고 웃더니 대답했다. “내라면 갔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헐! 하면서 이모에게 물었다. “근데 왜 내한테는 가지 말라고 했는데?” 이모는 까르륵- 웃으며 대답했다. “너네 엄마가 니 못 가게 말리라던데.” 하고. 엄마와 이모의 작당이 있었다니. 청개구리 심보가 올라왔다. 아무래도 억울했다. 호수를 멍하니 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발이 얼든 말든 찬 물을 가르며 제 갈 길을 가는 물새가 있었다.
물 새가 만든 물 길 위로 반짝, 하고 윤슬이 빛났다. 갑자기 제주를 안 가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는 망설이고 미루다가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끝나가고 있는 스물일곱에 후회만 더하는 꼴이 되고 말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데, 이렇게 아무 일도 없이 심심하게 스물일곱을 마칠 수는 없었다. 하물며 저 조그만 새도 맨 몸으로 겨울을 가르며 사는데, 나는 몇 주 전 새로 뽑은 두툼한 무스탕 코트도 입었으면서. 나는 뛰는 가슴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취소했던 제주행 비행기 표를 다시 끊었다. 발권된 비행기 표를 이모의 코앞으로 들이밀며 “이모야, 이것 좀 봐.” 했다. 이모는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뭔데, 진짜가? 어? 표 다시 끊은 거가?” 이모의 반응에 묘한 승리감이 들었다. 나는 벌떡 일어서면서 말했다. “나가자! 공항에 태워줘.” 이모는 아하핫, 웃으며 말했다. “아유, 너네 엄마한테 한 소리 듣겠다. 모르겠다 그래, 잘했다. 가보자!” 아무 일이라도 일어날 여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