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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Nov 26. 2022

위대한 유산

엄마와 함께 갔던 제주에서 찾은 것.

올해 여름에는 엄마랑 제주를 다. 가장 좋아하는 동쪽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고르고 골라 다녔다. 엄마는 집으로 먼저 돌아가고, 나는 제주에서 혼자 며칠을 더 머물다. 적당히 쓸쓸하고 지루했던 그간의 홀로 제주도 참 좋았지만, 엄마랑 함께인 여차저차 알찬 제주도 참 좋았다. 엄마는 이번 여행에서 다 큰 딸을 새삼스러워했다. 내일이면 서른인 딸이 운전을 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엄마를 챙기는 모습이 참 희한하다고 했다. 엄마는 운전하는 내 모습을 한참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더니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다 키웠다, 내년에는 니 애인이랑 셋이 오자! 하면서. 둘이 오면 둘이 왔지 셋이 올 일은 없겠지만 어쨌든 여행의 시작에 엄마가 있어서 괜히 든든했다. 타지에서 처음 운전을 하는 나에게 좌회전은 우회전으로, 우회전은 좌회전으로 말해주는 조수석의 엄마였음에도. 같은 길을 몇 번이고 돌아도 괜찮았다. 빙빙 돌아서 찾아간 맛집이 하필 휴일이어도 괜찮았다. 짜증 없는 순탄한, 게다가 퍽 행복한 시간이었다. 엄마와 나의 여행인데도.


내 가방에는 책이 네 권, 엄마의 가방에는 두 권 들어있었다. 여행 동안 그 책들을 펼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딜 가든 꼭 챙겨 나서긴 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음악을 틀지 않았다. 둘 다 말없이 조용히 가다가 예쁜 길이 나오면 오- 길 좋다-! 하고는 각자 이름 모를 노래를 잠시 흥얼거릴 뿐이었다. 바다 앞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카메라를 들었다. 각자 서로의 바다를 충분히 찍은 다음에는 바다 앞에 선 서로의 모습을 번갈아가며 찍어줬다.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면, 항상 사진을 이상하게 찍는다며 핀잔을 듣는 쪽은 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핀잔을 주는 쪽이었다. 엄마는 나보다 더 사진을 이상하게 찍는 사람이었다. 계획했던 우도도 못 갔고, 함덕의 해바라기 밭도 못 갔고, 월정 해변도 못 갔다. 하지만 우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저 다음에 가보지 뭐, 하면 그만이었다. 대신 마음에 쏙 들어버린 동네 앞바다에서 점심도 굶어가며 반나절 내내 스노클링을 했다. 계획했던 바쁜 일정보다 갑자기 눈에 들어온 잔잔한 여유를 누리는 것이 더 행복한 우리였다.

바다에 드러누운 귀여운 엄마

찾아뒀던 맛집에 손님이 너무 많을 때는 그 옆에 있는 조용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1등 맛집 옆집은 2등 맛집 일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의 모든 식사는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숙소로 들어갈 때는 편의점에 꼭 들렀다. 맥주 없는 여행지의 밤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맥주만큼은 항상 넉넉하게 샀다. 우리에게 맥주가 아쉬운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씻고, 맥주를 먹고, 조금 누워 있다가는 꼭 밤 산책을 했다. 구름이 많은 탓에 별을 보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긴 했다. 첫 번째 숙소에 나는 칫솔을 놔두고 왔고, 엄마는 카디건을 놔두고 왔다. 떠나기 아쉬웠던 동네였는데,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 번 더 들릴 수 있게 되었다.


이번 여행 내내 내가 이렇게 할래? 하면 엄마는 그래!라고 했고, 엄마가 저렇게 할래?라고 하면 나는 그래!라고 했다. 집에서는 안 맞다, 안 맞아- 하면서 살았었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엄마는 참 나 같은 사람이었다. 나는 참 엄마를 닮은 딸이었다. 하다못해 오른쪽 발 네 번째 발가락의 티눈마저 닮았다. 멋진 일이다. 나보다 앞서 삶을 시작한 나 같은 사람이 나를 낳고 길러서 내 옆에서 살고 있다. 내일은 꼭 엄마에게 제주의 잠잠히 뜨거운 일몰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장면을 엄마도 분명 좋아할 테니까. 이번 여름, 엄마와 함께인 제주에서 나는 참 멋진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참, 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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