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seth Sep 20. 2022

원래는 욕지도를 가려고 했다.

파워 P들의 무계획인 듯 계획인 듯 무계획 캠핑

출근도 하기 전부터 퇴근이 마려운 금요일. 유독 하루를 마치고 그들이 또 모였다. 누군가는 그들을 "기메진패거리", "또 가들(또 그 아이들)", 등의 이름으로 부르곤 했다. 사실 그들 "복희, 춘자, 방실"이라고 부르는게 맞았는데, 각 각 "예삐, 메진, 라모"라는 본체를 가진 그들은 섬에 갈 때만 "복희, 춘자, 방실"이 되었다. 아무도 그렇게 하자고 정한 적은 없지만, 이번에도 섬으로 가는 차에서부터 그들은 서로를 "예삐, 메진, 라모"가 아닌 "복희, 춘자, 방실"로 서로를 불렀다.


다 큰 가시내들이 남자 만나 시집갈 생각은 안 하고 노상 지들끼리만 놀러를 다닌다고 한 소리씩의 배웅을 받으면서도 그들은 야밤에 좋다고 집을 나섰다. 이번에도 복희가 운전대를 잡았다. 팅커벨 같은 외관과는 다르게 8기통 엔진 같은 소울을 가진 복희 덕분에 예정보다 빠르게 통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는 통영 시장이 집 앞의 신평리 시장보다 더 훤한 정도였다. 분지 도시의 여자인 그들은 어쩐지 섬에 환장을 해 있었다. 제주도, 비진도를 부수고 이번에는 욕지도의 차례였다. 그러나 인생이란 마음먹은 대로 흐르지 않는 법. 대구에서 출발한 그들이 창원 쯔음 왔을 때였다. 춘자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한 통 왔다. 내일 아침 욕지도로 들어갈 배를 예약한 해운이었다. <중화~욕지도 배편 태풍 난마돌  피항으로 인하여 9/18(일)~9/19(월)까지 결항입니다.>

아.. 인생..!

"야 어떡해..? 결항이래." 춘자가 말했다. 춘자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당황한 기색이 덜했다. "에엥? 진짜?" 복희는 춘자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뻥이길 바랬는지, 뻥인 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처음부터 복희는 춘자의 말을 믿지는 않았다. "헐~진짜? 보자!" 방실이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춘자가 건넨 휴대폰에 분명히 있는 문자를 읽고 나서야 그들은 춘자의 말이 사실임을 받아들였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다. "어떡하지..?" 그나마 가장 J(판단형: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성향) 사람인 복희가 먼저 입을 뗐다. 한숨이 이어졌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욕지도였는데... 드라이브도 하고 노을도 보고 물놀이도 하고 고등어회도 먹고 짬뽕도 먹어야 했는데... 아.. 인생.! 그러나 그들은 다행히도 모두 P(인식형: 즉흥적이고 유연한 성향) 사람들이었다. 시당초 그들에게 계획이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잠깐의 실망 타임이 있긴 했어도 그들은 곧바로 다음 계획을 만들어냈다. "에이 몰라~ 일단 술독빠(술독에 빠진 사람들: 복희가 2년 전부터 눈독을 들였던 통영의 킹왕짱 맛집.)부터 가고.. 내일 보고 캠핑장 알아보던지 아니면 그냥 아무 바닷가에 가서 텐트 펴~!" 그나마 J사람인 복희의 정리였다. "구랭! 어떻게 되겠지! 어우 멀미 난다." 근처의 캠핑장을 찾겠다고 휴대폰을 들여보다가 멀미를 얻은 춘자였다. "구랭! 니 혼자 뭐 먹고 왔어! 어! 창문 좀 열으라!" 핀잔인 듯 걱정인 듯 놀림인듯한 방실이의 마무리로 그들의 무계획은 계획이 되었다.


누가 그랬다. 명언 있는 집은 웬만하면 맛집이라고.

술독빠에 도착한 그들은 "P사람들" 답게 "아무거나"라는 메뉴를 시켰다. 무계획을 계획으로 정한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믿음직스러운 이름이었다. 오늘은 맥주 한 잔만 먹어도 취할 것 같다던 방실이와 소주는 못 먹는 춘자와 청하가 없어서 실망했던 복희는 "술독빠"의 이름에 걸맞은 밤을 보냈다. 새우, 가리비, 게, 전복, 소라, 전어무침, 생선구이 6종, 등등.... 빈틈없이 채워지는 "아무거나"의 식탁에서 그들은 소주병을 쌓아 올렸다. "오히려 좋아!" 결항된 배편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다음 날. 체크아웃 시간을 꽉 채우고 나온 그들은 술독빠의 사장님이 추천해주신 쫄복국으로 뜨끈히 해장을 했다. "그래서 어디 갈래..?" 가장 먼저 속이 다 채워진 춘자가 말했다. "캠핑장이나.. 해수욕장 가면 될 것 같은데?" 캠핑 짬이 그래도 조금 있는 방실이의 대답이었다. 계획이 된 무계획에서 크게 진전이 없는 대화였다. "일단 장을 보고.. 해수욕장이나 한 번 가볼래?" 복희가 내려준 결정이었다. "구랭! 근데 일단 저 앞에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좀 먹자." 식당 옆의 커피집을 미리 봐놨던 춘자의 보탬이었다. 그들은 든든해진 배에 시원한 아.아로 카페인을 했다. 기운이 솟았다. 기세를 몰아 그들은 통영 시장으로 돌진했다. 먹는 것에는 이견이 없는 탓에 금방 장보기를 마친 그들은 해수욕장으로 출발했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길에 그들은 태풍이 온다는 소리가 무색하게 창창한 날씨에 잠깐 억울해하다가, 새파란 바다에 감탄하다가, 그래도 밤에 갑자기 비가 많이 오면 어쩌나 걱정하다가, 15분 거리에 있는 캠핑장을 찾아냈고, 그냥 여기 갈래? 그래! 하고서는 갑자기 캠핑장을 예약했다. 그래도 원래는 해수욕장에 텐트를 피려고 했으니, 잠깐 해수욕장에 들린 그들은 여기도 좋긴 좋네! 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서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맥주를 사기 위해서였다.


통영의 알 수 없는 길과 편의점이 아닌, 가장 가까운 편의점이 있는 호텔으로 우리를 안내한 내비게이션 덕분에 약간의 추가적인 관광을 하고 나서야 그들은 캠핑장에 도착했다. 갑자기 예약한 캠핑장은 깔끔하고 쾌적하고 조용했다. 역시. 무계획이 가장 멋진 계획임이 다시 한번 입증되었다. 캠핑 짬이 조금 되는 복희의 리드에 따라 생각보다 금세 텐트를 완성한 우리는 키조개를 구워 먹고, 가리비도 구워 먹고, 한우도 구워 먹었다. 한우에는 복희의 생일 초를 꽂았다.

텐트 안에서 풍선 부는 소리를 복희가 다 들어버리는 바람에 깜짝 파티는 못했지만 확실히 웃긴 파티는 되었다. 복희가 사 온 멋지고 맛진 와인과 증류주와 뜻밖의 관광을 하게 한 맥주도 먹었다. 볶음밥도 먹고 칼국수 라면도 먹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으로 뱅쇼도 끓여 먹었고 마시멜로우도 구워 먹었다. 먹고 먹고 먹었다. 계획했던 롤링페이퍼 타임은 갑자기 불어닥치는 강풍 탓에 급하게 마무리되었지만, 그들은 정말이지 배도 마음도 꽉 찬 하루를 보냈다.

세 여자가 함께인 모양을 멀리에서 봐 온 감자는 이렇게 말했다. "너네는 딱 그거야. 죽마고우, 도원결의. 그러니까 누구 하나 시집가기 전에 많-놀아둬." 춘자는 그 말이 멋지기도 하고 슬프기도 했다. 시집을 간 다음에도 세 여자가 죽마고우로써 도원결의하며 살았으면, 했다. 그때에는 캠핑이 아니라 김장을 하면서 라도. 원래는 욕지도에 갔어야 했던 복희, 춘자, 방실은 섬 밖에서도 복희,춘자,방실으로 자-알- 놀았다. 못 간 욕지도는 다음에 가면 될 일이었다. 모든 것이 오히려 좋았던 P사람들의 꿈같은 2박 3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