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호통으로 자기 불신의 늪에 빠져 지낸 나에게 보내는 위로
마흔 살. 살면서 한 번씩 생각나는 인생의 몇 장면이 있다. 이 글은 그중 한 장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아이였고, 반에 무슨 일이 생기면 친구들이 일제히 쳐다보며 '어떻게 좀 해보라'는 사인을 보내는 리더십 있는 아이였다. 그런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 앞에서 심한 굴욕감을 느낀 적이 있다. 한 선생님 때문에.
그녀는 내가 졸업한 중학교 국어 교사였다.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젊은 여성으로, 30대 중반쯤 됐을 성싶다. 국어수업 시간이었는데, 앞뒤 맥락이 기억나진 않지만 그녀가 뽀얀 얼굴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어떤 어른이 되고 싶니?"
대한민국에서 주입식 교육을 받은 아이들 답지 않게 손을 번쩍 든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 여겼고 정답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 보다 앞서 대답을 한 아이들이 그럴싸한 대답을 툭툭 내놨다. 나도 질 수 없어 나름 멋을 내 말했다.
"남들한테 손가락질받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뽀얀 얼굴의 청순미 넘치던 국어 선생님 얼굴이 순간 굳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표정이 역력하더니 급기야 내게 따져 물었다. 그녀는 내게 무척이나 화를 냈는데, 정확히 기억나는 말은 이것뿐이다.
"옳은 일을 하면서도 손가락질받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니?"
그다음의 말들은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아마도 정의 편에 서서 싸우거나 지지함으로써 다수로부터 비난받는 어른들의 억울함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 같다.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말이 뭐였던, 그 순간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왜 내게 화를 내는지 그저 선생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우두커니 서서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랐던 그때의 내 모습과 반의 리더였던 내가 된통 혼나는 모습을 보던 아이들의 혼란스러운 시선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가 전교조(전국교직원 노동조합)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나이 지긋한 선생님들은 물론 또래 선생님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본인 생각에 옳은 일을 하는 정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는 어른, 그녀 자신이었던 거다.
사실, 선생님의 상황을 중학생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웠다. 전교조란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다른 선생님들이 욕하는데 왜 그만두지 않는지도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그렇다고 나한테 왜 화를 낸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내게 일종의 '선생님 트라우마'로 남게 됐고 남은 중학생 시절은 물론 고등학생 시절에도 선생님을 제대로 대한 적이 없다. 그들을 미워했고, 얕봤고, 무시했다. 어리고 자존심 센 여학생의 방어기제가 그런 식으로 표현됐다.
또 내 대답은 정답 일리가 없다는 자기 불신에 한동안 꽤 괴로웠다. 말과 행동에 확신이 서질 않았고, 무슨 일 앞에 머뭇거리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항상 '그 사람 때문이야'라는 원망이 독을 뿜었다.
이 증상은 세월을 따라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갈수록 옅어졌지만, 자기 불신 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면 늘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런데 마흔이 되고 보니, 지금의 나보다 어렸을 그때 그 선생님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된다.
보수적인 소도시의 작은 여자중학교 여교사가 감당하기엔 버거운 상황이 있지 않았을까, 다수의 무리에 끼어 편하게 관망하는 대신 본인의 의지와 뜻을 내세우되 조금은 불편한 길을 걷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서 마음이 상처들로 파이고 아물고를 반복하며 좀 더 여물어가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그날 한 학생에게 자신의 감정을 다 내보이고서 집에 가선 어쩌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날 교실에서 13살 여학생을 세워두고 억눌린 감정을 폭발시켜버린 선생님을 지금의 내가 만난다면 분노의 화살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지 않게, 감정을 태도로 드러내지 않게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그저 그날 교실의 무거운 공기와 창피함에 얼굴이 달아올라 도망가고 싶었던 감정을 이제 툭, 손에 쥔 귤 하나 떨어뜨리듯 내려놓으려 한다.
마흔이란 나이가 반드시 과거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해야 하는 나이는 아니다. 자연스레 용서의 마음이 드는 나이도 아니다. 다만 가슴 어딘가에 끼여서 가끔씩 나를 답답하게 했던 과거의 어떤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용기가 생기는 나이인 것 같긴 하다.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과거의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까지 27년이 걸렸다. 마흔 살이 돼서야 수치심에 울음 삼키는 소녀의 어깨를 토닥일 용기가 생겼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이 한 마디가 그렇게 고팠는데,
스스로에게 해주고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