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녀의 리츄얼7] 백제, 콰이어트 럭셔리의 원조

화려함을 덜어낸 자리, "완성도'가 남았다.

by Sunshine

신라의 뷰티가 눈부신 금관과도 같은 '화려함(Fancy)'이었고, 고구려의 뷰티가 대륙을 달리는 말발굽 같은 '역동성(Wild)'이었다면, 백제의 뷰티는 고요한 호수 위에 뜬 달, 혹은 새벽녘의 안개와 같았다.

​앞선 글들에서 우리는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맥시멀리즘과 에너지를 탐구했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 서쪽으로, 백제로 돌리면 전혀 다른 결의 미학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최근 패션과 뷰티, 그리고 예술계를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인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겉치레를 걷어내고 본질에 집중하는 태도, 백제의 미학은 1,5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 현대의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진짜 럭셔리인가?"​

은성민 작가와 박종민 작가의 찻그릇 https://www.esquirekorea.co.kr/article/84787


백제의 토기와 캐시미어

​1. 브랜드 슬로건: 검이불루 화이불치 (儉而不陋 華而不侈)

​백제의 뷰티 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는, 마치 명품 브랜드의 설립 이념과도 같은 문장이 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1]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궁궐에 대한 묘사다.
이것이 바로 '콰이어트 럭셔리'의 정수다.
로고가 크게 박힌 옷으로 부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와 핏(Fit)만으로 자신의 품위를 증명하는 태도.
백제는 화려함을 억누름으로써 오히려 더 깊은 우아함을 만들어내는 '절제의 미학'을 이미 알고 있었다.​

2. 금빛을 '검은색'으로 덮어버린 대담함​

이러한 백제의 미학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유물이 바로 '무령왕비의 귀걸이'다.​
보통 귀걸이라 하면 반짝임을 극대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된 무령왕릉 출토 귀걸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격적인 디테일을 발견하게 된다.
순도 99%의 영롱한 금판 위에 검붉은 색 안료를 덧입혀 놓은 것이다. [2]
​나선민 학예연구사는 이를 두고 "반짝이는 금과 대비를 이루는 흑색, 적색을 칠해 일부러 금빛을 덜 노출시키는 '절제된 화려함'을 추구하는 게 백제의 미학"이라고 설명한다. [2]

​생각해 보라.
가장 비싼 금을 써놓고, 그것이 너무 번쩍거릴까 봐 일부러 색을 칠해 광택을 죽이는 태도.
이것은 "나는 굳이 금이라는 걸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독한 자신감이자, 현대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로고를 없애는(Logoless) 방식과 소름 돋게 닮아 있다.


​3. 로로피아나보다 '더 로우(The Row)'​


만약 백제의 왕비가 21세기에 환생한다면, 그녀는 어떤 브랜드를 선택했을까?
단언컨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더 로우(The Row)'의 VIP가 되었을 것이다.
​'더 로우'는 겉보기엔 그저 심플한 코트나 니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을 입어본 사람은 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건축적인 선(Line), 완벽하게 마감된 안감, 그리고 타협하지 않은 소재의 퀄리티를.
​백제의 유물들도 그렇다.
무령왕비의 은팔찌는 겉면이 매끈하다.
하지만 그 안쪽, 보이지 않는 곳에는 용의 형상과 만든 장인 '다리(多利)'의 이름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3]​

무령왕비 은팔찌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6502953&ccbaKdcd=11&ccbaAsno=0001


브랜드 The Row 공식 홈페이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함이 아니라, 착용한 나만이 아는 디테일과 완성도. 백제는 단순히 비싼 재료를 쓴 나라가 아니었다.
그 재료를 가장 완벽한 비율과 디테일로 완성해 낸, 지독한 '디테일 장인'들의 나라였다.


​4. 백제의 흙에서 박서보의 '단색화'를 보다


​이러한 백제의 정신은 현대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단색화(Dansaekhwa)'와도 맥을 같이한다.​
세계 미술계가 열광하는 故 박서보 화백의 작품을 보자.
그는 캔버스에 화려한 이미지를 그리는 대신, 물감에 젖은 한지를 끊임없이 밀어내고 긋는 반복적인 행위(수행)를 통해 '물성(Materiality)' 그 자체를 드러냈다.


백제의 토기나 향로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은 금속과 흙이라는 재료의 본질적인 질감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그 안에 수천 번의 정교한 손길을 더해 무한한 깊이를 만들어냈다.​
박서보의 캔버스가 '비움으로써 채운' 세계라면, 백제의 미학은 '덜어냄으로써 완성한' 세계다.
화려한 색채를 배제하고 오직 선과 결, 그리고 반복적인 리듬감으로 완성된 두 예술은 1,500년의 시차를 두고 서로 공명하고 있다.​


5. 마케터의 시선: '클린 걸'의 역설과 백제의 계획성​

예술과 역사가 보여준 이 '덜어냄의 미학'을, 이제 우리의 얼굴(Beauty)로 가져와 보자.
​여기서 우리는 요즘 뷰티 트렌드인 '클린 걸 에스테틱(Clean Girl Aesthetic)'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흔히 '클린 걸'을 화장기 없는 수수한 모습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마케터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거대한 착각이다.​
진정한 클린 걸은 단순히 파운데이션을 얇게 바른 사람이 아니다.
수면, 식단, 운동, 그리고 섬세한 관리를 통해 피부 장벽을 속부터 탄탄하게 설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계획된 속광(Inner Glow)'의 영역이다.
​즉, '가장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가장 치열하게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
이것이 클린 걸의 역설이자 핵심이며, 백제의 미학이 위대한 이유다.​
백제 유물의 그 심플한 우아함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은팔찌의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기 위해, 금귀걸이의 톤을 맞추기 위해 그들은 작업 전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우연에 기대지 않는 치밀한 설계(Design)가 있었기에, 그들은 겉을 화려한 장식으로 덮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에필로그:
멈춤(Pause), '파인 뷰티(Fine Beauty)'를 위한 설계

​백제의 장인들은 어떻게 그토록 완벽한 금동대향로를 남길 수 있었을까?
그것은 단순히 손이 빨라서가 아니었다. 정을 들어 깎아내기 전, 완벽한 설계도(Blueprint)를 머릿속에 그리기 위해 가졌던 치열한 '멈춤'과 '사색'의 시간 덕분이었다.
​우리의 K-뷰티도 이제 그런 시점을 마주하고 있다.
식문화로 비유하자면, 지금의 K-뷰티는 '비비고(Bibigo)'가 이뤄낸 대중적 성공의 궤도와 닮아 있다.
전 세계 어디서나 접근 가능하고, 누구나 좋아할 만한 훌륭한 품질로 세계인의 화장대를 점령했다.
이것은 분명 박수받아 마땅한 대단한 성취다.
​하지만 식문화에 대중적인 맛집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가격을 지불하고서라도 기꺼이 찾아가게 만드는 '미슐랭 파인 다이닝'도 존재한다.
그곳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셰프의 철학이 담긴 디테일과 완벽한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이 요리를 내기 직전, 분주했던 손을 멈추고 접시를 응시하며 완벽을 기하듯, 이제 우리 뷰티 기획자들에게도 그런 '의도적인 멈춤'이 필요하다.
​빠르게 트렌드를 소비하는 제품도 필요하지만, 이제는 백제의 토기처럼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 사용하는 사람의 삶에 깊은 울림을 주는 '파인 뷰티(Fine Beauty)'를 시도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그 완성도는 공장에서 빠르게 찍어내는 속도가 아니라, 기획자가 책상 앞에서 멈추어 서서 "이 제품이 소비자에게 어떤 감각적 경험(Ritual)을 줄 것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사색의 총량에서 나온다.​
백제의 장인이 완벽한 밑그림이 설 때까지 정을 들지 않았듯,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뷰티는 단순한 제품을 넘어, 섬세한 배려와 철학이 깃든 '작품(Masterpiece)'이 되기를 바란다.​
진정한 럭셔리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충분한 사색을 통해 방향을 정한 기획자만이 제안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정성이다.​

참고문헌
[1]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조"십오년춘정월 작궁실 검이불루 화이불치(十五年春正月 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기록 인용.

​[2] 동아일보, <백제 왕족 귀걸이엔 붉은색 칠이… ‘절제된 화려함’의 정수>국보 '무령왕비 금귀걸이'에 대한 분석 및 나선민 학예연구사 코멘트 인용.​

[3] 무령왕릉 은제 팔찌 (국보 제160호)1971년 공주 무령왕릉 왕비의 관 안에서 발견된 유물. 팔찌 안쪽에 제작 연도(520년)와 만든 장인 '다리(多利)'의 이름이 새겨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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