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차이나 타운' 리뷰
[여자 누아르]
Q. 누아르(Noir) 특유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A. 출구 없음 (No Exit)
이 영화는 손쉽게 ‘여성 누아르’로 불리곤 한다. 하지만 단지 짜장면이 검은색(Noir)이기 때문에 혹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요 주체가 여자이고, 그 여자들이 검은 옷에 피를 묻히는 장면이 많다고 해서 그 별칭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아르라는 장르가 발버둥쳐도 도망칠 수 없는 연옥적 세계 위에서 특유의 분위기와 관객을 몰입시키는 힘을 얻는다면, 이 영화는 기존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출구 없는 세계를 안내하면서 누아르라는 장르에 도착한다.
차이나타운, 미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 혹은 배에서 내린 나인틴 헌드레드의 이야기. 그러니까 지하철 락커 10번에서 태어나기로 결정한 여자가 Noir noodle(짜장면)을 먹고사는 이야기이다.
[10]
영화는 핏덩이인 일영이 캄캄한 지하철 락커에서 발견되어, 마우희에게 팔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어둠’과 ‘범죄’ 그리고‘피바다’라는 누아르의 기본 조건을 갖춘 셈이다.
마우희는 ‘엄마’라고 불리지만 차이나타운에서 대출이자를 장기로 받는 범죄조직의 보스이다. 어린 일영은 앵벌이에 동원된 후 쏭 등과 함께 길거리에 버려지지만, 쏭을 구해서 마우희에게 돌아온다. 기존의 많은 누아르가 조직의 손아귀에서 탈출하려다가 실패하는 비극을 보여주는 것과는 반대로 차이나타운은 주인공이 제 발로 조직의 손아귀로 돌아오면서 비극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서 마우희는 어떻게 돌아왔는지 묻지도 않고 짜장면을 내주고 일영은 왜 버렸는지 묻지도 않고 곱빼기를 외친다. 질문 대신 주어지는 것은 짜장면 곱빼기이다. 그러니 짜장면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둘의 침묵에 대한 대변이고 곱빼기는 메시지의 강조가 된다.
“여기가 이제부터 내 집이야”
사람들이 이사를 할 때 짜장면을 먹는 이유가 이 메시지를 삼켜 마음에 담기 위함이라면 영화 전반에 걸쳐 계속 등장하는 짜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집 찾기)과 표현양식(누아르)에 적합한 소재라고 할 수 있겠다.
[호모 파베르]
‘밥 먹었으니 일해야지’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의 도치법과 같다. 영화는 이제 어두운 범죄 골목의 세계에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처절하고 잔인한지 보여주기 시작한다. 차이나타운에서 엄마와 자식들의 관계는 생존게임 중에 서로의 가치를 확인해낼 때에만 유지된다. 자식들은 엄마가 시키는 것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이행해야 한다. ‘하거나 안 하거나(1,0)’그것이 이곳의 방식이다. 따라서 고민과 숙고의 시간은 하는 방식의 효율성을 위해서만 허용되고, 하는 것 자체의 정당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필요 없으면 죽임 당하는 영화적 설정 위에서, 임무의 성공을 위해서 행해지는 어떠한 극악무도한 ‘짓’도 그 설정 자체의 잔인함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소 현실과 동떨어진 조직의 세계와 낭자한 혈흔을 통해서도 잔인한 현실과 영화적 설정의 공통점(예를 들면 장기로 빚을 갚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인신매매이고 해외로 몸을 파는 여자들, 더 나아가 소위‘자기 PR시대’라는 현실도 넓은 범위의 인신매매이다.)을 느낄 수 있다. 약하면 죽는 것이 정글의 법칙이라면, 강한 단체에서 필요가 없으면 버려지는 것이 세련된 정글, 즉 사회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도구적인, 너무나 도구적인]
영화에는 빚을 진 사람들이 잔뜩 나오고 석현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지만, 사실 영화가 가장 빚진 캐릭터는 바로 석현이다. 마우희는 석현의 친절함에 인간성을 자각하는 일영의 흔들림을 잠재우기 위해서 석현을, 석현의 아버지는 제 살길 찾기 위해 석현을, 파스타집 사장은 인건비를 아끼기 위해 석현을, 홍주는 밥 먹고 일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석현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누아르의 비극성을 더 강화하고, 영화 후반부의 핵심이 되는 마우희와 일영의 오해를 빚어내기 위해 석현을,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이처럼 석현의 영화적 기능이 너무 무겁다 보니 다소 개연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발단-전개-위기로 가기 위한 에스컬레이터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에스컬레이터는 참 편하지만 사극에서 나온다면 곤란하다.
[풋워크]
우여곡절 끝에 위기에 도착한 영화는 마우희의 선악을 분간키 어려운 개입 속에서 치도를 악의 축으로 두고 쏭, 우곤, 홍주, 삼촌 등의 캐릭터를 필름 위에 버무리면서 일영을 핀치로 몰아세운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왜 다른 캐릭터들이 아니라 일영이 이 영화의 주인공일 수 있는지, 아니 그래야만 하는지를 그녀의 쌍꺼풀이 없는 침전된 눈과 연기력뿐만 아니라 서사적인 필연성 속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캐릭터는 모두 어떤 식으로 건 누아르에서 살 수 있도록 적응을 잘 해내거나(치도, 우곤) 잘하려는 과정에서 다소 나사가 빠지는(홍주, 쏭 등)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우희가 일영을 계속 데리고 있으며, 마침내는 자신의 딸로 여기는 이유는 일영이 진창 속에서 ‘잘하지도 않고 잘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영은 진창에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완전히 스며들지 않는데, 앞서 지적한 것처럼 일영이 벗어나려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영의 헤맴은 도피나 안주가 아니라 지향에 가까우며, 조금의 무책임함을 감수한다면 전자보다 희망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결국 한참을 도망치다가 10번 사물함에서 태어난 일영은 자신이 떠나온 곳, 차이나타운을 집으로 선택한다.
이처럼 이 영화가 기존 누아르와 가장 차이점을 가지는 부분은 여성 캐릭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비유로서 누 아르적 세계에 대응하는 인물의 색다른 태도를 보여준 것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한 현실적 의미와 서사적 특수성을 가진다. 출구 없는 세계에서, 여행자의 목적지가 여전히 출구일 때 그 발자국은 구원받지 못한 절망의 각인이지만 출구 대신 집이 목적지가 될 때의 발걸음은 절망에 싸운 증거가 된다.
[이에는 이]
일영이 자신이 떠나온 곳을 집으로 정했듯이, 영화는 그녀를 그녀가 태어난 곳으로 몰아넣는다. 어둠으로 관이 될지도 모를 캄캄한 자동차 트렁크 안에서 일영들은 만난다.
어린 일영은 지금의 일영에게 가장 핵심적이고 고통스러운 질문을 고백하듯이 말한다. ‘태어나지 말걸 그랬어.’라는 질문에 살만한 이유를 나열하지 못한 일영은 처음 코인라커에서 태어날 때 울었던 것처럼 울부짖다가 트렁크에서 빠져나오기로 결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살아가기로 하는 것인데 영화에서는 일영이 왜 살기로 결정하는지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있다. 일영이 처음 맡겨진 여자(마우희)를 엄마로 받아들였고,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쫓겨나도 쫓겨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삶이 어떠하던지 혹은 어떠한 이유가 없이도 그녀는 삶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일영의 그러한 결정 이후, 영화는 일영이 끝없이 쫓기는 장면만 보여주다가 그녀가 역으로 엄마를 쫓아가는 방향으로 카메라를 선회시킨다. 이는 부조리의 원리를 세계가 멋대로 강요하도록 허용하는 대신, 오히려 개인이 부조리에 부조리로 대응할 때, 즉 삶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의미와 목적을 비약적으로 대체해낼 수 있을 때 개인이 세계에 대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어두운 등잔 밑]
엄마를 죽이러 가기 전 영화는 갑작스럽게 가장 영상미(?)가 있는 화면을 보여준다. 가족끼리 둘러앉아 심심한 농담을 하며 짜장면을 먹는 행복한 일상에서 일영은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려 한다.
영화는 출구 없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출구를 쫓는 대신 집을 지향하도록 만듦으로써, 어떠한 이유에서건 인간이 부조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짜장면을 먹는 장면이 계속해서 은유하는 것은 누와르에 굴복하는 대신 이를 오히려 삶의 양분으로 삼는 자세이다.
그러나 영화 전체에서 가장 밝은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현시점에서 지향하는 ‘진짜 집’은 사진 속(과거)에만 있거나, 이승이 아닌 곳(영화 내에서 모두 죽는 인물이 모여 있음)에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러한 표현은 진짜 집이 과거 또는 이승 너머에 있지 않을까?라는 암시를 한다기보다 지금 현재 여기에선 드러나지 않음을 강조한다. 집을 지향하는 인간으로 인해 집은 어딘가 있을 듯 하지만 현재는 보이지 않는다. ‘사막의 오아시스 찾기’란 ‘사막에서 벗어나기’만큼이나 답이 없다. 누와르다.
그리고 일영은 마우희를 죽인다. 죽음은 3대에 걸친 세대전승과 서사적 각운을 완성시킨다. 어머니는 딸을 사랑했으나 증오를 사고 집을 찾는 자는 간절히 그리던 집에 코 앞까지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고 제 손으로 집을 죽인다. (칼이 자궁과 배꼽의 어느 부근을 찌르는 것은 눈여겨볼만하다.) 부조리다.
[눈에는 눈]
이제 일영은 인신매매사업을 정리하지만, 외국인 노동자의 불법취업사업을 하고 있고 어머니를 죽였지만 이해하고 있다. 그녀는 이름대로 1과 0 사이의 어딘가로 살아있다.
그래서 일영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럭저럭 잘살고 있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건가? 하고 관객이 궁금할 시점에 영화는 일영을 의자에 앉히고 관객과 눈을 마주치게 한 뒤, 관객에게 계속해서 일영의 눈을 바라보고 있으라는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클로즈업하면서, 암전. 끝이다.
[데칼코마니]
앞서 썼듯이 영화는 현실의 비유로서의 누아르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집이 없는 여자가 집을 찾는 과정(0→1)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따듯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이를 잃어버릴 위기(1→0)에 처해있는 것으로 보인다. 5포 세대, 회사에만 자리가 있는 가장들, 여자 없는 남자들, 헌신하다 헌식 짝 된 독거노인들. 한 가정에서 태어나 각박한 세상살이로 가정을 잃어버리는 보통의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를 영화는 역순으로 보여주면서 주제의식(집 찾기)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현실과 영화의 데칼코마니적 관계의 접점을 드러내는 장면이 관객과 일영의 눈 맞춤이다. 그 순간 관객은 일영의 눈에서, 일영은 관객의 눈에서 누아르적 세계의 부조리를 가만-히 응시한다.
[여자고 남자고, 우리 누와르]
Q. 누아르(Noir)의 세계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A. 존재함 (Yes, Exist)
영화는 이 유서 깊은 질문에 Exit 대신 Exist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은 관객에겐 질문이 될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그 대답을 직접적으로 들려주지는 않았다. 연기 잘하네, 볼만하네, 잔인하네, 뭔 소리 하는지 모르겠네, 쓰레기네, 짬뽕은? 하는 얘기들을 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점은 있다. 짜장은 타들어가는 속처럼 까맣고 면은 풀지도 못하게 베베꼬여 잘 안 풀릴 때가 많지만 그래도 여전히 꽤 먹을만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