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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간의대지 Nov 11. 2021

눈보라,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블레이드 러너 2049 리뷰


한강 작가의 소설 [흰]은 시적으로 보이는 문체만큼이나 독특한 상상력이 담긴 이야기이다. 감히 문학적 강령술이라고 불러야 할까. 소설은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자신의 언니에게 온갖 흰 것들을 주는 이야기이다.  소설의 죽은 언니에게 말하길,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흰 것들은 이미 죽은 존재의 아물 수 없는 상처 위에 흰 거즈를 덧 덴다. 죽은 이의 몸에 난 상처가 아물 수 있을까? 물론 아니오. 그렇지만 마치 투명인간에게 페인트를 끼얹으면 빈 공간에 그의 앙상한 형체가 드러나는 것처럼, 거즈는, 모든 흰 것들은 그것이 감싸 안은 공간을 존재로 끌어올린다. 죽은 언니의 존재를 화자가 흰 것들로 긍정해낼 때 언니는 살아있는 사람이 그러하듯이 세상의 만물을 경험한다. 흰 것들로 인해 죽은 자들도 살아가게 하는 이야기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K(라이언 고슬링 역)자신의 기억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짜 기억이라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를 최초 잉태된 리플리컨트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K에게 남겨진 기억은 진짜이되  복제된 기억이었다. 그가 진짜 인간을 복제한 리플리컨트라는 사실 때문에 겪게되는 일들이 진짜 기억에 대한 책임으로 견뎌지는 것을 보면 이 세계에서 '고유한 기억'은 곧  불완전한 인간성의 가장 완벽한 증명처럼 보인다.


영화 초반부에 샤퍼(데이브 바이 스타 역)K에게 처형당하기 전에 기적에 대해 말한다. 기적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인간을 필멸자라고 정의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불가능한 일은 죽지 않는 것이므로, 가장 인기 있는 종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적은 부활이다. 그렇다면 리플리컨트는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그들은 복제품이다. 그들에게 가장 불가능한 것은 기원(Origin)이다. 따라서, 그들이 애원하는 기적은 시시한 영원이 아니라 활활 타오르는 고유함이다. 그들 자신의 생명이 순식간에 재가 되어 버린다고 해도.  


그래서 영원과 고유함이라는 재앙을 다루는 이 영화에서  잉태는 의미적으로 중요함과 동시에 서사에 있어서 엔진과도 같다. 잉태는 부모의 죽음 이후에도 유전적인 유사성을 바탕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행위(영원과도 같을)이면서 또 다른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과정(고유함을 향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완전한 복제라는 측면에서 모든 인간은 그들 부모에 대해 실패한 플리컨트(Replicant)인데, 그건 인간이 스스로를 신의 모사라고 부르던 오래된 이야기와 닮았다. 영화는 실패한 인간으로서의 플리컨트와 실패한 플리컨트로서의 인간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는 K가 겪는 인간과 플리컨트와의 관계의 양상에서 반복된다. 한 가지 예로, '조이(Joy)'는 고객의 즐거움을 위해 봉사하는 단순한 허상이지만 그녀는 진정한 '사랑(love)'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그녀의 간단한 퇴장 앞에 복잡한 감정을 느낄때 숭고함은 입장한다.  K  '(love)'는 샘플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인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 속 '러브'라는 이름이 역설 그 이상의 표현양식을 갖는 이유는 사랑이 가진 배타적인 맹목성이 때때로 무언가를 파괴하곤 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결국 자신이 리플리컨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 K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다. 자연스러운 이기심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인간적이었으나, 이제 그 위로 숭고한 이타심이 K에게 깃든다. 그것을 인간적 기적 혹은 오래된 충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다른 존재의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 사이에서 복제품은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 그는 무엇인가. 그는 영원하지도 못한 복제품인가(최악인가). 아니면 고유함을 가진 복제품인가(아마도, 최선인가). 영화는 어중간하게 발을 걸쳐 둔 우리(차악)에게 묻는다. 조용해질 무렵 혹은 해가 질 무렵, K는 그의 가짜 아버지로부터 '조'라흔한 이름으로 불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K와 진짜 최초 잉태된 아이(카를로 쥬리 역)각자 허락된 공간에서 바라보는 것은 똑같이 새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들이다. 하얀 것들 아래서 그들은 공간과 삶에 대해 열고 닫힘을 배타적으로 나누어 가진 남매이다. 소설 [흰]에 '진눈깨비'와 '눈보라'라는 소제목을 가진 문단이 있다. 먼저 '진눈깨비' 파트인데, 눈도 비도 아니면서 금세 녹아버릴 진눈깨비는 K의 여정을 닮았다.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컹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컹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흰_한강. 중에서)


그런데 진눈깨비 여정의 끝에서 영화가 지막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펑펑 내리는 양감의 눈발이다. 플리컨트에 불과한 K는 진짜를 위해 죽었다. 그러면 진눈깨비는 자기 존재를 넘어 선 송이가 된다. 그는 적어도 한동안 녹지 않는다. 눈이 지저분한 세상을 하얗게 뒤덮을 때 벌어지는 일은 무엇일까. 눈은 거즈처럼 허공 위에서 인간적 무엇들을 쌓는.


마지막은 같은 소설 [흰]의 '눈보라'라는 소제목을 가진 단락이다. 이 구절은 마치 계단에 누운 K의 내레이션처럼 느껴진다. 눈공이가 된 진눈깨비의 독백. 그리고 마치 한번도 영원해본적 없는 인간이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불가능한 꿈, 그러니까 유한한 인간의 죽음 위에 서서 영원히 바라볼 인간적인 무엇에 대한 상상. 물론 완전한 망각에 대한 마땅한 변명일 그 이야기들로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본다. 그러면 마치 진공 상태에서도 소리가 기운 곳으로 깃드는 듯이.


"몇 년 전 대설주의보가 내렸을 때였다. 눈보라가 치는 서울의 언덕길을 그녀는 혼자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우산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흰_ 한강. 중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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