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무엇일까?
잘은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계 때문에 불행해하는 것을 안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좀 이기적이어도 될까, 아니면 타인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약간의 희생과 배려를 감수해야 할까? 감내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마지노선은 어디까지가 적정한가.
친구, 연인, 부부 가깝고도 친밀한 여러 형태의 관계가 존재하지만 ‘여행’만큼 압축해서 신랄하게 볼 수 있는 수단이나 방법이 존재할까 싶다.
나는 어학 공부를 위해 중1 때부터 필리핀에서 8년간 살았었다. 귀국해서 곧바로 영어 학원에 취직했는데 삶이 너무 피로했다. 돈벌이의 고됨이야 말할 것 없지만 관계가 힘들었다. 사람에게 치이느라 향긋한 20대 풋과일 같은 내 시절에 오래 방치되어 터지고 흐물흐물해진 과일에서 날 법한 시큼한 냄새가 배어나 진저리 쳤었다. 해방되고 싶었다.
정육점 유리 진열대에 도열된 돼지고기에 국내산인지 미국산인지 표기된 태그처럼, ‘필리핀 출신’ 딱지가 붙은 강사, 그게 나였다. 원장들은 잘 팔리지 않을 것 같아서였는지 ‘필리핀산’인 나를 ‘캐나다산’으로 둔갑시켜 속여 팔았다.
단연컨대 내 영어 발음은 교포에게도 뒤지지 않았고 강의 실력도 탁월했다. 식품위생법 검사 같은 단속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표면적으로 문제가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인공 호수처럼 겉이 너무 번드르르하니까 고인 물처럼 내면이 썩어갔다. 신분 세탁처럼 바뀐 ‘출신’ 문제를 깔끔한 뚜껑으로 잘 덮고 지낸다 생각했지만 잠 못 드는 밤 뒤척이며 움직일 때마다 출렁거리며 비위 상하는 냄새가 넘쳤고 정신을 썩게 만드는 것 같았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면 학원 강사보다는 더 나은 커리어를 갖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사교육 기관의 강사가 아니라 원장이나 경영자 말이다.
유학을 알아보고 다시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다 현실적인 타협점으로 유학에서 한 발 물러난 ‘쉼 표’를 선택했다.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이었다.
2007년 겨울, 25세 막바지를 달리던 나는 홀로 유럽 여행길에 오르기 위해 한 여행사를 찾았다.
그전에 자유여행을 할 정도로 영어도 되고, 팀을 자서 여행하면 재밌겠다 싶어 '유랑 카페'(백패커들이 모여서 같이 여행 팀을 짜는 온라인 카페)에 가입해서 활동도 해 왔지만 터지기 직전의 풍선처럼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력이 제어되지 않는 지점까지 와 버린 때였다.
오롯이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혼자만의 자유로운 여행을 갈망했었다.
엄청난 검색 끝에 비행기표, 숙소, 그리고 기차표만 책임져 주고 나머지 일정은 알아서 짤 수 있다는 여행사를 발견했다. 사실 말이 패키지지, 거의 자유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금액도 나쁘지 않았다.
출국 전 미팅을 위해 사무실에 갔는데 30대로 보이는 한 여인이 나타났다.
'뭐야. 나 혼자 간다고 했는데 왜 멋대로 동행인이 있는 거야?'
난 혼자서 자유롭게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길거리 상점이나 벼룩시장, 소규모의 갤러리를 누비고 싶었단 말이다. 그랬던 여행이 꼬여버린 것은 어이없게도 여행사 직원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치안 문제도 있고 혼자 여행하려던 두 분이 같이 가시면 어때요?”
나는 귀가 엄청 얇다. 단호한 척하지만 매 순간 결정장애가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선택이 쉽지 않았다.
20대에는 다들 그랬던 것 같다. 내 결정이 잘못됐을까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확인하고 다수의 의견을 따르려고 하는 태도 말이다. 사실 '잘못'된 결과라는 '정답'은 인생이라는 시험지에서는 없는데 말이다. 실패를 경험하지 않으려는 두려움이 컸던 청춘이었던 것 같다. 반면 40대가 된 지금의 나는 '답정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책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서인 듯하다. 경험이 업데이트되어 최악은 피해 가는 내비게이션도 장착되었고, 감정이냐 이성이냐 입력값과 출력 값의 오차를 줄이는 계산기도 정교해져 가는 연륜이랄까.
아무튼 그때 만약 내가 ‘아니오. 혼자 여행하고 싶었어요.’라고 소신이 있게 계획대로 답했더라면 꿈꾸던 쉼을 맘껏 누렸을 테지만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소중한 인연 하나는 놓쳤으리라.
지금은 ‘유렵 계모’라고 부르는 언니.
작은 키에 강단 있어 보이는 눈빛, 찰나였지만 직원의 권유에 마주친 그 분위기에 나는 압도당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언니도 나도 혼자서 여행은 가고 싶지만 두려움이 앞서 밀려왔던 것 같다.
30대라니, 인생 대 선배다! 싶었지만, 영어도 잘하지 못하고 왜소한 여자로서 혼자 유럽을 여행하겠다는 결정을 끝까지 가져가기는 쉽지 않았겠단 생각이 든다. 40대가 된 지금의 시선으로 보니 30대는 여전히 풋풋하게 어린 청춘이고 20대가 가진 두려움이 종결된 나이대가 아니라 연장선에 서 있는 청춘이라 생각이 든다.
현재 육아맘이자 며느리, 누군가의 아내인 나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혼자 여행할 시간이라도 주어진다면 지옥 여행이라도 감사할 것 같은데, 후후.
혼자 돌아다니는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온다. 악마가 가이드라고 해도 베프 먹고 두려움은 소맥에 말아 털어 마시고 날아다닐 주부가 얼마나 많을까.
갑작스러운 여행사의 제안에 당시 언니의 속내는 헤아릴 길은 없었지만, 유럽 미아가 될 염려가 없는 영어 능력자라도 여행지에서의 사건, 사고까지는 언어 능력으로 커버되는 것은 아닐 테니 동행이 있어 나쁜 것 없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단번에 오케이를 외치며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새로운 곳을 향한 설렘이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으리라. 그 설렘이 서로 통한다고 느끼게 했듯이.
그래, 통했지. 우리는 같은 존재를 사랑했다.
하. 나. 님.
종교가 같아서 16시간의 비행 동안 어색하지 않은 대화를 이어갔지만, 그뿐이었다. 곧 이 여행은 트러블로 점철되리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박물관 파’였다.
젠장. 나는 ‘미술관 파’란 말이다.
이 거대한 취향 차이로 나는 인생에서 가장 지루하면서도 불안에 미쳐버리는 4시간을 보내게 된다. 영국에서 우리는 가장 긴 시간을 할애했다. 아니, 영국에 가볼 데가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박물관인 거야? 미술관은 언제 갈 건데?
지금에 와서 말이지만, 다른 팀들은 영국의 밤 문화도 즐기러 갔었다고 했다. 홀리(Holly, 성경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기독교인을 일컫는 말)했던 언니랑은 꿈도 못 꿀 일이었지만.
영국엔 테이트 박물관이라는 기차역을 변형해서 만든 박물관이 있다.
종종, 현지 작품들을 전시하기도 하여서 내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이다. 박물관에서 살 것처럼 구는 언니를 4시간 동안 따라다니며 졸라 겨우 탈출했는데, 테이트 박물관에 도착했을 때는 마감이 1시간도 채 남지 않았었다. 화려한 아트숍도 있고 무려 존 레넌의 부인이자 전위 예술가인 오노 요코의 사진 전시가 있던 날이었다! 그런데 1시간도 남지 않았어! 욕을 내뱉을 시간도 없었다. 원망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그날의 밤공기는 내 마음처럼 유난히도 냉랭했다. 너무 억울한 나머지 피곤해 먼저 곯아떨어진 언니를 뒤로한 채 새벽 3시에 목욕을 하고 싸이월드 어딘가 분노의 일기를 썼던 거 같은데. 그렇게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은 싸이월드 BGM이 달래주었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일이 미안했던지 언니가 먼저 아침을 먹자며 내 손을 식당으로 잡아끌었다. 배고프면 더 예민해지니까 먹이고 보자는 노력함이 보였던 30대였지. 그래 봤자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같이 먹고 노는 애들처럼 보였겠지만 한 끗 차이가 크긴 했다. 위장이 든든하게 차오르니 마음에 가득 찼던 시베리아 바람이 조금은 빠져나간 느낌이었으니까.
지금 이렇게 돌아보니 취향 차이인데 그 당시엔 세대 차이라고 생각했었다. 박물관을 좋아하다니 꼰대다. 어린 마음에 이런 편협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흔인 지금 돌아보면 박물관 파냐 미술관 파냐는 나이 상관없이 취향인 것을. 다만 묘하게 거슬리는 뉘앙스와 태도가 분명 있었다. ‘네가 어려서 뭘 잘 모르나 본데.’ 하는 그런 눈빛. 그런 눈빛에 비해 나의 장점은 너무 잘 활용한 게 아닌가 싶다. 어색한 기운이 돌 때 먼저 밥을 먹자고 말하는 게 사과와 반성은 아니었다. 달래 놓고 또 같은 패턴으로 여행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 사과가 아니라 편하게 후 일정을 끌어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란 생각이 들지 않도록 언니는 바뀌었어야 했다.
영어 능력자라는 것과 현지 정보 서치 능력을 비서처럼 활용한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억울한 마음이 올라왔다. 나는 대체 언니에게 어떤 것을 받고 있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기브 앤 테이크가 명확하지 않으니 누적된 불만을 다스리지 못하고 도망쳐버린 날이 있었다. 영국에서 그렇게 시작된 불만이 결국 스위스 루체른에서 터진 것이다.
나의 ‘쉼표’는 나만을 위한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는 언니를 챙기면서 다닐 이유가 없잖아.
마치 연애하다 질려서 제멋대로 ‘생각할 시간을 갖자’라며 통보하는 남자처럼 행동했다. 기차 시간에 맞춰서 다시 만나자는 말만 남긴 채 안내데스크에 케리어를 맡기고 도망치듯 역을 나가버렸다. 더 붙어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쏟아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 정도는 할 수 있잖아.'라고 생각했다.
혼자 걷는 길은 너무 홀가분했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다가 벗어던지니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가만히 지나는 커플만 구경해도 혼자 달달해졌다. 둘이 아니라 혼자서 달달해지려면 초콜릿이 필요했다. 마트로 들어가서 초콜릿도 사 먹고 엔도르핀이 분출되자 용기가 솟았는지 아무나 붙잡고 사진도 찍어달라 했다. 처음 한국에서 계획했던 여행을 이제야 체험하는 기분이었다.
한데 달콤하던 입안이 끝내 쓰게 변하기 시작했다. 영어가 서툰 언니가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온갖 어두운 상상이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혼자서 더 멀리 가고픈 마음과 언니를 찾아야 한다는 걱정 사이에서 잠시 헤매었다. 결국 발길이 기차역으로 돌아섰다. 언니는 역내 크리스마스 마켓 안에 있었다.
다시 찾은 언니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가슴 한 구석 뾰족하게 얼어 있던 고드름이 녹아버렸다. 두려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 위로 순식간에 반가움이 번졌다가 이내 서운함으로 물드는 낯이라니. 숨기려 애썼지만, 뚝뚝 떨어지는 서러움을 따라 시선이 닿은 곳은 꽉 쥐고 있는 커다란 가방이었다. 가방 맡길 곳도 찾지 못해서 그 무거운 가방을 들고 다니며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고 했다.
우리 관계에 대한 많아진 생각들이 저 가방처럼 무겁게 쌓였을 시간이었을 게다. 나는 그만 마음이 짠해졌다. 시간이 남았으니 가방은 안내데스크에 맡겨두고 근처 유명한 곳만 같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홀가분하고 즐거웠던 시간이기만 했던 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었다. 기껏 생각해낸 말이
“혼자서는 사진 찍기 힘들더라. 언니랑 같이 다니는 게 좋았구나…. 싶더라고.”라는 사진 핑계가 다였지만 미안해하는 내 마음을 언니도 아는 듯 보였다.
그렇게 떨어져 생각해보는 시간이 있었기에 남은 기간 서로 배려하며 끈끈해져 갔다. 타지에서 서로 의지하며 보내는 시간의 농도가 짙어지니 한 달은 일 년처럼 느껴졌다. 중간중간 숙소 문제도 있었는데 국제전화로 말끔히 다 해결해 버렸다.
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마치 내가 언니 같다는 생각도 조금은 했지만, 언니는 역시 언니였다.
여행 내내 든든했었다.
그녀와 나는 이제 유럽 계모와 유럽 딸내미로 서로를 부른다. 애증의 관계였다고 나 할까.
하지만 귀국 후 불러온 우리네 변화는 우리를 더 돈독하게 만들었다. 몇 년 동안 보지는 못해도 서로의 안부를 언제든 물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
제주도에 입도하고 언니가 이곳에 여행을 온다고 했을 때도 내가 먼저 만나서 밥 먹자고 했다. 우린 그렇게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성장을 했다.
언니가 인생 선배로서 전해주는 따스한 위로는 당시 유럽에서 청춘이 느끼던 것과는 다른 진한 연대가 있다.
20대에서 30대를 관통하는 동안 내가 인간관계에 대해 어려움을 토하면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해주며 위로도, 해결책도 동시에 주곤 했다.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그런데도 정작 언니와의 관계에 대한 어려움은 터놓지 못했다. 아니 안 했지. 상황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으니까.
언니에게서 들은 가장 큰 숙제에 대한 답은, 필리핀 딱지를 떼고 싶은 게 너라면 더 공부하면 되고, 원장이 캐나다산이라고 속여 팔아도 너만 떳떳하다면 실력으로 승부를 거는 게 낫지 않겠어?
맞아. 그땐 그래서 실력으로 승부를 걸어야겠다 생각했던 거 같다. 사실 그 말이 듣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가 어때서? ‘영알못’인 나도 있는데 필리핀산 한국산 출신이 중요해? 언니의 그 말이 정말 큰 힘이 되었고 보란든 더 잘 해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이 우리 삶엔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몇 년 뒤 나는 한국에서 대학원 졸업장을 따서 한국산이 되었고, 언니는 영알못의 서러움을 공부로 승화시켜 영어 강사가 되었다. 그리고 언니는 지금도 혼자서, 또는 둘이서 자주 여행을 다니며 ‘쉼표’를 찍는 프리한 삶을 살고 있다.
연년생 아들 둘을 둔 40대가 된 지금의 나는, 제주도에 살고 있다. 남들은 여행지로 찾는 이곳에 난 도민이기에 관광지 할인도 받으면서, 주말엔 관광객 코스프레를 한다. 뭐 고작 여행이라곤 가족들과 바닷가, 카페 투어, 뭐 운이 좋으면 남편이 아이 둘을 봐주고 서울에서 온 친구들과 하룻밤 밤새우는 게 전부지만….
여행이란 무엇일까? 혼자만의 자유를 위해 떠났는데 막상 가보니 여행지에서 마주쳐야 하는 여러 사람과의 다른 소통이 늘 따랐다.
개인주의가 일반화된 지금. 나는 어디쯤 있나. 여행지에 가도 옆방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거슬리고, 맛집에서 줄 서 있다가 혹여나 새치기라도 당할까 봐 예민해져 있고, 예전엔 대신 자리도 맡아주던 시절도 있었는데 말이야. 세상이 너무 삭막해진 것이 아닌가.
당시 백패커들도 지금 생각하면 다 꼬꼬마 들인데, 취향이네 꼰대네 하면서 싸우고 있노라니. 여행에 와서 설렘보단 서로 뭔가 추억 쌓기, 사진 찍기 경쟁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이 글의 제목에 '티슈인맥'이란 말을 넣은 이유를 돌아본다. 나는 아직도 ‘관계’를 두고 그 소중함이랄까 기대를 품고 사는 사람이란 것을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다.
다시 읽어보니 20대 30대를 지나오는 동안 변하고 성장한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관계란 어려운 숙제임을 돌아보는 글이 아닌가 싶다.
결국 여행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계속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과 의미에 관한 것이구나 싶다. ‘티슈 인맥’ ‘티슈 관계’라는 신조어를 들은 적이 있다. 목적이나 목표 등 그 순간의 필요에 따라 맺어진 관계가 쓰임을 다하면 쉽게 끊어지고 버려짐을 일컫는 단어에 작은 탄식을 뱉었었다.
동시에 두 아들을 키우는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관계에 대한 고민을 듣는 날이 온다면 어떻게 조언을 해줘야 할까 고심해본다. 내게는 늘 새로운 도전 같은 관계의 대상이 두 아들이기도 하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존재임과 동시에 순식간에 나를 미쳐버리게 만들 수도 있는 이 작은 동행인들 말이다.
‘개인주의’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에 피해를 주는 ‘이기주의’와는 구분되는 단어란 걸 알지만 어쩐지 온기가 없는 태도를 담고 있어 좋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다가가면 거리가 좁혀지며 낯선 타향이 섞인 공기를 나눠마시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때론 아무런 목적이나 이유 없이도 선의가 존재하는 게 세상이라는 걸. 혼자 완전무결하게 호흡하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의 의미를 아이들이 체득했으면 한다.
아이들이 장성해 유럽 여행을 떠나겠다고 설렘 단긴 말을 하는 날에 나의 이 유럽 여행기를 이야기해주고 싶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도 새로운 관계와 여행의 이야기들이 쌓일 것이니 멈추지 않고 성장해가는 ‘나’를 아이들과 함께 키워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