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6일 첫 번째 무대 ‘걸작, Classic’
하이든 피아노 3중주 A장조, Hob.XV.18
Vn. 김영욱 Vc. 박유신 Pf. 김수연
모차르트 현악 5중주 C장조 KV.515
Vn.1 김영욱 Vn.2 Sebastian Bohren
Va.1 이한나 Va.2 Adrien La Marca Vc. 강승민
베토벤 피아노 3중주 C단조, Op.1
Vn. Sebastian Bohren Vc. 강승민 Pf. 김태형
모차르트 현악 6중주를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탄테 E-Flat 장조, KV. 364
Vn.1 김재영 Vn.2 김영욱
Va.1 Adrien La Marca Va.2 이한나
Vc.1 문태국 Vc.2 박유신
실내악은 처음이다. 여자들이 가방이나 재킷을 살 때 블랙이 있어야만 컬러 에디션을 장만할 수 있는 것처럼, 일 년에 겨우 한두 번뿐인 나의 공연 관람은 번번이 오케스트라 협연 내지는 독주 공연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일 년에 겨우 한두 번뿐일지라도 이십 년 가까이 쌓이다 보니 이제야 여력이 차올랐는지, 이미 실연을 경험했던 곡들을 제하고 나니 자연스레 실내악이 첫 번째 선택지로 부상했다.
실내악이 처음이니 실내악 문외한에게도 익히 알려진 노부스 콰르텟 멤버들이 돌아가며 협연하고 기본 중의 기본인 고전주의 음악이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연주회를 선택했다. 사실 노부스 콰르텟 연주회를 보고 싶었지만 지난 2월 통영국제음악제 이후 예정된 국내 공연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세계적인 수준의 노부스 콰르텟 연주를 실내악 첫 경험으로 삼으면 상대적으로 그보다 덜 알려진 실내악 공연은 사실상 선택지에서 완전히 배제될 우려도 있기에 어쩌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시작부터 놀라웠다. 세 사람 모두 각기 솔리스트로도 활동하는 연주자들인데 연주 흐름은 물론이고 음량까지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에 올해로 6년째 어텀 실내악 페스티벌 예술 감독을 맡고 있다는 박유신 첼리스트가 무대 인사로 말했던 것처럼 엄청난 연습의 결과물일 것이다. 특히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은 놀라운 기량과 감각으로 귀뿐 아니라 마음까지 훔쳤다. 결코 튀지 않는 바이올린 음색과 절제된 모션으로 다른 악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표가 많을 게 분명한 바이올린 파트를 유려하고도 질박하게 표현해냈다. 왠지 낯익은 김수연 피아니스트는 본인의 이미지만큼이나 맑고 투명한 음색의 타건으로 하이든이 모차르트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두 번째 곡에서 등장한 첼리스트 강승민은 강렬한 카리스마다운 존재감을 마음껏 발산했다. 바이올린이 두 대가 되자 김영욱의 감각은 더욱 세련돼졌다. 세컨 바이올린보다 살짝 도드라져 메인으로서 전체를 끌고 가기는 하되 역시 다른 악기들과의 밸런스 감각이 탁월했다. 그 정도가 너무나 미세해서 다섯 대의 악기 음색이 제각각 선연하게 구분되어 들릴 지경이었다.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자신의 연주보다 타인의 연주에 더 귀를 열고 집중했을지, 주로 나 자신에게만 귀기울이는 나로서는 그저 존경스러웠다. 최적의 인원으로 최고의 음색을 만들어내기 위해 비단 귀뿐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내어주었을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인터미션 때 함께 갔던 친구가 첫 곡부터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연주회에서 흔히 눈물을 흘리는 친구가 아니었기에 뿌듯했다. 주중의 피로감을 물리치고 먼 길을 오가야 해서 혼자 볼까 고민하다가 함께 보게 되었던 터라 공감할 친구가 있어 더할 나위 없었다.
그리고 베토벤. 베토벤은 역시 베토벤이었다. 듣기만 해도 연주하기 얼마나 까다로운지 느껴졌다. 클래식 에프엠에서 몇 차례 실연을 들어봤던 김태형 피아니스트는 나의 기억보다 훨씬 더 강렬한 타건으로 베토벤다운 흐름을 주관했다. 그의 연주 자태가 너무나 세련되고 우아하여 '노블하다'는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실례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베토벤 피아노 3중주라는 곡명으로 인해 실내악 초자인 내게 오류가 발생했다. 나는 내가 익히 알고 있던 선율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생소한 선율이 흘렀다. 당황해서 조심스레 프로그램 북을 뒤적여 봤지만 역시 베토벤 피아노 3중주가 기재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베토벤 피아노 3중주는 C장조와 C단조가 따로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곡은 C장조(Op.56)였고, 이 곡은 주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곡이었는데, 하필 내가 오케스트라 없이 3중주로만 연주된 음반을 즐겨 들었던 터라 나로선 당연히 C장조 곡이라고 멋대로 치부해 버렸던 것이다. C단조(Op.1) 곡은 기존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3중주에서 피아노 위주의 가벼운 분위기 조성을 목적으로 하던 기조를 깨기 위해 4악장을 추가하고 단조를 설정함으로써 격렬하고 어두운 서정미로 감정 표현을 심화시킨 곡이라고 한다. 첫 실내악 경험에서 새로 배움을 얻어 기뻤고, 자세히 알아보지 않고 안일하게 임한 자세는 부끄러웠다.
그리고 마지막 현악 6중주. 나로선 많이 어려운 곡이었다. 피아노 없이 현으로만 구성되어 시종일관 현란하고도 장중했는데, 마치 소스 없이 샐러드 먹는 느낌이랄까. 피아노가 빠지니 모차르트가 그토록 어렵고 심오하게 들릴 수도 있었다. 인터넷에서도 관련 정보를 얻기 힘들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곡은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교향곡과 협주곡의 성격을 모두 갖춘 장르라고 프로그램 북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 곡은 때로 바이올린 협주곡, 또는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이중 협주곡으로 소개될 정도로 두 악기의 활약이 두드러지는 곡이라고 부연되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바이올린 연주자 두 명이 모두 노부스 콰르텟 멤버였다. 처음 등장한 김재영 바이올리니스트는 예리한 음색과 음역을 매력적으로 표현해냈는데, 내게는 세컨 바이올린으로 자리를 옮긴 김영욱 바이올리니스트의 솔로와 앙상블의 엇갈린 표현력이 훨씬 더 부각되었다. 겨우 몇 초 사이에 솔로와 앙상블의 음색과 음량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섬세한 표현력은 자칫 텁텁하게만 느껴질 수 있었던 현악기들만의 흐름에 느낌표가 되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어쩌다 보니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살게 된 나로서는(아니 어쩌면 독불장군이라서 혼자 걷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실내악에서 인생을 배우는 기분이었다. 함께 가야 예쁘다. 나를 조금 덜어낸 자리에 타인과의 경계를 조금 넓히면 이토록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 연주회가 끝나고 친구와 헤어져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