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넷플릭스 인기 시리즈물

by 글섬

지난 추석 연휴 끝자락, 무더위를 뚫고 시원하게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감자전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동네 감자요리 맛집에서 감자전과 수육을 주문해 레드 와인을 한 병 털었다. 식사 때 중시하는 페어링 중 하나가 바로 컨텐츠. 많은 식사를 혼자 하는 편이라 더욱 그렇다. 혼자일 때는 책, 글, 음악, 드라마 중 하나일 때가 대부분인데 반해 함께일 때는 예능을 찾게 된다. 함께일 때는 컨텐츠 자체가 아니라 그에 따른 대화가 페어링의 주요 덕목이 되기 때문이다.


더할 나위 없는 식단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컨텐츠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늘 그렇듯 티비에서는 마땅한 대상을 물색하지 못해 넷플릭스 버튼을 누른다. <흑백요리사>가 선택되었다. 식사하는 동안 뜻없이 웃고 떠들 만한 컨텐츠를 선택했을 뿐인데 웬걸, 와인 한 병을 다 비우도록 집중력이 흩어지지 않는다. 평소 시리즈물을 연속해서 보는 걸 즐기지 않는 편이기에 딸아이는 계속해서 "계속 봐?"라고 물어야 했고, 내 반응은 가히 뭘 물어, 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4화를 몰아보고도 너무 재밌다는 탄사를 연발하며 다음 화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랬던 그가 6화에서 갑자기 팀플로 전환된다. 이 시점에 나는 의아해졌다.


흑이든 백이든 거기 누구 하나 자신의 요리에 자신 말고 다른 이의 상상력이나 의도, 책임이 수반되는 요리사는 아무도 없다. 애초에 그게 그 프로그램의 기반 조건 아니던가.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사람들의 정면 승부.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로선 바로 그 점에 열광했다. 요리라는 하나의 분야에서 각기 다른 개성과 창의성이 선연히 부각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노력으로 점철되었던 각고의 시간들에 박수를 넘어 경의를 표하게 되는 심정이었던 건데,


그리 뛰어난 분들을 선별해서 모아놓고 신입에나 어울릴 만한 평가 형태인 팀플로 해당 전원을 떨어뜨리는 방식이 합당한지, 평범한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분들이 굳이 단합해서 결과를 내야 하는 이유는 뭘까. 누구 하나 경력과 실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분들이 헤드로 뽑은 한 명의 지시에 군말없이 실행하는 모습을 통해 사회생활의 정석이랄지, 결과주의의 본연이랄지, 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는 초절정 경지 등을 배우라는 의미인가? 그렇다면 그건 완전 그랬다.


그러나 이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갖고 있던 기존의 독창성을 완전히 말살해야 한다는 집단 우선주의로 잘못 전달될 우려가 깊다. 이 분들은 그런 과정을 이미 충분히 거쳐 스스로 그 어떤 경지에 도달한 분들일진대, 토너먼트 클리셰처럼 굳이 집단 경쟁 과정을 제외하지 않은 제작진의 한국식 결과주의적 발상이 아쉽기 그지없다.


절대 다수를 떨쳐야 하는 토너먼트 방식의 숙명을 따르기로 하자면, 나라면 식재료를 극도로 제한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 같다. 아니면, 요리 도구를 제한하거나. 향후 이런 방식이 3차나 4차에서 시도될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집단 경쟁은 이 분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적합하지 않다. 애초에 요리사라는 직업은 남과 달라야만 생존 가능한 직업군이 아니던가.


혹시 시청 흥미를 높이기 위해 백색이 너무 뛰어나 흑색이 전멸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발상이었다면, 그 역시 아쉽긴 마찬가지이다. 만일 흑색이 백색에게 철저하게 밣히기만 하는 결과가 초래된다고 해도 그 결과가 아니라 과정만으로 충분히 흥미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백색들의 노련하고도 철저한 태도와, 동일한 재료로도 매번 새로운 레시피를 시도하는 백색들의 독창성, 그리고 그에 대항해 패기 넘치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 흑색들의 상대적 참신함이 이미 그 자체로 열광하기에 충분하다.


넷플릭스 시리즈가 뭐든 늘 2% 부족하게 여겨지는 똑같은 한계점이다. 돈을 물 쓰듯 써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투자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어떤 스토리든 투머치다. 시리즈 회차가 너무 많고, 재료가 너무 넘친다. 특히 한국 컨텐츠의 경우 더한데, 마치 뭔가를 순수하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있어 보인다. 여인의 나체보다 야한 게 바람에 나부끼는 사선이 트인 치맛자락으로 한쪽 다리가 보일 듯 말 듯한 모습이다. 약간의 결핍이 충족을 극대화하고, 창작이란 소비 상대에게도 일정 영역을 넘겨야만 완성이다.


흑백요리사가 주목을 받은 주된 요인은 오직 요리에만 방점을 찍었다는 점이다. 요리 혹은 요리사의 서사나 부연 설명 따위는 접어두고 철저하게 요리라는 결과물에만 집중한 데 대한 열광이었다. 아직 여러 회차가 남은 듯하니 부디 남은 회차에서는 처음과 같이 요리에만 집중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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